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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15 (0) 2018/09/24 PM 11:52

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一. 정계의 격변

 

◇ 타다자네, 요리나가의 실각

~ 한큐 전철 쿄토센(阪急電鉄京都線)의 카츠라가와 철교(桂川鉄橋)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산 정상부에 혹이 튀어나와 있는 것 같은 특이한 형상을 한 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쿄토(京都)의 서북쪽, 탄바(丹波)와의 경계에 위치하며, 방화의 신으로서 알려진 아타고야마(愛宕山)이다. 그 산위에 있는 아타고곤겐(愛宕権現)과 관련된 기괴한 소문을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가 자신의 일기 속에 써둔 것은, 코노에 텐노(近衛天皇)가 죽은지 거의 한 달 정도 지난 8월 24일의 일이었다. 그는, 시츠지 케이시(執事家司)인 후지와라노치카타카(藤原親隆)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조정에 무녀(巫女)가 초빙되어, 죽은 코노에 텐노의 공수(口寄せ)가 치러졌다. 이때, 무녀에게 빙의한 코노에 텐노의 영(霊)은 아타고야마의 텐구상(天狗像)의 눈에 누군가가 못을 박아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시력이 나빠져 결국 죽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타고야마의 텐구상을 조사하게 했더니, 과연 못이 박혀있었는데, 그곳 승려의 이야기로는 5~6년 전에 누군가가 박아놓았던 듯 했다. 칸파쿠(関白) 타다미치(忠通)나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은, 이를 타다자네(忠実)와 요리나가의 짓이라 보았고, 토바인(鳥羽院)도 이를 믿었다 한다. 

 요리나가는 이 이야기를 이미 다른 케이시로부터 들었고, 또 이 이야기는 이미 모두가 아는 소문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코노에를 대신한 고시라카와(後白河)의 즉위 이후, 요리나가에게 새로운 텐노로부터 재차 나이란(内覧)이 선하(宣下)되지 않은 이유라고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짜놓은 연극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사실이라 봐서는 곤란하다. 사랑스런 코노에의 중병, 죽음으로 동요한 토바인이, 텐노와 가까웠던 비후쿠몬인이나 타다미치에게 말려들어, 타다자네와 요리나가 부자를 기피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선술한대로, 코노에 텐노 사후의 왕자의정(王者議定)은 비후쿠몬인이나 타다미치와 가까운 사람들만 참여했고, 타다자네는 배제되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타다자네, 요리나가의 우위는 무너져 실각은 결정적인 사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필시 토바인은 코노에의 병세가 진행됨과 함께, 텐노가 혐오하던 요리나가를 증오하게 되었고, 그의 부친인 타다자네도 멀리하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코노에가 죽기 3개월 전인 큐쥬(久寿) 2년(1155) 2월에 치러진 카스가사이(春日祭)에서는, 요리나가의 차남이자 타다자네의 유자(猶子)가 되어 있던 모로나가(師長)가 카스가사이 쇼케이(上卿)로서 내려갔다. 하지만, 출발 할 때에, 시츠지 케이시인 후지와라노치카타카를 시작으로, 코노에 관인 대부분이 출사하려 들지 않았다. 이미 타다자네, 요리나가에 대한 토바인의 불쾌감이 드러나면서, 그들이 고립되어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빈번하게 토바인의 이궁(離宮)을 방문하던 타다자네도, 큐쥬 원년(1154) 이후에는 완전히 발길을 끊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코노에의 병세의 악화와 함께, 타다자네와 요리나가 부자에 대한 인의 기피가 강해졌음을 이야기 해준다. 

 거기다, 그들이 배제된 원인 중 하나로,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의 문제도 관계했으리라 생각된다. 스토쿠 죠코(崇徳上皇)와 타다자네, 요리나가가 특별히 친밀했던 건 아니지만, 이전부터 타다미치나 비후쿠몬인이 추거해온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의 옹립에 그들이 난색을 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토바인이나 측근들에게는, 타다미치와 요리나가 부자의 존재 자체가 시게히토 친왕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물론, 타다자네와 요리나가 부자는 즉위한 고시라카와나 황태자인 모리히토 친왕에게 반발했던 건 아니다. 모리히토 친왕의 모친인 후지와라노이시(藤原懿子)는 요리나가의 정실와 사촌자매지간에 해당했고, 코지(康治) 2년(1143)에 그녀가 출산이 원인이 되어 죽었을 때, 요리나가는 일기에 애도의 뜻을 남겼을 정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요리나가는 모리히토 친왕의 토구우노후(東宮傳)로의 보임을 원해서 새로운 체제에 종속하려 했다. 여기에 대해 토바인은, 요리나가가 3년에 걸쳐 비후쿠몬인에게 봉사하지 않아, 자신이 죽은 뒤에도 황태자에게 봉사하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 아주 쌀쌀맞게 각하해버렸다.

 타다자네는 요리나가에게 근신처분을 내림과 동시에, 딸이자 퇴위후 토바인의 황후가 되었던 카야노인 타이시(高陽院泰子) 등을 통해 인의 신뢰회복에 노력했다. 그런 보람이 있었는지, 한때 호코(法皇)도 화해할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하늘은 타다자네, 요리나가 부자의 편이 아니었다. 마지막 보루라고 해야 할 카야노인이 큐쥬 2년 12월에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너무 놀라 어찌 할 바를 몰랐는지, 타다자네가 담당한 그녀의 장례식에는 실책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이마쿠마노샤(今熊野社)의 영역 안에서 사예(死穢)와 관련된 장례를 치렀기 때문인지, 뇨보나이시(女房内侍)가 갑자기 아파하더니 냐쿠오지(若王子)의 신탁(託宣)을 말했고, 10일쯤 뒤, 고민하던 중에 죽어버리는 꺼림칙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리하여, 셋칸케의 중심에 있던 타다자네, 요리나가 부자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왕가 적류인 스토쿠와 함께, 셋칸케 적류도 정치적으로 실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스토쿠에게 권위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막대한 무력(武力)과 재력(財力)이 있었다. 그들을 정치적으로 억압하여 장염을 일으킬 법한 정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토바인의 권위였다. 정정(政情)은 너무나 불온해졌고, 일촉즉발의 위기를 품게 된다. 

 셋칸케 주류가 억압받으면, 그들에게 속한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의 일족에게도 격심한 탄압이 가해지게 된다. 정치적 대립은 지방에도 파급력을 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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