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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35 (0) 2018/10/17 AM 12:18

제 03장 -격투 끝에

 

 

三. 승자들의 명암

 

◇ 왕가의 갈등

~ 경합하고 있던 스토쿠 죠코(崇徳上皇) 계통을 괴멸시키고,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의 황위도 당장은 안주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중간다리에 지나지 않았다. 또, 왕가의 가장인 치천의 군주(治天の君)도 부재(不在) 중이었다. 모후(母后)라 여겨진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이 가장 대행을 맡기는 했으나, 그녀에게는 인의 근신 가문이라는 출신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병약했기 때문인지, 정무(政務)에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후술할 보좌역 칸파쿠(関白)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도, 본래는 셋칸케(摂関家)의 방류(傍流) 출신이었던 것도 있어서인지 무력하기만 했다. 

 결국, 왕권의 권위자는 그 누구도 역량 부족이었다. 여기에, 토바인(鳥羽院)의 근신으로서 정치의 중추에 관여해왔던 실무관료 신제이(信西)가 정무를 주도한 원인 중 하나가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이다.「밤의 칸파쿠」후지와라노아키타카(藤原

顕隆)처럼, 인의 근신이 정무의 중추에 관여하는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치천의 군주의 보좌역에 지나지 않았기에, 신제이처럼 자신이 정무를 주도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실무에 뛰어나다고는 해도, 신제이에게는 권위가 부족해, 그의 싯세이(執政)에 불만을 가진 자가 적지 않았다. 

 호겐(保元) 3년(1158) 8월, 즉위 당초부터의 약속에 따라, 고시라카와 텐노는 토구우 모리히토 친왕(東宮守仁親王)에게 양위를 한다. 아버지 인(院)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의 탄생인데, 당시까지의 경위를 통해 말하자면 인정(院政)을 행할 정도로 권위를 가지지는 못 했다. 타이라노노부노리(平信範)는 자신의 일기인『兵範記(효한키)』에, 이번 양위는「그저 부처와 부처간의 회의(ただ仏と仏の評定)」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두「부처(仏)」는,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 씨의 지적처럼 신제이와 출가해있던 비후쿠몬인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즉, 실질적인 정치권력의 담당자와 형식적인 가장이 의논을 나눴다는 뜻이 된다. 당시까지의 황위는 아버지 인이 단독으로 결정하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의 왕권의 특이성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왕가의 존재형태가, 토바인의 인정기(院政期)의 그것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당시는 왕가령(領) 장원(荘園)도 호쿠멘 무사(北面武士)도, 치천의 군주가 일원적(一元的)으로 통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장원의 태반은 비후쿠몬인이나, 그녀의 황녀인 하치죠인(八条院)의 것이 되어 있었기에, 고시라카와에게는 계승되지 않았다. 고시라카와는,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 몰관(没官)한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의 장원을 고인령(後院領)으로 편입시키고나서야 겨우 독자적인 경제 기반을 형성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왕가의 분열은, 왕가 구성원과의 개인적인 결합을 강화하고자 했던 인의 근신이나 무사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인의 근신들 중에는 신제이 이치몬(一門)처럼 고시라카와, 니죠(二条) 쌍방을 모시는 자도 존재했지만, 대부분은 고시라카와, 니죠 두 파벌로 나뉠 수 밖에 없었다.

 고시라카와의 측근 중에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말하겠지만, 헤이지의 난의 중심인물인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나 대국 즈료계(大国受領系) 인 근신의 명문인 스에시게류(末茂流) 출신인 후지와라노나리치카(藤原成親), 타이켄몬인(待賢門院)의 뇨보(女房)를 모친으로 둔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출신인 미나모토노모로나카(源師仲) 등이 대두한다. 명목상, 고시라카와인의 인노쵸(院庁)의 벳토(別当)라고는 해도, 토구우시대(東宮時代)부터 니죠를 가까이서 모셨던 후지와라노코레카타(藤原惟方)나, 니죠의 외척인 후지와라노츠네무네(藤原経宗) 들 처럼, 니죠 텐노의 측근도 형성되었다. 그들은 신제이와 마찬가지로, 권위나 정치력이 없는 죠코나 뇨인(女院), 텐노에게 종속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면서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행하게 된다. 

 한편, 무사들 중에 미나모토노요시야스(源義康)는 난이 일어난 다음해에 급사하게 되는데,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는 의연하게 고시라카와인, 죠사이몬인(上西門院)에게 접근하게 된다. 여기에 반해,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 이하의 옛 토바인의 호쿠멘무사나, 비후쿠몬인을 모시던 미나모토노요리마사(源頼政)들은 비후쿠몬인, 니죠 텐노에게 봉사한다. 그리고, 왕가령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있던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 이하의 헤이시 이치몬(平氏一門)은, 변함 없이 쌍방 모두와 거리를 두는 자세를 보였다.

 고시라카와인과 비후쿠몬인은 모두 정치적으로 무력했으며, 전자에게는 가산(家産)도 부족했다. 따라서, 정치적 권위는 물론이고, 가산기구(家産機構)를 통해 인의 근신이나 무사들을 통제하는 것도 어려웠던 것이다. 신제이로 대표되듯, 인의 근신들은 정치적으로 자립하여,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것이 정계(政界)의 동요와 혼란을 초래해, 새로운 병란을 잉태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리하여, 일찍이 치천의 군주 아래에서 형성되어 있던 강력한 권문(権門)은 모조리 분열,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권문의 분열, 약체화라는 점은, 권문의 중심에 있었던 후지와라노타다자네(藤原忠実)의 실각, 요리나가(頼長)의 전사를 경험한 셋칸케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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