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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 헤이지의 난 #09 (0) 2018/09/18 PM 09:27

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三. 무사의 세상, 전야(前夜)

 

◇ 타메요시(為義)와 요시토모(義朝)

~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는 무사(武士)들의 가문에서도 골육상쟁이 펼쳐졌다. 당시, 최대의 무문(武門)이 되어 있던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에서는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 이하 이치몬(一門)의 태반이 고시라카와(後白河) 측에 섰던 데에 반해, 키요모리의 숙부인 타다마사(忠正) 일족이 스토쿠(崇徳), 요리나가(頼長) 편에 섰다.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분열은 훨씬 더 심각했다. 장남인 요시토모(義朝)가 고시라카와 측에 가담했던 데에 반해, 부친인 타메요시(為義)와 동생인 요리카타(頼賢), 타메토모(為朝)들은 스토쿠, 요리나가 측에 투신했다. 카와치 겐지는 부자, 형제의 분열이라는 상당히 비참한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겐지의「동족상잔(共食い)」은 역사상 유명한 사실이지만, 그중에서도 최대의 비극이라고도 해야 할 호겐의 난에서의 분열은, 어째서 발생한걸까?

 타메요시는 미나모토노요시치카(源義親)의 자식이다. 요시치카라 하면, 난행 끝에 오키(隠岐)로 유배당했고, 부친인 요시이에(義家)가 죽은 뒤인 카쇼(嘉承) 2년(1107)에 맞은편 해안에 있는 이즈모(出雲)로 건너가 관아(国衙)를 습격, 모쿠다이(目代)를 살해 한 끝에 익년 정월에 이나바노카미(因幡守)인 타이라노마사모리(平正盛)에 의해 토벌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사 제일인자의 지위는 카와치 겐지에서 이세 헤이시로 옮겨가게 된다. 

 이것을 두고 시라카와인(白河院)에 의한 카와치 겐지의 압박이라 볼 수는 없다. 요시이에는 시라카와의 측근 자리인 인텐죠비토(院展上人)였고, 코와(康和) 3년(1101)에 요시치카가 난동을 피웠을 때, 추토 해야 한다는 귀족들의 의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이에의 심복인 후지와라노스케미치(藤原資通)가 요시치카를 설득하기 위해 내려간 것은, 시라카와가 돈을 보내기 위한 구실이나 다름 없었다. 무엇보다 스케미치는 요시치카와 함께 관사(官使)를 살해하여 사건을 확대시켜버렸지만... 

 요시치카가 죽은 뒤, 후계자가 된 동생 요시타다(義忠) 암살이 있었을 때에, 혐의를 뒤집어 쓴 요시이에의 동생 요시츠나(義綱) 일족의 추토에 젊은 타메요시가 기용된 것도, 겐지의 내분을 부추긴 게 아니라, 새로운 당주에게 무훈(武勲)을 얻을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후에도 시라카와인은 동생인 스케히토 친왕(輔仁親王)과의 대립 도중에 손자인 어린 토바 텐노(鳥羽天皇)의 신변 경호인 케비이시(検非違使)로서 타메요시를 기용하였고, 그에게 근신인 후지와라노타다키요(藤原忠清)의 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주선해주었다. 그리고 호안(保安) 4년(1123), 타메요시 부부 사이에서 장남인 요시토모가 태어났다. 

 하지만, 타메요시 자신의 난폭한 행동이나, 그의 통제를 벗어난 케닌(家人)의 무법 행위 등이 점차 잦아졌기 때문에, 타메요시는 시라카와인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관위(官位)는 바닥을 치게 된다. 불운은 토바인의 인정기(院政期)에 들어선 뒤에도 이어졌다. 기이하게도 동갑인 타이라노키요모리가 즈료(受領)로서 활약하면서 승전(昇殿)의 영예를 얻고있던 텐쇼(天承) 2년(1132) 무렵, 타메요시는 그저 케비이시인 채로 종 5위하로 서임 되어 귀족으로서의 서작(叙爵) 조차도 허락받지 못 하는 굴욕을 맛보고 있었다. 

 그런 타메요시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게 시라카와인에 의해 칸파쿠직(関白職)을 박탈 당하고 오랫동안 칩거해온 셋칸케(摂関家)의 오오토노(大殿)인 후지와라노타다자네(藤原忠実)나 다름 없었다. 호엔(保延) 2년(1136), 타메요시는 오우미(近江)로 내려가 타다자네의 토네리(舎人)인 미나모토노유키자네(源行実)들을 케닌으로서 조직하려 했기 때문에, 양자가 손을 잡은 것은 이 무렵이었으리라. 코지(康治) 2년(1143) 6월에는 타다자네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요리나가에게 타메요시는 명부를 바쳐 신하로서의 예를 취했다. 타메요시의 일족은 이후에 타다자네 & 요리나가라는 셋칸케 주류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던 중에, 홀로 쿄(京)를 떠나있던 자가 있었다. 장남인 요시토모이다. 그는 반도(坂東)로 내려가서 카와치 겐지와 토고쿠(東国)의 무사 사이의 주종관계를 재편한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이해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코쿠시(国司)로서 내려간 게 아니었던 요시토모는, 당시「아자나카즈사조시(字上総曹司)」라 칭해진대로, 관직을 가진 게 아니었다. 여기에 반해 재경하고 있던 동생 요시카타는 토구우타테와키센죠(東宮帯刀先生)... 즉, 황태자인 나리히토 친왕(体仁親王: 훗날의 코노에 텐노)의 경호대장이라는 영예직에 올라 있었다. 

 이는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 일어나기 직전, 동생이면서도 적자인 요리토모(頼朝)가 쿄에서 조정에 임관했던 데에 반해, 형인 요시히라(義平)가 특별한 관직도 없는 채로 사가미(相模)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과 공통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또, 요시이에(義家)의 동생인 요시미츠(義光)나 요시치카(義親)의 동생인 요시쿠니(義国) 등... 카와치 겐지의 방류(傍流)가 토고쿠로 내려가 독자적인 거점을 형성한 예도 있다. 역시나, 요시토모는 폐적당하여 반도로 쫓겨난 것이라 볼 수 밖에 없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타메요시가 타다자네를 모셨을 때에, 타다자네를 칩거로 내몬 시라카와인의 근신의 딸을 모친으로 둔 요시토모가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카와치 겐지에서의 부자, 형제의 분열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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