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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32 (0) 2018/10/12 PM 11:49

제 03장 -격투 끝에

 

 

二. 패배자의 운명

 

◇ 사형(死刑)의 부활

~ 죄명선하(罪名宣下) 다음 날인 28일.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는 숙부인 타다마사(忠正)와 그의 자식인 나가모리(長盛), 타다츠나(忠綱), 마사츠나(正綱), 그리고 타다마사의 낭도인 미치유키(道行)를 로쿠하라(六波羅) 근교에서 참수했다.『兵範記(효한키)』는 타다마사(忠正)의 이름을「忠貞(타다사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오오이미카도류(大炊御門流) 출신의 곤노츄나곤(権中納言) 후지와라노타다마사(藤原忠雅)와 동음(同音)인 이름이라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2일 뒤인 30일에는, 타이라노마사히로(平正弘)의 일족이 쿠로도노호간(蔵人判官) 미나모토노요시야스(源義康)에 의해 오오에야마(大江山) 부근에서 처형당했다. 마사히로의 자식인 이에히로(家弘), 야스히로(康弘), 모리히로(盛弘), 토키히로(時弘), 이에히로의 자식인 미츠히로(光弘), 야스히로(安弘), 요리히로(頼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같은 날, 후나오카야마(船岡山) 부근에서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와 자식인 요리카타(頼賢), 요리나카(頼仲), 타메나리(為成), 타메무네(為宗), 그리고 쿠로(九郎)... 즉, 타메나카(為仲)가 요시토모(義朝)의 손으로 처형되었다. 타메요시에 대해서는, 본인이 맞는지 확인을 위해 케비이시(検非違使) 미나모토노스에자네(源季実)가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의 명령으로 실검(実検)에 파견되었다.『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요시토모가「ヲヤノクビ切ツ(부모의 목을 쳤다)」라는 비방을 받은 것 이외에, 사죄(死罪)의 실행에 대해「カタブク人(의문을 던진 사람)」도 있었다 한다. 조정의 명에 의해 죄인이 공적으로 살해를 당한 선례는, 다이도(大同) 5년(810) 9월, 헤이제이 죠코(平城上皇)와 후지와라 시키케(藤原式家) 출신인 나카나리(仲成), 쿠스코(薬子)가 제휴하여 병란을 일으킨 헤이제이 죠코의 난(쿠스코의 변)이 있었을 때로, 헤이안쿄(平安京)에 있던 나카나리가 살해당한 예가 있다. 무엇보다, 이는 구금된 나카나리를 사살한 것으로, 사형이라기 보다 암살에 가까웠다. 

 확실히 쿄(京)에서야 공격인 사형은 치러지지 않았지만, 치외법권(治外法権)이라고도 해야 할 무사들의 영지에서는 낭도들에 대한 사형이 일상적으로 치러지고 있었다. 또, 고산넨 전투(後三年合戦) 종료 후의 키요하라 타케히라(清原武衡), 이에히라(家衡) 일족이나 그 메노토(乳母)인 타이라노치토(平千任)처럼, 무사들끼리의 사적인 전투가 있을 때에, 패배자나 그 일족이 살해당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살해에는, 증오하는 상대에 대한 보복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동시에 자력구제(自力救済)를 단행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수단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항복을 한다거나 생포당하거나 한 적이 살해당한 예는, 사적 전투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조정의 명으로 치러진 추토(追討)에서도, 범인은 처형되었다. 후지와라노스미토모(藤原純友)와 그의 자식, 젠쿠넨 전투(前九年合戦) 이후의 아베 사다토(安倍貞任), 칸지(寛治) 8년(1094)에 미나모토노요시츠나(源義綱)의 낭도에게 토벌당한 데와(出羽)의 호족 타이라노모로타에(平師妙), 텐닌(天仁) 원년(1108)에 타이라노마사모리(平正盛)에게 토벌당한 미나모토노요시치카(源義親) 등... 살해당해서 목을 쿄에서 효수 당한 자는 셀 수 없었다. 위험한 모반인의 처형은 당연한 일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호겐의 난(保元の乱)의 경우도 무사들의 관습에 따라 적대자의 처형이 치러졌고, 전투의 무대가 쿄였기 때문에 형장도 그 주변이었다는 뜻이 된다.

 요시토모의 입장에서 보자면, 친형제에 대한 처형은 자신의 살을 잘라내는 듯 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특히 부친의 권위가 얼마나 컸는지를 생각하면,『구칸쇼』가 기록한 것 같은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도 피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부친이나 동생들은 근본적으로 진영을 달리 하고 있었기에, 적류(嫡流)의 지위나 토고쿠(東国)에서의 무력의 기반늘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해온 관계에 있었다. 요시토모에게는 타메요시 일족을 매장시켜버리는 것으로 인해 오랜 기간에 걸쳐 벌어진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내분을 극복하고, 적류의 지위를 확립한다는 커다란 이점도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서는, 타메요시와 자식들은 별개로 처형당했다고 나오는데,『효한키』의 기술을 보면 동시에 치러졌으리라 생각된다. 또,『호겐모노가타리』는, 조정의 명령을 받은 요시토모가, 열세 살인 오토와카(乙若) 이하, 아직 성인식을 치르기 전인 어린 동생들 네 명을 처형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소년들에 대한 처형은『효한키』에서는 보이지 않아 사실인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만약 사실이라 친다면, 장래의 있을 반항 등을 고려해, 요시토모가 독자적으로 행했던 게 아니었을까?

 한편, 타메요시의 자식들 중에 분전하다 도주한 뒤, 포로가 된 타메토모(為朝)는 사형을 면한다.『호겐모노가타리』에 따르면, 그의 강궁(強弓)을 아까워했기 때문에 감형을 받게 되었고, 이즈(伊豆) 오오시마(大島)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땅에서도 갖가지 난행을 저지른 뜻에, 결국 토벌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하치죠지마(八丈島)로 달아났고, 나아가서는 류큐(琉球)로 진출했다고 하는 장대한 전설을 탄생시켰는데, 물론 사실(史実)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우며, 그의 그후는 전승으로 뒤덮혀있다. 

 타메토모 이외에도 살아남은 타메요시의 자식들이 있었다 셋째 아들인 요시노리(義範 = 義憲)는, 이로부터 2년 뒤인 호겐 3년(1158) 9월에 카와치노쿠니(河内国) 나가노(長野)에서 코야 산(高野山) 참배를 끝낸『三槐記(산카이키)』의 기주(記主) 후지와라 타다치카(藤原忠親: 나카야마 타다치카)에게 병사자(兵仕者)를 제공하였다. 어쩌면 호겐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요시토모 측이거나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카와치에 있는 영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되낟. 그는 나중에 히타치노쿠니(常陸国)에 있는 하치죠인령(八条院領) 시다노쇼(志太荘)로 내려가, 쥬에이(寿永) 2년(1183) 2월에는 대규모적인 거병을 행해, 요리토모(頼朝)를 위협하게 된다. 또, 타메요시의 막내아들인 훗날의 유키이에(行家)는 너무 어려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모친 곁으로 보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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