• [가져온 괴담] 악마와 같은 여자 ~ 1 ~2010.06.26 AM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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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28일 오전 11시경이었다.

삼십대 말쯤의 초라한 모습을 한 여자가 나의 법률사무소로 찾아왔다.

튀어나온 볼 위에 파묻힌 듯한 작은 눈에서는 만만치 않은

삶의 곡절과 강인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사건을 의뢰하러 온 게 아니라 잠시 상담만 하러 왔습니다. 되나요?”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뭔가 자신이 닥친 현실에 대해 정밀한 재 감정을 시도하려는 태도였다.


“어떻게 저를 알고 찾아오셨죠?”


나 역시 그녀의 경로를 탐색 했다. 단순한 지식검색기계가 되기 싫었다.


“저도 이런 말 하는 게 어떤지 모르는데 감옥 안에 있는 다른 살인범들이 가보라고 소개를 해서 왔어요.”


다른 살인범이란 말을 쓰는 걸 보면 그녀가 살인에 관련됐다는 얘기다.

그리고 살인범이 다른 살인범에게 변호사인 나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따져 보니까 이럭저럭 살인사건을 많이도 맡았다.

사건마다 수면 밑의 빙산 같은 내용들이 많기도 많았다.

그 여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살인범이 소개한 게 찝찝하지만 그냥 한번 와 본 겁니다. 미안합니다.”


그 정도면 나를 선임할 의사는 없지만 솔직한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상담은 정확히 해 드리겠습니다.

유리하던 불리하던 제3자의 입장에서 판단 한 걸 정직하게 말씀드리죠.

아마 먼 훗날 실질적인 도움이 된 걸 아실 겁니다.”


어느 분야건 일단 정확한 진단이 중요했다.

브로커들의 사기가 법조계에도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 여자는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듯 조심스럽게 앉았다.

긴장한 그녀의 얼굴에서 초조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저 혹시 지난해 재벌부인이 판사사위하고 사귄다는 여대생을 청부살인한 사건 아세요?


여대생이 공기총에 맞아 죽었는데요.

텔레비전하고 신문에 많이 났는데... 그 범인중의 한 사람이 제 남편입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간신히 입을 열었다가는 말끝을 흐렸다.

며칠 전 뉴스와 2580 시사프로에서 본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두 사내가 누런 점퍼를 푹 뒤집어 쓴 채 봉고차에서 내려 허리를 구부리고

경찰서문을 향해 다급히 가고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 플래쉬가 그들의 등짝에 가시같이 가서 박히고 있었다.

그들 두 명은 한 재벌부인으로부터 청부를 받고 여대생을 살해한 후 해외로 도주했었다.

재벌과 판사, 치정과 청부살인이란 우리사회 상부 층의 정신적 빈혈 증세를

반영한 사건이었다.

시사프로인 2580에서 재벌부인에게 전화로 묻는 장면이 나왔다.

회장부인은 침착한 어조로 담당 피디를 타이르면서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말도 안 되죠. 제가 어떻게 살인을 교사할 수 있겠어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입니다.”


잔잔한 어조와 내세우는 논리에서 난 완전범죄를 시도한다는 냄새를 느꼈다.

음지의 세계에서 살인도 하나의 독특한 돈벌이였다.

의뢰인 중에는 악덕기업인이나 사이비교주, 부패 정치인들이 많았다.

걸리면 사후처리 방법도 일정했다.

변호사를 사고 관료들을 매수했다.

감옥 사는 값을 충분히 치르면 범인도 입을 닫았다.

그러면 사건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앞에서 잠시 침묵하던 그 여자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도 초등학생하고 중학생을 키우는 엄마입니다.

그 죽은 여대생 집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남편이지만 극형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조금만 더 절제를 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여튼 모든 게 남편의 잘못입니다.”


그녀는 간단히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보험회사 직원이던 그녀는 한 고객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과 선을 보고 바로 결혼했다.

남편 집안의 고모부는 재벌이라고 했다.

여러 계열회사와 호텔을 가지고 있고 제주도 등 곳곳에 땅도 많았다.

IMF 외환위기의 파도는 그녀 가족을 단숨에 쓸어버렸다.

지하 셋방에서 그녀는 녹즙배달을 하고 남편은 가방공장에 나갔다.

나중에는 고모인 회장부인의 운전기사를 했다.

회장부인의 기사를 하는 남편의 얼굴은 항상 수심이 가득했다.

곤란한 일들만 시킨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판사 사위를 미행하는 게 남편의 일이라고 했다.

아침에 판사 뒤를 따라 같이 출근하고 하루 종일 법원 앞에서 죽치다가

저녁에 돌아가 보고하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회장부인은 매번 화를 벌컥 냈다고 했다.

회장부인은 한번 누구를 의심하면 그걸 푸는 법이 없었다.

회장부인은 병적으로 사위를 의심했다.

심지어 딸 내외의 방에 도청장치까지 하고 감시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마담뚜의 소개로 딸을 결혼시킬 때 괴 전화가 왔었다.

누군가 판사사위의 과거를 제보했다는 것이다.

회장부인은 현직형사, 심부름 센터 등 수십 명을 고용하고 다시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로 그녀의 남편을 부렸다.

그리고 회장부인은 다시 종종 현장에 나타나 남편을 감시하는 이중,

삼중의 망을 구축했다.

어느 날부터 남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도 못 잤다. 회장부인한테서 수시로 지시전화가 걸려왔다.

남편은 아내에게까지 비밀로 전화를 받곤 했다.

그녀가 마당에서 김장을 하던 어느 날 오후 남편은 통장 하나를

그녀에게 던져 주고는 황급하게 출국했다.

그 직후 검단산 기슭에 묻혀있는 여대생 시체를 한 등산객이 발견했다는 뉴스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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