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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34 (0) 2017/03/26 PM 02:27

제 3 장 전설의 검호(剣豪)를 베다 -야규 쥬베에(柳生十兵衛)의 진실

 

 

◎ 12년간의 공백에 대한 고백

~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에게 꾸지람을 듣고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야규 쥬베에(柳生十兵衛)가 사면받아 재출사하게 된 것은 칸에이(寛永) 15년(1638), 정확하게는 그해 9월 17일의 일이다(『寛政重修諸家譜』). 

 딱 12년동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흥미로운 사료가 있다. 이에미츠가 무네노리(宗矩) 앞으로 써 준 서장이다. 날짜는 3월 20일로 되어 있으며, 연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수취인명이「柳生又右衛門(야규 마타에몬)」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칸에이 4년이나 5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무네노리가 칸에이 6년 3월에「타지마노카미(但馬守)」에 서임되었다는 것, 또,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서장은 간단명료한데, 자신에게 신카게류 병법(新陰流兵法)을「남김 없이 전해준(のこさず相伝)」것은 만족하고 있으며, 계속해서「부탁한다(頼入候)」고 말한 뒤,


「시치로(七郎: 쥬베에를 가르킨다)는 짐에게, 언제까지고 소식을 끊어서는 안 되느니라」 


 라고 쓰고있다. 

 이에미츠의 화는 쥬베에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반년 혹은 1년 반이 지났을 무렵에는 이미 풀려있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두살이 될 때까지인 12년 동안, 재출사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봉공(奉公)에 적성이 맞지 않는 쥬베에를 다시 불러들이는 데에 더욱 더 신중했던 무네노리의 의지를 억측해 볼 수 있다. 

 어찌됐든, 수수께끼 투성이인 12년간이다. 그야말로「온미츠(隠密) 쥬베에」를 만들어내기에 적합한 소재라 여겨지겠지만, 우선은 쥬베에 자신의 고백에 귀를 기울이는 게 사가(史家)나 연구자의 양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쥬베에는 재출사하기 1년 전(칸에이 14년), 에도를 나와서 5월 1일부터 시작되는 야규 가문의 여름 연습에 참가했다. 동년 10월 25일은「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이 발발한 날인데, 당시에 그가 다시 에도에서 머물렀다는 것은, 익 11월, 다년간에 걸친 병법 연구의 성과를 논문으로 정리해 무네노리에게 제출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옛날 비위(飛衛)라는 자가 있었는데...

 로 시작되는 제목 없는 이 논문은, 나카지마 아츠시(中島敦)의 명저『名人伝(메이진덴)』의 소재라 여겨지는... 중국(中国)의 전국시대(戦国時代)의 활의 명인 비위(조나라 수도인 한단 사람)에게 사사받은 기창(紀昌)의 일화를 인용한 것인데, 무네노리는 한 번 읽어보고는「이딴건 태워버려라」며 쥬베에에게 명령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그 무렵 에도 아자부(麻布) 히가쿠보(日ヶ窪)에 있던 야규 가문의 별저(別邸)에 임시로 머물고 있던 타쿠안(沢庵)의 가필과 수정에 의해서였다. 덧붙이자면, 전술했던대로 타쿠안이 쥬베에에게 음주를 자제하라는 내용을 편지로 충고한 것은 이 때의 일이다. 

 통칭『飛衛(히에이)』라 일컬어지는 병법 논문 안에서, 다음과 같이 쥬베에는 고백하고 있다.


【나는 사연이 있어 이에미츠 공 곁에서 물러났고, 선조님들의 나라인 야규에 틀어박혀 살았다. 그리고, 주군 곁을 떠나있으면서도, 자기 멋대로 세상을 돌아다닌 것은 예의에 어긋나며, 하늘의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기에, 12년 동안 고향을 떠날 수 없었다(원문은 愚夫故ありて東公を退て、素性の国に引籠りぬれば、君の左右をはなれたてまつりて、世を心のままに逍遥すべきは、礼儀もかけ天道もいかかと存ずれば、めぐるとし十二年は故郷を出ず)】


 이렇게 말한 다음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2년간은 가예(家芸)인 병법을 날이면 날마다 연구했다는 것. 그러던 중에 이「히에이」라는 논문에서 말한 이론을 가신들과 실제로 시도해 보며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병법의 술(術)과 리(理)는 늘어났지만, 일제로 이것을 사용할 때는 한가지로 사용해야 한다는 중요함에 봉착했다... 며.

 요는, 사직하고 난 뒤부터 오랜 세월은, 야규 마을에서 신카게류 병법 연구에 매진했다며 쥬베에는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고백을 창작자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듯 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쥬베에의 온미츠 행동이 허구 세계에서 집요할 정도로 묘사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 12년간의 공백의 시간은 쥬베에의 진짜 인생의 미싱 링크(missing link)로서, 여전히 멋대로 상상해 가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수수께끼의 12년」동안, 세상은 격변하고 있었다.

 쥬베에가 관직에서 물러나고 6년 뒤에는, 오오고쇼(大御所) 히데타다(秀忠)가 세상을 떠났고, 이에미츠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동년(칸에이 9년)에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의 카토(加藤) 씨가 개역(改易)되면서 큐슈(九州)의 정치 구도가 뒤바뀌었다. 익년(칸에이 10년) 연말에는 이에미츠의 동생인 타다나가(忠長)가 자결했다. 익년(칸에이 11년)은 이에미츠의 브레인인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忠綱), 아베 타다아키(阿部忠秋), 홋타 마사모리(堀田正盛)가 로츄(老中)의 반열에 들어서면서 정권의 중추가 확립하였으며, 그 정치 체제를 통해 익년(칸에이 12년)에「부케쇼핫토(武家諸法度)」가 반포되어 법률에 의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그리고 칸에이 14년 10월에「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익 15년 2월말에 종식된다. 쥬베에의 재출사는 그로부터 반여년 뒤의 일이었다. 

 그동안 에도 야규 가문에서 일어난 중대사는, 부친인 무네노리가 칸에이 9년에 3천석을 가증받아 총 6천석을 영유하게 되었으며, 소메츠케(惣目付) 배령과 동시에 관료로서 중책을 맡기에 이르렀다는 것. 그리고, 칸에이 13년에 쥬베에가 에도를 나와 여름 연습에 참가한지 얼마되지 않은 8월, 4천석의 가증을 받아 다이묘 반열에 서게 된다(동시에 소메츠케직을 물러나게 된다). 

 3천석을 영유한 하타모토 가문의 장남인 쥬베에는, 그로부터 2년 뒤의 9월, 다이묘 가문의 장남으로서 바쿠후)의 무관(武官)의 요직인 쇼인반(書院番)에 오르게 된다.

 동생들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배다른 동생인 둘째 토모노리(友矩)는 쥬베에가 사퇴한 다음해(칸에이 4년)에 열다섯살의 나이로 이에미츠의 코쇼(小姓)로 출사한다. 


【性質無双、文才に富、又、新陰の術に長じ玉ふ(성격이 비할 바 없이 좋고 문재도 풍부하였으며, 또, 신카게류 병법에도 뛰어났다)】(『玉栄拾遺』)


 문무 양도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고 일컬어지는 토모노리는, 용모가 단정해서 이에미츠에게 총애를 받았다. 스물두살 때인 칸에이 11년 6월에 상경할 때에 부친인 무네노리와 함께 봉공하였으며, 쿄토(京都)에서 카치가시라(徒士頭)로 임명되었다. 이른바 근위병(近衛兵)의 수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토모노리가 이에미츠로부터 얼마나 총애받았는지는, 직후에 종 5위하 교부쇼유(刑部少輔)에 서임된 데다, 야마시로(山城) 소라쿠 군(相楽郡: 쿄토 부 미나미야마시로 무라)에 2천석이 주어진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토모노리는 쥬베에가 부재 중인 에도 야규 가문에게 있어서, 일가의 미래를 짊어져야할 존재였던 것이다. 봉공이 서툴렀던 쥬베에를 대신해 출세가도를 달리던 토모노리를 얻은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지만, 그것은 무네노리가 기대했던대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토모노리는 병약했던 탓에, 스스로 부탁하여 야규로 떠났다. 그 연월은『寛政重修諸家譜(칸세이쵸슈쇼카후)』에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쥬베에의 재출사는 이 일과 크게 관련되어 있었으리라 사료된다. 큰형이 재출사한 다음해인 칸에이 16년(1639), 스물일곱살의 젊은 나이로 이 수재는 세상을 떠났다. 

 셋째인 무네후유(宗冬)는 칸에이 5년(1628)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쥬베에가 사직한지 2년째에 토모노리와 마찬가지로 이에미츠의 코쇼로서 출사했다. 그가 열네살 때의 일이다. 무네후유에 대해서는 제 5장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에도 야규 가문이 이렇게 발전해 가던 중에, 이에미츠의 곁을 떠나있던 쥬베에는『히에이』에서의 고백에 따르면, 부지런히 병법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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