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232018.10.04 AM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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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三. 병란의 발발

 

◇ 고시라카와 진영의 무사

~『兵範記(효한키)』는 예에 따라, 스토쿠 죠코(崇徳上皇),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 측이 먼저 병사를 움직였기 때문에,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 측 진영도 이에 대처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사토다이리(里内裏)인 타카마츠도노(高松殿)에는 6월 1일 이후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와 요시야스(義康)가 경호를 담당하고 있었다. 타카마츠도노에는 원래부터 무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의 적류(嫡流)인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 셋츠 겐지(摂津源氏) 출신인 미나모토노요리마사(源頼政), 미츠마사(満政 = 満正)의 혈통인 미나모토노시게나리(源重成), 몬토쿠 겐지(文徳源氏) 출신인 미나모토노스에자네(源季実), 이세 헤이시 출신인 타이라노노부카네(平信兼), 코레시게(惟繁)들이 들어왔다. 노부노리(信範)는 기록한다.「군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라고.

 그들 중에서 동원 병력의 수가 가장 많았던 이는 타이라노키요모리, 그 다음이 미나모토노요시토모였다. 양군의 상세한 병력 구성에 대해서는,『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 의지 할 수 밖에 없다. 기록 되 모든 것을 사실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인 경향을 읽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양자의 군사 편성은 대조적이었다.

 우선, 키요모리군은 동생인 요리모리(頼盛), 노리모리(教盛), 츠네모리(経盛), 자식인 시게모리(重盛), 모토모리(基盛)의 이치몬(一門), 치쿠고노카미(筑後守) 타이라노이에사다(平家貞), 그의 아들인 사다요시(貞能) 등... 후다이 케닌(譜代家人)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 귀족층, 그리고 이토 카게츠나(伊藤景綱) 부자나 야마다 코레유키(山田是行) 등... 이세(伊勢)나 이가(伊賀)를 거점으로 오래전부터 헤이시 이치몬을 보필한 케닌들이 중심이었다. 이에사다 일족도 이가의 토모다노쇼(鞆田荘)의 사타진(沙汰人)으로서 복무하고 있어 이가와 관계가 깊은 무사단이다. 그외의 지역의 출신자로서는, 비젠(備前)의 난바(難波) 일족, 빗츄(備中)의 세노오 카네야스(妹尾兼康) 등이 보인다.

 이치몬 대부분이 결속해있었다는 것, 인정기(院政期)부터의 거점인 이가, 이세를 기반으로 한 무력이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이른바 인정기 이래, 재경 활동(在京活動)을 지지 해 온 영지의 무력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 편성을 취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타이라노키요모리의 군사 편성은 인정기적인 군사 귀족의 모습을 계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요리토모군은 크게 다른 구성을 하고 있다. 일단 일족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일족들간의 대립이 상당히 심각했음을 이야기 해준다. 또, 통솔하고 있던 무사의 기반이 오우미(近江) 이동(移東)에 있어, 카와치 겐지(河内源氏) 본래의 기반인 카와치(河内) 등... 키나이(畿内) 출신 무사의 모습도 없다. 인정기의 재경 활동을 지탱한 영지가 타메요시(為義) 측에 조직되었거나, 그 지역의 지배자인 요시노리(義範)나 이시카와 겐지(石川源氏)가 참전하지 않았음을 이야기 해준다.  

 반대로, 이름이 보이는 건 토카이(東海), 토산도(東山道) 쪽의 여러 나라의 지방 무사들이다. 거기다, 오우미의 미나모토노시게사다(源重貞)를 시작으로, 오와리(尾張)의 아츠타 구우지(熱田宮司) 가문, 사가미(相模)의 야마노우치 스도(山内首藤) 일족이나 하타노(波多野) 씨를 제외하면, 5위 정도의 위계(位階)를 가져 쿄(京)와 관계를 갖고있던 무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즉, 쿄 주변의 영지를 기반으로 하는 성격을 탈피하여 토고쿠(東国)를 중심으로 하는 광범위한 지방 무사를 기반으로 한 군사 편성으로 전환해 있었음을 명시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곧 바로 사실이라 할 수는 없으며, 조정이 여러 나라로부터 무사를 동원했던 만큼, 요시토모가 독자적으로 동원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타이라노키요모리와 다른 요시토모의 독자성, 혹은 쿄 주변의 영지의 무력에 의존한 인정기적인 무사단 편성을 탈피한 새로운 형태를 취하는 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와 함께 고시라카와의 고쇼(御所)를 경호하고 있던 미나모토노요시야스는 카와치 겐지 이치몬의 유력 무사로, 부친인 요시쿠니(義国)는 시모츠케(下野)에 영지를 형성하는 한편, 쿄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요시쿠니는 요시이에(義家)의 셋째 아들에 해당하며, 요시토모의 부친인 타메요시의 숙부라는 관계에 있었다. 그 기반은 시모츠케노쿠니 아시카가노쇼(足利荘)... 즉,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쇼군(将軍) 가문인 아시카가(足利) 씨의 선조라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요시토모가 즈료(受領)를 맡아 시모츠케에 영지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둘의 아내가 타이켄몬인(待賢門院)과 고시라카와 텐노의 근신인 아츠타 구우지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나란히 고시라카와 텐노의 고쇼 경호로 기용되었던 것이다. 

 요시야스의 아내는 요시토모의 정실이자 요리토모(頼朝)의 모친에 해당하는 아츠타 구우지 스에노리(季範)의 딸의 동생이라고도 조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이후에 요시야스는 요시토모와 함께 제 1진으로 출격하게 되는데, 요시토모와의 제휴나 아츠타 구우지 가문을 매개로한 고시라카와와의 밀접한 관계가 기용의 배경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덧붙여, 요시야스의 아들인 요시카네(義兼)는 요리토뫄아는 모계쪽의 가까운 혈연관계에 해당한다. 이것이, 나중에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에서의 아시카가 가문이 커다란 정치적 지위를 쌓은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그들을 통해 토고쿠 무사들이 다수 상경해 있었는데, 그들은 유력 무사를 통해 제어되는 존재였다. 그들이 멋대로 상경하여 쿄의 치안을 악화시키는 일 따위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 했다. 첫째로, 영지 보전에 급급한 그들이, 손쉽게 상경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무력을 정비한 두 진영은, 개전(開戦)에 대비해 군의(軍議)에 들어갔다. 긴장 속에서 십여일이 지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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