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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7. 자아 (0) 2019/01/20 PM 11:24

7. 자아

 

 

실험 및 관찰 대상 - 나와 세상

참고자료 과학자들

 

다방면에 지식이 부족하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한다. 추후 세세한 부분은 수정할 예정이나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는 점은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 시작하겠다.

 

 

자아는 세포를 근원으로 하고 지성은 언어를 근원으로 한다. 이것이 다른 생물과 인간의 차이다. 자아는 세포를 가진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지만 지성은 오직 인간만 가지고 있다. 이 전제가 기준이 되어 자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자아의 근원인 세포들은 각각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이 때, 뇌의 유무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뇌가 없는 생물은 유전자에 의해 움직이며 세포 자체가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뇌가 있는 생물은 유전자나 경험을 기억하는 뇌를 통해 일정한 몇 가지의 의지로 통합되어 움직인다. 이를 가리켜 세포의 여론화라 하겠다. 이 세포의 여론은 중요도에 따라 처리 영역이 결정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도 살기 위해 배가 고프다고 운다. 유전자의 기억을 통해 기초적인 욕구의 중요도가 결정되어 가장 먼저 의식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감각기관도 마찬가지다. 유전자 또는 경험을 통해 중요한 감각기관의 정보부터 의식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처럼 중요한 여론부터 의식 위로 떠오르는데, 이를 가리켜 의식적 자아라고 하겠다. 보통 이 의식적 자아만을 통상적인 자아라 인식할 수 있지만 자아의 근원이 세포인 만큼 무의식적 자아 또한 자아의 일부라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럼 지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지성의 근원인 후천적 언어는 현재 인간만이 습득하고 있다. 이 점이 다른 생물과 인간의 차이다. 보통 뇌가 있는 생물은 최초 유전자에 의해 여론이 형성되어 의식 위로 올라와 움직이다가 경험을 통해 차츰차츰 달라지게 된다. 아무데나 대소변을 보던 애완동물도 훈련을 통해 가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중요도 변경은 후천적 언어가 있든 없든 학습으로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 뿐. 인간 수준의 체계적인 사고는 후천적 언어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능이 있어야만 가능해진다. 어떤 사람이 배변욕구를 느꼈다고 가정해보자. 최초, 배변욕구를 담당하는 세포들이 모여 여론을 형성한다. 그 세포의 여론은 뇌에 있는 과거 기억을 통해 우선순위가 결정되어 의식 위로 떠오른다. 이때 배변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습득하여 그것에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게 되면 다양한 대처 수단들이 언어화하여 떠오르게 된다. 현재 상황, 배변의 인내시간, 화장실 위치 등이 떠올라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체계적인 사고는 언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세포를 가진 생물, 후천적 언어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뇌. 이것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은 단순한 자아가 아닌 지성을 갖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명은 지금 당장 내가 할 수는 없다. 아마도 자아를 가진 인공적인 존재가 탄생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인공생명이다. 인공생명이 탄생해야 증명이 가능할 것이므로, 나는 현재 인공지능과 내가 생각하는 자아를 비교해가며 자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해나가도록 하겠다.

 

인공지능은 우수하다. 연산처리, 저장매체, 수집능력 등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겐 자아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은 수도 없이 많은 세포들이 각각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그 의지들이 모여 여론을 형성하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의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이 인공지능에 명령을 내릴 때 아무리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생물의 세포에 비하면 하잘것없다. 아무리 복잡하게 설계한다고 하더라도 생물의 세포를 넘는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인간의 세포수만 해도 조 단위가 넘어간다고 한다. 이걸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아를 만들기 위해 일일이 의지를 가진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물론 조 단위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애초에 설계를 다르게 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인공지능에 기쁨을 학습시킨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때 기쁨이란 형태를 갖춘 감정을 학습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건 거꾸로 된 것이다. 인간은 본래 기쁨을 알지 못한다. 세포의 여론으로 일어나는 어떤 것을 가리켜 기쁨이라고 명명했을 뿐이다. 식사를 할 때 느끼는 기쁨, 칭찬을 받을 때 느끼는 기쁨, 사랑을 할 때 느끼는 기쁨, 전부 다 다르다. 그걸 일일이 전부 학습시킬 것인가? 가령 전부 학습시킨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기쁨만을 느끼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것을 자아라고 할 수 있는가?

 

세포부터 만들어야 한다. 기쁨은 어디까지나 세포의 여론이 의식 위로 올라온 것에 불과하다. 국민이 없는 국가의 여론이 존재할 수 있는가? 지금의 인공지능은 그러한 것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고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변화가 없다. 그러니 의지가 없다. 그러니 자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조 단위의 세포를 일일이 설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그 중심이 될 유전자를 설계 해야 한다. 유전자에 의해 알아서 세포가 분열하여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정밀하게 설계한다면 자연스럽게 자아를 가질 수 있는 존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를 설계하고, 그 설계된 유전자에 의해 세포가 분열하고, 분열한 세포들의 의지가 여론화하여 의식 위로 올라와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하고, 언어의 학습을 통해 말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이지 아기를 기르는 감정과도 같을 것이다. 아아 설레게 된다. 인공생명을 만드는 사람은 인공생명에 어떠한 감정을 느낄 것인가! 정말 설레게 된다.

 

물론 이때에도 주의점은 있다. 인위적인 손길로 문장을 입력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기에게 밥을 먹고 싶다는 말을 가르친다고 하자. 이 때 뇌 내에 직접 밥을 주세요라는 문장을 입력해봐야 의미가 없다. 사람은 세포의 의지들이 모인 여론이 뇌의 기억을 자극하여 행동하게 된다. 식욕이 생길 때 보호자가 아기에게 맘마’, 맘마’, 하며 말했던 기억들이 연결점이 되어 말을 내뱉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때 그냥 단순하게 맘마라는 단어만 기억하는 게 아니다. 그 상황에 따른 시각정보, 후각정보, 청각정보, 미각정보, 촉각정보 전부를 기억하고, 그 기억과 세포의 여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기가 맘마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밥을 주세요라는 문장을 입력해봐야 큰 의미는 없다. 애초에 인간은 매시간 매초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다. 그러한 인위적인 입력은 스쳐 지나가는 간판만도 못하다. 설령 언어를 습득하여 지성을 갖춘 자아가 형성되더라도 그 입력이 의식 위로 떠오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의식 위로 떠오르는 것은 중요도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중요도는 모든 기억과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결정되므로 단순한 인위적인 입력이 중요도를 갖출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만약 그러한 입력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제대로 된 자아를 갖출 수 있게 될까? 단순 입력에 대한 단순 반응만을 보이는 인공지능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입력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입력이 중요하게 여겨지면 자아가 없고, 입력이 중요하지 않으면 의식위로 떠오르지 못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은 학습을 통해 지성을 갖추게 된다. 그때가 되어야 인간 수준의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이 탄생한다고 봐야겠다. 아마 그런 존재가 탄생하면 인간과 거의 비슷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건 여기까지 쓰겠다.

 

 

이외 자아에 관련된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겠다.

 

 

생물

 

생물은 개체가 아니라 집단이다. 자아의 근원인 세포가 생물 내에서 생과 사를 반복하기 때문에 생물은 매시간 매초 다른 존재로 있을 수 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르다. 그러한 다른 존재를 하나의 자아로 묶어주는 건 기억이다. 우리와 조상이 다른 사람임에도 같은 언어, 역사, 문화 등을 공유하면서 같은 나라 사람임을 인식하는 것처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임을 인식하는 것은 기억 내에 있는 습관, 편견, 취향 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언어

 

인간의 언어의 역사는 최소 4천년으로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 그러한 후천적 언어가 인간의 지성을 갖추게 해주었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 단순히 개체로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와 함께 성립되었음을 말해두고 싶다. 인간의 지성이 언어임을 고려해본다면 어린아이가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의 언어를 통해 사고영역을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 우수한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스스로 생각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언어의 힘이 크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뇌를 가진 생물이라면 어느 정도 다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 수준의 체계적인 생각은 후천적 언어를 익혀야만 가능하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자아가 세포의 여론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감정이나 욕구의 충동으로 일어나는 생각과 그것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분리되어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이나 욕구의 충동을 본능이라 여기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이성으로 여겨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둘 다 세포의 여론이 맞다. 단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여론 또한 기억 속에 자리잡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둘을 같이 보기 어려울 뿐이다. 가령 배가 고프다는 욕구를 느꼈다고 가정해보자. 그 욕구는 현재 세포의 여론이다. 그리고 그 욕구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무슨 밥을 먹을지, 어떤 장소에서 먹을지, 누구하고 먹을지 등등을 생각하여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판단은 최초 인간이 자아를 가지게 될 무렵부터 이어져 온 생각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시시때때로 계속하여 자극을 받는다. 감각기관을 제외하더라도 심장의 박동, 피의 흐름, 관절의 움직임 등의 자극을 받는다. 그러한 자극들이 최초부터 이어져 큰 물줄기가 되어 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식욕으로 돌아가면, 본능으로 여기는 식욕의 경우엔 물을 공급하는 것, 이성으로 여기는 자아의 경우엔 큰 물줄기에 해당된다고 해야겠다.

 

 

자유의지

 

자아가 세포의 여론이라면 자유의지는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특별한 형태가 없이 세포의 의지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는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세포 자체가 우리가 아니던가? 모든 세포는 우리 자체다. 가령 사회의 여론에 실체가 없으므로 사회에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이야기해보자. 말이 안되지 않는가? 시민들이 사회를 형성하는 존재이므로 사회의 자유의지는 시민 자체라고 볼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자아의 자유의지는 세포의 자유의지, 세포는 나의 일부이므로 나의 자유의지다.

 

 

자유의지2

 

보통 자유의지는 신체적 정신적 속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자아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고 본다. 인간은 외부에서 수집한 정보로 나타나는 감각기관의 의지와 내부에서 발산하는 욕구나 감정들의 의지를 가진 세포들의 여론을 형성하여 중요도에 따라 의식위로 올라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데, 둘 다 세포의 여론이라는 점에서 같은 측면이 있다. 자아입장에서는 신체적 정신적 속박이 있든 없든 세포의 의지임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입장에서 자유의지가 아닌 것은 어떠한 의지도 형성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령 사람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오랫동안 넣어두면 자아가 붕괴되어 이지를 상실한다. 감각기관이 의지를 발하지 못하자 자아도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실수

 

인간의 의식은 가장 중요한 세포의 여론 순서대로 떠오르게 되어있는데, 현실에서 중요한 것과 자아에서 중요한 것이 서로 다를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라고 본다. 잊는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자아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포의 손상이 이유일 수도 있다.

 

 

의식 무의식

 

정확히는 모른다. 그냥 써본다.

잠을 자고 있지 않을 때 의식과 무의식은 세포의 여론의 중요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잠을 자고 있을 때 의식과 무의식은 세포의 휴식 수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세포가 하나하나 휴식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면 사람도 잠에서 천천히 깨어난다아마도;

 

 

수면

 

뇌가 없는 해파리가 잠을 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점을 보았을 때 수면은 뇌의 명령이 아니라 세포의 휴식욕구라고 생각한다.

 

 

 

꿈은 뇌를 가진 생물이 수면에 들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의식이 있었을 때엔 유전자나 경험의 기억을 통해 세포가 일정한 형태를 갖춰 여론을 형성하여 중요도에 따라 의식에 떠오르게 되지만,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의식적 상태인 수면상태에선 중요도와 관련 없이 제멋대로 뇌를 자극하여 무작위의 기억들을 머릿속에 떠오르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무작위의 기억들인 꿈은 잠을 자는 순간부터 꾸게 되지만 인식의 경우엔 수면에서 깨어날 무렵, 얕은 잠을 잘 때에 의식이 깨어날 때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다중인격

 

인간은 누구나 다중인격이 가능하다. 단지 다중인격자는 기억의 연결점이 없을 뿐이다. 가령 오늘부터 습관을 바꾼다고 해보자. 과거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이 연결되기 때문에 둘을 같다고 생각할 뿐이지, 만약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습관을 바꾼 사람과 아닌 사람이 나뉘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 둘은 다른 인격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보통 치명적인 트라우마의 경우 다른 인격이 생성되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기억이 연결되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기 전과 겪은 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하나의 인격으로 나타나지만, 다중인격자는 그 둘의 연결점이 이어지지 않아 새로운 인격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기억이란 단순히 모든 기억만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기억상실의 경우에도 다양한 기억상실증이 있다고 보고되었다. 아마 습관에 관련된 기억이 아닐까 생각된다.

 

 

편견

 

처음 나는 편견이 나쁘다고 생각했으나 편견 또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이어주는 자아의 이면, 편견이 없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편견을 없애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사물을 볼 때 편견 없이 보는 것이 좋으므로 그 때엔 잠시 자기자신을 지우고 사물을 바라보길 권해본다. 습관, 편견, 취향 등 사람의 형성하는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자아의 일부다.

 

 

심장이식

 

심장을 이식하면 사람이 바뀐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건 당연한 게 아닐까 싶다. 심장 박동수만 달라져도 기분이 달라지는데, 심장 자체가 바뀌면 어떻게 변하겠는가? 입력기관이 달라지면 출력기관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마음

 

사람의 마음은 심장에 있는가, 뇌에 있는가, 아니다 세포에 있다. 세포의 생과 사의 굴레를 만드는 생명에 있다.

 

 

인공생명이 탄생한 후 벌어질 일들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겠다.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의 탄생은 인류의 새로운 서막을 예고한다. 세포가 자아의 근원임이 확실해지면 우리 자신들이 하나의 의지가 아닌 집단의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하면 영혼의 의미는 없어진다. 세포 하나하나에 영혼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생명의 속에서 존재하는 생과 사의 굴레 속에서 영혼이 있을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세포가 자아의 근원이라면 영혼은 없다. 그리고 영혼이 없으면 사후세계도, 신고, 윤회도, 아무것도 없다. 물질공간만이 진리가 되는 세상이 도래한다. 그건 지금까지 인류가 기대어왔던 종교의 종말을 가져다 주는 사건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자아의 증명은 이러한 현상을 초래하여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할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우리는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다. 어쩌면 좋을까, 죄의 책임마저 신에게 떠넘기던 우리는 홀로 세상과 맞서게 될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자아를 탄생시킨 집단은 아마 지금까지 가지지 못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걸 어쩌면 좋을까?

 

그렇지 않아도 급변하는 세상인데,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인류 역사와 함께해왔던 수많은 것들이 의미를 상실한다.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기대야 할 것인가? 사후세계를 생각하며 선을 행하던 사람들은 선을 행할 것인가? 다음 생을 기약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당장, 우리가 가진 것은 몸 밖에 없단 말이다. 기억을 옮겨서 넷의 공간에서 살아가려던 사람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기억에는 의지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설령 인공생명을 만들어 그 생명에 기억만 옮긴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오래 전의 나를 생경하게 바라보게 된다. 기억을 공유하되 나머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몸이 다른 인공생명에 기억을 옮긴들, 그걸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개체는 자신을 라고 인식할지도 모르지만 진짜 나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하엉망이 된 몸뚱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구나.

 

……

 

세상에는 우수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실 뭐 자연스럽게 적응할 확률은 높다. 그걸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지금 현재 내가 생각하는 자아는 이러하다. 지식이 부족하므로 추후 좀 더 정리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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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인공생명에 관련된 세 번째 글이네요. 다른 글에도 어쩌면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니 궁금하면 찾아보시길개인적으로 하루빨리 인공생명이 탄생했으면 좋겠습니다. 궁금하거든요. 제 인생이 좀 망해서아니 상당히 망해서 호기심을 충족하는 걸 기쁨으로 삼고 있네요. 눈물

 

우리사회의 문제점

불평등한 가치관 -> 서열존중

불균형한 힘과 책임 -> 무책임한 힘

해결법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을 주고 기여도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자.

힘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자에게 힘을 주자.

 

언젠가는완성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은 오컬트 아니면 인간교육 아니면 민족에 대해 쓸지도 모릅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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