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쉬운 한국사] [ #글림킴 ] 생생한 고조선 이야기 ② 주나라 ~ 진시황 전국통일 ( 사상과 행정, 춘추전국, 지도, 영토 ) 2021.07.11 AM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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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기획 / 제작 / 편집 : 문화 컨텐츠 크리에이터 - 글림킴 ( gleamkim )

안녕하세요 그림 작업과 애니메이팅, 컨텐츠 제작을 같이 하고 있는 "컨텐츠 크리에이터 글림킴 ( gleamkim )" 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지난 시간에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조금 더 이하기 쉽게 다양한 인물들을 추가하여 제작해 보았습니다.


지난시간에 받은 질문들중에 "중국의 행정체계(군현제)" 에 대한 질문과 "과연 고조선보다 전국시대 국가들이 행정 체계상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가?" 또는 "당시 중국의 지략과 전술은 어떤것이 있었는가?" , "당시 전국시대 총 인구의 합은 몇인가?" , "전국시대 7개 국가들이 과연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냐" 에대한 몇가지 질문들을 댓글을 통해서 받아보았는데요..

이 영상은 그런 질문들의 일종의 해답이자, 대충 넘겨왔던 내용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각종 지도와 캐릭터 작업을 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들여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 녹음은 금방 끝났는데, 제작이 1달 반, 거의 2달 정도 걸렸네유 ㅋㅋㅋ;; ) 또한 중국의 사상가들에 대한 이야기, 진시황은 어떻게 통일했는가 에 대한 이야기도 넣어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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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주나라가 정말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을까? 

 

A : 많은 사람들이 중국 기록을 근거로 중국은 상나라나 주나라시대 부터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으며, 춘추시대부터 중앙집권화를 하였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실제와 엄연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물론 기록상으론 상, 주시대 상당히 미화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점이 은근 많은데 상나라(은나라)는 봉건제 국가도 아니며 단순 씨족사회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다고 보기 매우 힘듭니다.

 

정전제(井田制)란 일단 행정 자체가 중앙집권화가 되어야 된다는 첫번째 전재가 있어야 하고, 두번째로는 왕이나 황제와 같은 임금이나 지배자가 지방 씨족이나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나 재산 사병들을 국가로 환수하고 이 토지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농사를 짓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한 댓가로 백성들은 세금으로 수확한 농사물과 군사징병및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강제노동으로 세금을 충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주나라는 봉건제 국가이며, 기록적으로도 개국공신과 친인척들에게 땅과 사람을 주어 독립적으로 관리하게 하는 것이 정치 수단이였기 때문에 좋게 말하면 봉건제지만 실질적으론 개별적인 존재, 독립적인 존재로 공국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정전제(井田制)가 시행될수 없었던 환경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즉, 주나라가 봉건제라고 포장되어있긴 하나 실질적으론 고조선과 행정체제에 대해서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원시 초기 국가단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고조선의 최대 권력자였던 조선왕(朝鮮王)은 단군왕검으로도 불렸는데, 단군왕검은 중국에 없는 독자적인 신화인 "천손강림신화" 를 강조하며 하늘의 직계 후손인 "천손(天孫)" 임을 내세우고 있으며 조선왕의 지휘아래 아래, 독자적으로 땅과 군대 백성들을 관리하는 역활까지 역임했던 비왕(裨王)과 박사(博士), 상(相), 이라는 직책이 존재했기 때문에 주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행정체제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씀드립니다.

 

한나라의 섭하가 고조선에 방문하였으나,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가게 되는 과정에서 한무제의 꾸짖음이 두려워, 섭하를 마중하던 비왕(裨王)을 죽이고 한나라로 달아나게 되는데, 이 소식을 한무제가 알게 되자 크게 기뻐하며 섭하를 요동도위부로 앉히게 된다. 요동지역은 대대로 철광과 석탄의 산지이자 산동반도와 인접한 땅으로 동북아에서 중요한 전략 요충지 였는데, 이 땅을 섭하에게 준 점을 볼때 살해당한 비왕(裨王)이라는 직책의 남성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역사학자 임용한 학자님의 저서 한국 고대전쟁사의 서적을 살펴보면 비왕(裨王)을 고조선왕의 휘하아래 특정 지역을 다시리던 소국의 왕(王)정도로 추정하고 계시며, 흉노의 역사서에서의 비왕(裨王) 역시 특정 지역을 다시리는 부족장을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섭하가 주요 거점인 요동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는 특정 지역만 중앙집권을 실시하고 나머지 요서나 요동, 산동지역처럼 외각지역의 땅들은 소국의 왕(王)들에게 직접 지배하도록 하는 봉건제와 군현제의 혼합인 군국제를 시행하며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습니다. 요서지역은 고조선이 개국한 터전이자( 십이대영자 유적 ), 연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700년간 통치를 하던 지역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조선 중기무렵에 투항했던 위만(衛滿)이라는 인물이 연나라계로 보는 설, 또는 요서지역에 살던 고조선 계로 보는 설 이 두가지가 공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위만(衛滿)이 고조선 준왕에게 투항했었을 시기 "요서지역 사람" 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위만이 대려온 백성과 병력 그리고 그의 남다른 정치능력을 높게 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하사하게 되고, 위만은 고조선의 국경, 변경지역에서 군대를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된 점을 볼때, 박사(博士) 라는 직책 역시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땅과 군단을 이끄는 거대 세력이였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 전국시대 각국은 과연 체계화된 군현제를 실시 하였는가?  

 

 

A : 많은 사람들이 중국 기록을 근거로 중국은 상나라나 주나라시대 부터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으며, 춘추시대부터 중앙집권화를 하였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실제와 엄연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물론 기록상으론 상, 주시대 상당히 미화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점이 은근 많은데 상나라(은나라)는 봉건제 국가도 아니며 단순 씨족사회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다고 보기 매우 힘듭니다.

 

정전제(井田制)란 일단 행정 자체가 중앙집권화가 되어야 된다는 첫번째 전재가 있어야 하고, 두번째로는 왕이나 황제와 같은 임금이나 지배자가 지방 씨족이나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나 재산 사병들을 국가로 환수하고 이 토지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농사를 짓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한 댓가로 백성들은 세금으로 수확한 농사물과 군사징병및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강제노동으로 세금을 충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주나라는 봉건제 국가이며, 기록적으로도 개국공신과 친인척들에게 땅과 사람을 주어 독립적으로 관리하게 하는 것이 정치 수단이였기 때문에 좋게 말하면 봉건제지만 실질적으론 개별적인 존재, 독립적인 존재로 공국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정전제(井田制)가 시행될수 없었던 환경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즉, 주나라가 봉건제라고 포장되어있긴 하나 실질적으론 고조선과 행정체제에 대해서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원시 초기 국가단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고조선의 최대 권력자였던 조선왕(朝鮮王)은 단군왕검으로도 불렸는데, 단군왕검은 중국에 없는 독자적인 신화인 "천손강림신화" 를 강조하며 하늘의 직계 후손인 "천손(天孫)" 임을 내세우고 있으며 조선왕의 지휘아래 아래, 독자적으로 땅과 군대 백성들을 관리하는 역활까지 역임했던 비왕(裨王)과 박사(博士), 상(相), 이라는 직책이 존재했기 때문에 주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행정체제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씀드립니다.

 

한나라의 섭하가 고조선에 방문하였으나,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가게 되는 과정에서 한무제의 꾸짖음이 두려워, 섭하를 마중하던 비왕(裨王)을 죽이고 한나라로 달아나게 되는데, 이 소식을 한무제가 알게 되자 크게 기뻐하며 섭하를 요동도위부로 앉히게 된다. 요동지역은 대대로 철광과 석탄의 산지이자 산동반도와 인접한 땅으로 동북아에서 중요한 전략 요충지 였는데, 이 땅을 섭하에게 준 점을 볼때 살해당한 비왕(裨王)이라는 직책의 남성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역사학자 임용한 학자님의 저서 한국 고대전쟁사의 서적을 살펴보면 비왕(裨王)을 고조선왕의 휘하아래 특정 지역을 다시리던 소국의 왕(王)정도로 추정하고 계시며, 흉노의 역사서에서의 비왕(裨王) 역시 특정 지역을 다시리는 부족장을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섭하가 주요 거점인 요동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는 특정 지역만 중앙집권을 실시하고 나머지 요서나 요동, 산동지역처럼 외각지역의 땅들은 소국의 왕(王)들에게 직접 지배하도록 하는 봉건제와 군현제의 혼합인 군국제를 시행하며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습니다. 요서지역은 고조선이 개국한 터전이자( 십이대영자 유적 ), 연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700년간 통치를 하던 지역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조선 중기무렵에 투항했던 위만(衛滿)이라는 인물이 연나라계로 보는 설, 또는 요서지역에 살던 고조선 계로 보는 설 이 두가지가 공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위만(衛滿)이 고조선 준왕에게 투항했었을 시기 "요서지역 사람" 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위만이 대려온 백성과 병력 그리고 그의 남다른 정치능력을 높게 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하사하게 되고, 위만은 고조선의 국경, 변경지역에서 군대를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된 점을 볼때, 박사(博士) 라는 직책 역시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땅과 군단을 이끄는 거대 세력이였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전국시대 각국은 수십만의 병력 동원이 가능했나? 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A : 항상 받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우선 고대부터 현대까지 불변진리가 있다면 전체인구대비 상비군을 1% 에서 4% 이내로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역시도 현역군이 53만 정도인데, 한국의 전체 인구가 약 5000만과 비교 해보면 1.02% 수준에 못 미치는 수준이고 왠만해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최후의 전쟁이 아니고서야 전체 인구의 4%를 넘기지 않았기 때문에, 장평대전이라든가 진나라와 초나라간의 전쟁에서 등장하는 40만 - 60만의 병력들은 굉장히 많이 과장된 부분중 하나라고 추정이 됩니다.

물론 제 영상에서 진짜 후하게 쳐서 전국시대 중원 전체의 인구를 2500만 언저리로 설명을 많이 했으나, 2500만 역시도 굉장히 많이 부풀린 수로;; 실질적으론 전국시대 중원 전체의 인구를 2000만으로 보는 설이 정설이긴 합니다. ( 왕육민의 중국인구사에선 전국시대 ~ 진시황의 진나라의 인구를 2000만으로 주장을 하며, 고대 문헌에서도 진나라의 인구를 400만호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진서지리지에선 약 1610만 정도로 기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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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적으로 자주 달리던 댓글 3개만 간추려 제 의견을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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