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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01 (0) 2017/06/23 PM 06:58

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열한살에 동대생 이상의 학력을 갖추고 있었다

~ 어쩌면, 일본인은 전세계에서 학문을 가장 좋아하는 민족일지도 모르겠다. 현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도시대(江戸時代)까지는 확실히 그러했다.

 먼저, 일본의 식자율(識字率: 종이나 판자 등에 인쇄 혹은 쓰여져 있는 문장을 읽는 인간의 비율)은 세계 제일이었다.

 시대극에서 팻말이 내걸리고, 그 앞에 모여든 사람이「누구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나?」라는 식으로 떠드는 장면이 순 거짓이다.

 식자율을 통해 말해보자면,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 절반 이상은 팻말의 내용을 읽을 수 없으면 그게 이상하다.

 막말(幕末)이 되어, 여러 외국의 배가 일본 근해에 출몰하는 상황이 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감돌았기 때문인지, 여러 지방에 시쥬쿠(私塾)나 다이묘(大名) 가문이 자금을 투자한 가쿠몬죠(学問所)가 생겼다. 후자는 이른바 번립(藩立) 학교인데,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는「가쿠몬죠」쪽이 일반적인 호칭이었다. 

 토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가 세운 쇼헤이자카 가쿠몬죠(昌平坂学問所: 토쿄 제국 대학의 전신)를 별격(別格)으로 치면, 쵸슈(長州) 모리(毛利) 가문의 메이린칸(明倫館), 미토 토쿠가와(水戸徳川) 가문의 코도칸(弘道館), 오카야마(岡山) 이케다(池田) 가문의 시즈가타니코(閑谷黌) 등... 모두 단순한 가쿠몬쇼가 아니라, 막대한 자료를 수집한 도서관의 기능도 겸비하고 있었다.

 나중에 쇼카손쥬쿠(松下村塾)의 쥬쿠토(塾頭)를 맡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불과 아홉살에 메이린칸의 병학 교수 견습으로 발탁되는 영재다움을 발휘한다. 그리고 열한살, 현재의 학교제도로 치자면 초등학교 4학년 때에 모리 가문의 제 25대 당주였던 모리 타카치카(毛利敬親) 앞에서『武教全書(부쿄젠쇼)』전법편(戦法篇)을 강의했다.

 현대인의 감각으로 치자면 경이롭겠지만, 당시의 인물의 학력을 무시해선 안 되는 것으로, 문호(文豪)로서 유명한 타니자키 쥰이치로(谷崎潤一郎: 1886~1965)에 관한 일화가 있다.

 타니자키는 손녀가 대학 국문과에 진학했을 때에, 아무렇지 않게 교과서를 보며「내가 다섯살 어린 나이에 독학으로 읽은 것을 이제는 대학에서 교과서로 쓰고있는게냐? 말세다, 말세야」라며 한탄했다 한다.

 즉, 그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영재 교육이 지적 레벨이 높은 자에게 행해지고 있었다.

 요시다 쇼인의 친가는 코쿠다카(石高)가 불과 26석이라는... 최하급 무사였기 때문에, 그런 봉록(俸禄)으로는 도저히 끼니조차 재때 해결하지 못해, 백성겸업(百姓兼業)이라고 할까... 오히려 농업 쪽이 메인인 듯한 가정이었다. 

 당연하게도, 쇼인은 어린시절부터 농작업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부친이나 형과 함께 밭일을 하는 한편,「사서오경(四書五経)」을 필두로 수많은 난해한 서적을 부친이 음독하고 형제가 복창, 그후에 내용에 대한 강의를 받는다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모리 타카치카 앞에 나섰을 때에는, 어쩌면 쇼인은 현대의 동대생 이상의 학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어린 나이에 메이린칸 교수 견습으로 기용되었던 것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메이린칸의 교수견습이 된 뒤에, 아편 전쟁(阿片戦争)으로 청나라가 영국에 참패한 사실을 알게 된 쇼인은, 더욱 더 학문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하기(萩: 메이린칸은 하기 성 아래에 있었다)를 떠나 전국을 돌며 유학, 외국 선박으로 밀항을 꾀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당하는 등... 과격행동에 빠져 있었다.

 한때는 숙부인 타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열었던 시쥬쿠인 쇼카손쥬쿠에서 쥬쿠토를 맡아, 신분 출신을 막론하고 어떤 신분을 가진자라도 학문을 가르쳤는데, 그 과격한 사상이 안세이타이고쿠(安政大獄)로 타이로(大老)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의 역린(逆麟)을 건드려, 에도로 호송되어 참수형에 처해진다.

 향년 서른(만나이로는 스물아홉)이라는... 천재치고는 너무나도 아까운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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