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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40 (0) 2018/10/24 AM 12:44

제 04장 -새로운 싸움

 

 

一. 정계의 세력지도

 

◇ 노부요리(信頼)와 요시토모(義朝)

~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는 어째서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와 손을 잡았던걸까?『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서는 호겐의 난(保元の乱) 이후,「헤이시(平氏)에 비해 평판이 떨어졌던」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노부요리의 꾐에 응한 것이라 나온다. 후술할『愚管抄(구칸쇼)』에서는, 신제이(信西)가 요시토모와의 혼담(縁談)을 매몰차게 거절했으면서도,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와 혼담을 맺은 것에 요시토모가 원한을 품었다고 나온다. 내용은 다르지만, 요시토모는 사소한 이유로 어리석게도 노부요리의 꾐에 빠져, 결국에 자신을 망가뜨리는 결과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선술했듯이 헤이시와의 관위(官位)의 차이는 단순히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의「평판」의 결과가 아니었다. 미나모토노요시치카(源義親)의 반란을 타이라노마사모리(平正盛)가 토벌한 이래, 마사모리, 타다모리(忠盛)의 화려한 활약과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의 실책 등을 통해, 겐페이(源平) 양 씨족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생겼던 것이다. 또, 자세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키요모리와 요시토모의 관위의 큰 차이를 감안하면, 신제이가 요시토모의 혼담을 거절하고 키요모리와의 혼담을 진행시켰다고 해도 요시토모가 크게 원한을 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원래, 요시토모와 노부요리의 제휴는,『헤이지모노가타리』나『구칸쇼』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양자 사이에는, 깊고 밀접한 관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다뤘듯이, 큐쥬(久寿) 2년(1155) 8월, 요시토모의 장남인 요시히라(義平)는 숙부이자 요리나가(頼長)의 심복인 요시카타(義賢)를 무사시노쿠니(武蔵国) 히키 군(比企郡) 오오쿠라야카타(大蔵館)에서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때, 요시히라의 대담한 군사행동은 문제가 되지 못 했고, 그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를 묵인한 무사시노카미(武蔵守)가 바로 노부요리였던 것이다. 

 노부요리는 호겐(保元) 2년, 무사시노카미 자리를 동생인 노부토키(信説)에게 양도했다. 헤이지의 난(平治の乱) 당시의 무사시노카미는 노부토키였고, 노부요리는 지행국(知行国)의 국주(国主)였으리라 생각된다.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 무사의 동원 형태를 보더라도, 요시토모에게 있어서 무사시노쿠니는 사가미(相模) 못지 않은 중요한 거점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관되게 노부요리와의 연계는 불가결했을 것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양자를 이어준 인연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요시토모가 깊은 관계를 가진 나라 중에는 무츠노쿠니(陸奥国)가 있다. 노구치 미노루(野口実) 씨에 따르면, 요시토모는 무츠노쿠니에 센시(専使)로서 오우미노쿠니(近江国)의 무사인 사사키 히데요시(佐々木秀義)를 파견하여, 화살깃이나 준마(駿馬)를 구입하고 있었다 한다. 히데요시의 숙모는 후지와라노히데히라(藤原秀衡)의 아내였기에, 양자의 관계는 밀접했었다. 뛰어난 말이나 무구(武具)를 입수하여 무문(武門)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무츠노쿠니와의 교역은 불가결했던 것이다. 그런 무츠노쿠니에는 노부요리의 형인 모토나리(基成)가 거주하며 후지와라노히데히라와 혼인관계를 맺어 정치 고문의 역할을 맡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모토나리 이후, 무츠노카미 자리는 타카노리(隆教)의 자식인 타카치카(隆親), 이어서 노부토키, 노부요리의 숙부인 마사타카(雅隆)로 이어졌고, 마사타카가 재임 중에 급사하자, 모토타카의 외손자인 미나모토노쿠니마사(源国雅)와, 노부요리의 일족이 연이어 보임되었다. 무츠노쿠니도 필시 노부요리의 지행국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오우슈 후지와라(奥州藤原) 씨나 무츠노쿠니와의 교역을 중시한 요시토모에게 있어서, 노부요리와의 제휴는 불가결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노부요리와 요시토모의 제휴는 호겐의 난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 된다.

 무사단의 기반인 무사시노쿠니와, 준마나 무구의 생산지인 무츠노쿠니를 제압한 노부요리와의 제휴는, 요시토모에게 있어서 유력 무사로서의 사명을 다한다는 것과 동등한 게 아니었을까? 노부요리와 요시토모 사이에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그런 탓에 헤이지의 난에서 써먹을 무력으로서 요시토모를 기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양자가 단순히 신제이에게 대한 원한을 가졌기 때문에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결탁했을 리는 없다.

 확실히, 노부요리 자신의 무예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요시토모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데다, 인척관계를 가진 키요모리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는 자유자재로 무사를 움직일 수 있는... 무문(武門)이라 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는 뜻이다. 셋칸케(摂関家)의 큰어르신인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가 노부요리의 누이동생과 적자인 모토자네(基実)의 결혼이라는 굴욕을 감수한 이유는, 셋칸케령(摂関家領)을 관리하는 무력을 잃은 타다미치가, 노부요리의 무문이라는 측면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노부요리는 호겐의 난을 전후로, 특별히 고시라카와를 가까이서 모셨던 흔적은 없다. 그의 급격한 승진이 시작된 것은, 선술했듯이 호겐 2년 3월에 우콘곤노츄죠(右近権中将)를 겸임한 뒤부터이다. 호겐의 난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코지(康治) 3년(1144)의 서작(叙爵)도 황후인 토쿠시(得子)의 어급(御給)에 의한 것이었으며, 큐쥬(久寿) 2년에는 토쿠시의 후신인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의 인지(院司)로서 쇼덴(昇殿)을 허락받는 등... 비후쿠몬인과의 관계가 깊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그가 고시라카와에게 접근한 것은, 앞에서 다뤘던대로 숙모가 고시라카와의 메노토(乳母)였다는 것과, 고시라카와의 측근들 중에서 최대의 무력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호겐의 난의 입역자인 요시토모와의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과거의 토바인(鳥羽院)의 호쿠멘 무사단(北面武士団)의 주력을 조직하지 못 한 고시라카와에게 있어서, 요시토모는 빼놓을 수 없는 무력이었으며, 최대의 무문인 키요모리와의 제휴에도 커다란 매력이 있었다. 그 결절점(結節点)인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것이다. 여기에, 노부요리가 급속도로 관위를 승진시켜 간 원인 중 하나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호겐 3년 8월, 양위한 고시라카와가 인노쵸(院庁)를 개설하자마자, 노부요리가 우마야벳토(厩別当)에 취임하여 인의 군마(軍馬)를 관리하게 된 것도, 준마의 생산지인 무츠를 지배하여, 사마노카미(左馬頭)가 된 요시토모와 손을 잡은 노부요리의 입장을 이야기 해준다. 

 헤이지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 노부요리는 정 3위 곤노츄나곤(権中納言),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라는 빛나는 지위에 있었다. 관위에 있어서 기세이칸(議政官)을 겸하지 않은 3위(산 3위)에 그치고만 부친이나 조부를 완전히 능가해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누이동생과 칸파쿠(関白) 모토자네의 혼인도 성립, 이른바 무력면에서 셋칸케를 후견하는 입장을 획득함과 동시에, 셋칸케의 권위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그가, 어째서 신제이 타도의 주모자가 되었던걸까?

 노부요리가 오오오미(大臣), 타이쇼(大将)를 바라고, 이에 반대한 신제이와 대립을 낳았다고 말하는『헤이지모노가타리』의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또『구칸쇼』에서는, 요시토모와 신제이의 혼담을 둘러싼 대립도 보인다. 이러한 삽화(挿話)가 과연 신제이와 노부요리의 대립의 원인이었을까? 다음으로, 노부요리가 신제이를 살해하기에 이르는 배경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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