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림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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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한국사] [ #글림킴 ] 1. 사람들이 고구려를 좋아하는 이유? ( #고구려영토 #고구려지도 #고구려천하관 #전쟁 ) (0) 2023/05/03 PM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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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고구려를 좋아하는 이유?


https://posty.pe/bo2jyd






#글림킴 #gleamkim #고구려영토 #고구려영향권 #고구려천하관 

#고구려 #고구려지도 #goguryeo #한국사 #한국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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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한국사] [ #글림킴 ] 생생한 동북아시아 역사 ③ BC 222 ~ BC 209 ( 동북아, 고조선, 진시황, 진나라, 진승과 오광의 난 ) (0) 2021/08/09 PM 09:57



ⓒ 이 컨텐츠의 저작권은 제작자 글림킴 ( gleamkim ) 에게 있으며, 무단 다운로드및 재편집을 금지 합니다.
ⓒ 영상 기획 / 제작 / 편집 : 문화 컨텐츠 크리에이터 - 글림킴 ( gleamkim )

안녕하세요 그림 작업과 애니메이팅, 컨텐츠 제작을 같이 하고 있는 "컨텐츠 크리에이터 글림킴 ( gleamkim )"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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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고조선(古朝鮮)과 비교하여 중국의 주나라(周)부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까지 있었던 사상가들(思想家)의 이야기와

행정체계(行政體系), 고대 무기들(古代武器)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오늘은 지난 이야기에 이어서 진시황(秦始皇) 의 전국통일(全國統一)

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진시황은 조나라(趙國)와 연나라(燕國)를 멸망시킨뒤 목표를 바꿔서 초나라(楚)에 대한 맹공세를 시작

하게 되는데..

진나라의 영웅 왕전(王翦)과 이신(李信), 몽염(蒙恬) 장군과 항우(項羽)의 할아버지, 명장 항연(項燕)간의 2차 전쟁을 통해 초나라가 멸망하는 과정

과, 진시황(秦始皇)은 전국통일(全國統一)후, 어떤 행정 체제로 전국을 통치하였을까? 에 대한 이야기와 몰락과정에 대한 이야기등을 상세하게 핵심

만 뽑아 제작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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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통일된 진나라의 인구는 2000만 ( 400만 호 이다. )

 


A : 통일된 진나라의 인구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팩트입니다. 그나마 기록을 통해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중국의 고 문헌 

을 포함하여 《 왕육민의 중국인구사(강소인민출판사 간행, 1995 )》 와 《 한국인을 위한 중국 인구사 (한국 간행물윤리위원회 추천도서 ) 》 에서
는 진시황의 통일 진나라의 인구를 약 2000만 언저리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여산릉(驪山陵 =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비롯한 아방궁(阿房宫),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는데 연인원 10% - 14% 이상, 약 300만명
이상의 인구가 착취되었고 이도 부족하여, 죄수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였으니 실상 진나라의 인구 2000만 명 전체가 막대한 강제노역과 세금에 착취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진나라는 노동을 하지 않는 자에겐 세금을 배로 물렸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호화스러운 진나라 황제에 의해 휘청거렸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Q : 왕전(王翦)의 60만 대군은 사실일까?

 


A : 이때문에 왕전(王翦)의 60만 병력이 사실인가? 물론, 저 역시 전국시대 말에 동원되었던 수십만의 병력은 다소 과장이 있다고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설은 진시황이 전국통일하던 시대의 중원 전체 인구를 약 2000만 ( 400만 호 ) 언저리로 이미 왕전(王翦)이 출정하기 전

이미 이신(李信)의 정예병 ( 기록상으론 20만이라고 하나, 당시 인구와 수차례 전쟁을 한 정황상 정상적인 병력으로는 수십만을 절대 동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보니, 수십만의 병력은 아마 수만 정도의 병력이거나, 과대로 포장된 정예병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이 항연에게 격파당한 사건이 진시황

이 보기에도 매우 큰 사건이였기 때문에 이후에 왕전에게 사정 사정하여 출정시킨 것이 때문에 정상적인 병력이었다기보단 백성들이 다수 참여된

머릿수만 채운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 증거로, 함곡관(函谷关)에 다다르자 나서서 싸우기 보단, 요새를 쌓고 항연군에 맞써 방어전만 치루며, 음식과 술을 배풀며 안정화를 시키고

투석전과 멀리뛰기와 같은 군사적인 훈련을 시키며 시간을 벌었던 이유와, 항연이 요새가 뚫리지 않자 반대로 유인계를 택하여 이끄는 전략으로

변화를 준 것을 고려해 볼 때, 왕전의 부대는 급조된 병력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됩니다.



Q: 진시황은 초전에 흉노에게 털렸는가?

 


A: 앞써,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중국은 고대부터 하나의 체계화된, 선진화된 국가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다릅니다.
중국의 상나라(商)이나 주나라(周)를 마치 하나의 거대한 나라라고 착각들을 많이 하시는데, 상나라는 "씨족제" 원시 국가이며, 주(周)는 혈연주의를

바탕으로 봉건제를 시행하던 국가이므로 막 원시 문화를 탈피하던 시기로 오늘 날 처럼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국민으로 이해하면 안되며, 이후에

주왕실이 붕괴되며 형성된 200여개 국가들 ( 춘추시대 ) 역시 분열이 아닌 원래 그 지역을 독립적인 세력들이 통치하고 지배하던 범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주왕실의 힘은 미약하여 지방까지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

이후에 강력한 7개 국가가 대립을 하며 행정과 사상이 발전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진나라가 유일하게 체계화된 군현제(郡縣制)를 바탕으로 거푸집에

철을 찍어내는 대량생산 방식을 채택하여 체계화된 군대로 형성되며 모래의 한줌과도 같은 부실한 행정체계를 유지했던 6개국을 점령하여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내니 이것이 통일된 진시황의 진나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나라 역시도 진시황의 지방 죽이기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분서갱유 ( 지방의 기록물들을 수거하고 역사가들을 생매장 하는 정책

) 과 지방의 부호 ( 왕족이나 귀족 ) 의 12만호 ( 약 6만여 명 ) 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 지역 으로 강제 이주 시키고 장성을 제외한 지방의 보루

들을 철거를 하고 도로를 건설하며 중앙인 함양에서 변방까지 잇는 도로까지 만들며 하나의 사상으로 통제된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

정에서 여러 반발 ( 진시황 암살 사건 ) 등이 발전된 것읊 볼 때 진나라 역시도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나라의 인구의 10% 이상 약 12-14% 이상, 300만명 가량이 진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사치적인 건축물등을 건설되는데 희생되는 상황

( 실질적으론 노동이 가능한 건장한 청장년들이 다 동원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 에서 흉노의 소수의 기마대한테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집밟히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당시 중원의 말들과 만주나 유목지대(스탭지역)의 말들의 차이는 매우 컸는데, 변방의 말들은 거친 초원과 사막, 평지, 산맥지대를 뛰어다니면서

거친 풀들을 먹고 자란 말들이었기 때문에 사료도 가리지 않았으며 어떤 경우는 호랑이를 걷어차 쫒아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선천적으로 거친

말들일 뿐만 아니라 중원과 다르게 어떠한 상황에도 말이 울지 안도록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기 때문에 만주의 명마(名馬)나 흉노의 천리마(千里馬)

는 중원의 말(中原馬)과의 갭차이는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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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한국사] [ #글림킴 ] 생생한 고조선 이야기 ② 주나라 ~ 진시황 전국통일 ( 사상과 행정, 춘추전국, 지도, 영토 ) (0) 2021/07/11 AM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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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림 작업과 애니메이팅, 컨텐츠 제작을 같이 하고 있는 "컨텐츠 크리에이터 글림킴 ( gleamkim )" 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지난 시간에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조금 더 이하기 쉽게 다양한 인물들을 추가하여 제작해 보았습니다.


지난시간에 받은 질문들중에 "중국의 행정체계(군현제)" 에 대한 질문과 "과연 고조선보다 전국시대 국가들이 행정 체계상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가?" 또는 "당시 중국의 지략과 전술은 어떤것이 있었는가?" , "당시 전국시대 총 인구의 합은 몇인가?" , "전국시대 7개 국가들이 과연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냐" 에대한 몇가지 질문들을 댓글을 통해서 받아보았는데요..

이 영상은 그런 질문들의 일종의 해답이자, 대충 넘겨왔던 내용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각종 지도와 캐릭터 작업을 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들여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 녹음은 금방 끝났는데, 제작이 1달 반, 거의 2달 정도 걸렸네유 ㅋㅋㅋ;; ) 또한 중국의 사상가들에 대한 이야기, 진시황은 어떻게 통일했는가 에 대한 이야기도 넣어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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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주나라가 정말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을까? 

 

A : 많은 사람들이 중국 기록을 근거로 중국은 상나라나 주나라시대 부터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으며, 춘추시대부터 중앙집권화를 하였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실제와 엄연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물론 기록상으론 상, 주시대 상당히 미화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점이 은근 많은데 상나라(은나라)는 봉건제 국가도 아니며 단순 씨족사회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다고 보기 매우 힘듭니다.

 

정전제(井田制)란 일단 행정 자체가 중앙집권화가 되어야 된다는 첫번째 전재가 있어야 하고, 두번째로는 왕이나 황제와 같은 임금이나 지배자가 지방 씨족이나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나 재산 사병들을 국가로 환수하고 이 토지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농사를 짓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한 댓가로 백성들은 세금으로 수확한 농사물과 군사징병및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강제노동으로 세금을 충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주나라는 봉건제 국가이며, 기록적으로도 개국공신과 친인척들에게 땅과 사람을 주어 독립적으로 관리하게 하는 것이 정치 수단이였기 때문에 좋게 말하면 봉건제지만 실질적으론 개별적인 존재, 독립적인 존재로 공국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정전제(井田制)가 시행될수 없었던 환경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즉, 주나라가 봉건제라고 포장되어있긴 하나 실질적으론 고조선과 행정체제에 대해서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원시 초기 국가단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고조선의 최대 권력자였던 조선왕(朝鮮王)은 단군왕검으로도 불렸는데, 단군왕검은 중국에 없는 독자적인 신화인 "천손강림신화" 를 강조하며 하늘의 직계 후손인 "천손(天孫)" 임을 내세우고 있으며 조선왕의 지휘아래 아래, 독자적으로 땅과 군대 백성들을 관리하는 역활까지 역임했던 비왕(裨王)과 박사(博士), 상(相), 이라는 직책이 존재했기 때문에 주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행정체제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씀드립니다.

 

한나라의 섭하가 고조선에 방문하였으나,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가게 되는 과정에서 한무제의 꾸짖음이 두려워, 섭하를 마중하던 비왕(裨王)을 죽이고 한나라로 달아나게 되는데, 이 소식을 한무제가 알게 되자 크게 기뻐하며 섭하를 요동도위부로 앉히게 된다. 요동지역은 대대로 철광과 석탄의 산지이자 산동반도와 인접한 땅으로 동북아에서 중요한 전략 요충지 였는데, 이 땅을 섭하에게 준 점을 볼때 살해당한 비왕(裨王)이라는 직책의 남성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역사학자 임용한 학자님의 저서 한국 고대전쟁사의 서적을 살펴보면 비왕(裨王)을 고조선왕의 휘하아래 특정 지역을 다시리던 소국의 왕(王)정도로 추정하고 계시며, 흉노의 역사서에서의 비왕(裨王) 역시 특정 지역을 다시리는 부족장을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섭하가 주요 거점인 요동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는 특정 지역만 중앙집권을 실시하고 나머지 요서나 요동, 산동지역처럼 외각지역의 땅들은 소국의 왕(王)들에게 직접 지배하도록 하는 봉건제와 군현제의 혼합인 군국제를 시행하며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습니다. 요서지역은 고조선이 개국한 터전이자( 십이대영자 유적 ), 연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700년간 통치를 하던 지역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조선 중기무렵에 투항했던 위만(衛滿)이라는 인물이 연나라계로 보는 설, 또는 요서지역에 살던 고조선 계로 보는 설 이 두가지가 공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위만(衛滿)이 고조선 준왕에게 투항했었을 시기 "요서지역 사람" 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위만이 대려온 백성과 병력 그리고 그의 남다른 정치능력을 높게 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하사하게 되고, 위만은 고조선의 국경, 변경지역에서 군대를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된 점을 볼때, 박사(博士) 라는 직책 역시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땅과 군단을 이끄는 거대 세력이였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 전국시대 각국은 과연 체계화된 군현제를 실시 하였는가?  

 

 

A : 많은 사람들이 중국 기록을 근거로 중국은 상나라나 주나라시대 부터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으며, 춘추시대부터 중앙집권화를 하였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실제와 엄연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물론 기록상으론 상, 주시대 상당히 미화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점이 은근 많은데 상나라(은나라)는 봉건제 국가도 아니며 단순 씨족사회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했다고 보기 매우 힘듭니다.

 

정전제(井田制)란 일단 행정 자체가 중앙집권화가 되어야 된다는 첫번째 전재가 있어야 하고, 두번째로는 왕이나 황제와 같은 임금이나 지배자가 지방 씨족이나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나 재산 사병들을 국가로 환수하고 이 토지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농사를 짓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한 댓가로 백성들은 세금으로 수확한 농사물과 군사징병및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강제노동으로 세금을 충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주나라는 봉건제 국가이며, 기록적으로도 개국공신과 친인척들에게 땅과 사람을 주어 독립적으로 관리하게 하는 것이 정치 수단이였기 때문에 좋게 말하면 봉건제지만 실질적으론 개별적인 존재, 독립적인 존재로 공국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정전제(井田制)가 시행될수 없었던 환경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즉, 주나라가 봉건제라고 포장되어있긴 하나 실질적으론 고조선과 행정체제에 대해서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원시 초기 국가단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고조선의 최대 권력자였던 조선왕(朝鮮王)은 단군왕검으로도 불렸는데, 단군왕검은 중국에 없는 독자적인 신화인 "천손강림신화" 를 강조하며 하늘의 직계 후손인 "천손(天孫)" 임을 내세우고 있으며 조선왕의 지휘아래 아래, 독자적으로 땅과 군대 백성들을 관리하는 역활까지 역임했던 비왕(裨王)과 박사(博士), 상(相), 이라는 직책이 존재했기 때문에 주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행정체제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씀드립니다.

 

한나라의 섭하가 고조선에 방문하였으나,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가게 되는 과정에서 한무제의 꾸짖음이 두려워, 섭하를 마중하던 비왕(裨王)을 죽이고 한나라로 달아나게 되는데, 이 소식을 한무제가 알게 되자 크게 기뻐하며 섭하를 요동도위부로 앉히게 된다. 요동지역은 대대로 철광과 석탄의 산지이자 산동반도와 인접한 땅으로 동북아에서 중요한 전략 요충지 였는데, 이 땅을 섭하에게 준 점을 볼때 살해당한 비왕(裨王)이라는 직책의 남성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역사학자 임용한 학자님의 저서 한국 고대전쟁사의 서적을 살펴보면 비왕(裨王)을 고조선왕의 휘하아래 특정 지역을 다시리던 소국의 왕(王)정도로 추정하고 계시며, 흉노의 역사서에서의 비왕(裨王) 역시 특정 지역을 다시리는 부족장을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섭하가 주요 거점인 요동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는 특정 지역만 중앙집권을 실시하고 나머지 요서나 요동, 산동지역처럼 외각지역의 땅들은 소국의 왕(王)들에게 직접 지배하도록 하는 봉건제와 군현제의 혼합인 군국제를 시행하며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습니다. 요서지역은 고조선이 개국한 터전이자( 십이대영자 유적 ), 연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700년간 통치를 하던 지역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조선 중기무렵에 투항했던 위만(衛滿)이라는 인물이 연나라계로 보는 설, 또는 요서지역에 살던 고조선 계로 보는 설 이 두가지가 공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위만(衛滿)이 고조선 준왕에게 투항했었을 시기 "요서지역 사람" 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위만이 대려온 백성과 병력 그리고 그의 남다른 정치능력을 높게 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하사하게 되고, 위만은 고조선의 국경, 변경지역에서 군대를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된 점을 볼때, 박사(博士) 라는 직책 역시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땅과 군단을 이끄는 거대 세력이였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전국시대 각국은 수십만의 병력 동원이 가능했나? 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A : 항상 받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우선 고대부터 현대까지 불변진리가 있다면 전체인구대비 상비군을 1% 에서 4% 이내로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역시도 현역군이 53만 정도인데, 한국의 전체 인구가 약 5000만과 비교 해보면 1.02% 수준에 못 미치는 수준이고 왠만해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최후의 전쟁이 아니고서야 전체 인구의 4%를 넘기지 않았기 때문에, 장평대전이라든가 진나라와 초나라간의 전쟁에서 등장하는 40만 - 60만의 병력들은 굉장히 많이 과장된 부분중 하나라고 추정이 됩니다.

물론 제 영상에서 진짜 후하게 쳐서 전국시대 중원 전체의 인구를 2500만 언저리로 설명을 많이 했으나, 2500만 역시도 굉장히 많이 부풀린 수로;; 실질적으론 전국시대 중원 전체의 인구를 2000만으로 보는 설이 정설이긴 합니다. ( 왕육민의 중국인구사에선 전국시대 ~ 진시황의 진나라의 인구를 2000만으로 주장을 하며, 고대 문헌에서도 진나라의 인구를 400만호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진서지리지에선 약 1610만 정도로 기록합니다.. )

 

 

 

ⓒ 이 이미지 자료의 저작권은 제작자 글림킴 ( gleamkim ) 에게 있으며 수정및 편집을 금지합니다.

 

** 우선적으로 자주 달리던 댓글 3개만 간추려 제 의견을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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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한국사] [ #글림킴 ] 고조선 VS 연나라 - 전국시대 전투력 비교 ( 2000리, 만번한, 군사력 ) (0) 2021/05/19 PM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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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림 작업과 애니메이팅, 컨텐츠 제작을 같이 하고 있는 "컨텐츠 크리에이터 글림킴 ( gleamkim )" 이라고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고조선과 연나라의 전쟁을 다루어보며, 이전까지 유튜브에서 보기 힘들었던 전국시대 전투력 비교와 연나라의 실제 국력, 고조선의 2000리 영토 상실에 ( 요서 상실 ) 대한 문제점에 대해 중국의 문헌자료를 토대로 심층적으로 다루어 보았습니다. 이 콘텐츠를 다루는 이유는 인터넷 상에서 단순하게 "고조선이 약하다" , "연나라가 최약체다" 라는 이야기가 난무하고, 고대 전국시대 전국시대 중원의 인구의 총합이 후하게 쳐줘도 2000만 중후반 임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고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화 되면서 중원의 인구가 3000만이 되었기 때문에;; 전국시대 각 나라들이 자주 무력 충돌하던 과정까지 생각한다면 수십-수백만의 병력이 국력으로 기록된 점은 심히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징병제를 통해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든 한국의 현역군이 53만이라는 병력 역시, 약 5000만 인구의 1.02% 수준이고, 맥시멈으로 늘려도 전체 인구의 4% 를 넘지 않는 수준이라는 점.. 그리고 모든 나라들의 인구의 10% 이상의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 다는 점 역시 고려한다면... ( 설명 : 군대는 소모적인 집단으로 인구의 10%를 군대로 보유할 경우, 가장 활발히 일해야 할 10대 후반 - 30대 초반의 인구들이 대거 현역으로 입대되는 상황이 연출되고, 그들이 소비하는 군장비와 식수, 식량 그리고 훈련과정에서 나오는 지출들을 인구의 90% 사람들이 세금으로 막대한 금액이 징수되야 원활히 군대가 운용되기 때문에, 그 나라의 경제력은 심각하게 하락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국가의 명운이 걸린 상황이 아니라면 인구의 10% 가량의 병력을 군대로 보유하지 않습니다. )

물론 춘추시대~전국시대 말까지 약 546년이라는 시간동안 쉬지 않고 잦은 무력 충돌을 하던 상황이라면 이름만 군사활동이 가능한 군인이라기보단 단순히, 머릿수만 맞춘 이름의 "군인" , 또는 매 순간이 국가적 존망의 위기 였으니 국가 경제력의 손실을 감수하고 나서라도 군사적인 활동을 했다면 인구의 10%인 수십만의 병력을 보유할 가능성이 있으나 국가의 미래보다 현실의 생존이 더 중요하지 않는 이상 전체 인구의 10% 차출은 매우 힘든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1. 영상을 제작하면서 받은 질문 : 고대 전국시대 군현제도를 사용했을까? img/21/05/19/179842a441b4aa9d3.png

가장 잘못 알려진 사실이 춘추시대나 전국시대에 마치 군현제도를 시행한 것으로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중국 최초의 국가인 상나라(은나라)는 실질적으로 부족국가였고 이후에 성립된 주나라 역시도 왕이라는 천자가 지배자로 존재하긴 했으나 변방 세력들은 제후들이 독립적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주나라 왕실의 영향력이 긴밀하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라 보기 매우 어려운 구조였으며,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출현 역시 주왕실의 행정망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제후들이 공(公)과 왕(王)을 칭하기 시작하며 독자적으로 나라를 운영하며 상호 경쟁하는 과정에서 각국의 국력이 압도하지 못했으므로 사실상 전쟁기록이라고 해봤자 한대씩 치고 받는 구조였기 때문에 보병만 수십만 ~ 수백만에 달했다는 구절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 애초에 병력이 상대 국을 압도할 정도로 넘쳐났다면 전국시대의 막은 빨리 내렸을 테고 국력이 압도한 국가가 통일 왕조를 세웠을 진데, 실제 전쟁 기록을 봐도 나라간에 한대씩 치고 받는 수준 정도였기 때문에, 자국의 소수의 병력으로 상대방의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정복, 흡수할 수있는 방법을 구상하며 병법들이 생겨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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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군현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한 시점은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며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분서갱유를 통해 각국의 역사서들을 말소시키며 지방세력들의 문화를 희석시키는 과정에서 시행된 것이 군현제이고 이 영향으로 이후에 성립된 한고조 유방의 한나라 역시 군현제와 봉건제의 공존인 군국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전국시대 각 지방 국가들이 중앙집권이나 군현제를 시행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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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한국사] [ #글림킴 ] 고조선이 연나라를 선제 공격하려고 했었던 이유 ( #gleamkim ) (1) 2021/04/13 PM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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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림 작업과 애니메이팅, 컨텐츠 제작을 같이 하고 있는 "컨텐츠 크리에이터 글림킴 ( gleamkim )" 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엔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들을 대략적으로 설명하면서 고조선의 영역을 대략적으로 표현해 보았었는데요.. 

오늘의 주제는 한국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연나라를 선제 타격하려 했었던 이유에 대해 다루어 보면서 중국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대한 국제 정세에 대해 짧게 정리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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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비    친구신청

아.. 최근에 유튜브 봤는데 루리웹도 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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