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집] [시] 기록물 12025.06.12 PM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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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 1



증오는 분명, 그날부터였다.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빨갱이들을

베고 찌르고, 베고 찌르고, 베고 찌르고, 베고 찌르고

정신이 들었을 땐 시뻘겋게 절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해도 시뻘겋게 물들 즈음

피비린내 풍기는 녀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나누어준 술을 마시자 금세 취기가 올랐다.

칼날 같던 공기가 한층 누그러들자

어떤 이가 망나니처럼 칼을 휘두르며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럴듯한 말솜씨에 모두가 박수를 보냈지만

떠올려보면 그의 소매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던 듯싶다.


뿌연 먼지가 가라앉고

침묵에 잡아먹힐 적에

늑대가 나타났다.

그래, 늑대가 나타났다.

팔다리를 붙들어매던 망설임을

찢어 내듯 내지른 일성은

도화선을 타고 든 불꽃같아서

어느샌가 무리는 울부짖고 있었다.

터지고, 터지고, 터져서

시커먼 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슴푸레 눈을 떠보니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잔바람에 몸이 덜덜 떨렸고

잔가지에 긁힌 상처가 쓰라렸다.

입술을 옴짝거려 불러보려 했지만

누구도 떠오르지 않아 그만두었다.

생각을 멈추자 다시금 머리가 아파왔다.

어제 마신 술 때문이다.

어쩐지 공짜로 준다더니.

빌어먹을 빨갱이 놈들.


매일 밤 꿈을 꾸었다.

태양을 등진 채 정신없이 뛰어가다

진창에 빠져 푹, 푹 찔리는 꿈.

살갗을 파고들고, 뼈를 으스러트리는 감각에 비명을 질렀다.

계집애처럼 비명을 질렀다.

애새끼처럼 비명을 질렀다.

다 산 노인네처럼 억억거렸다.

그 눈빛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 조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다.


낯선 천장이다.

안개가 낀 듯 뿌옇다.

뜯겨져 나간 듯이 혼란스럽다.

아니, 다시 보니 내 방이다.

천장에 덜렁덜렁 남은 야광 별자리.

벽마다 멋대로 붙이고 간 색색의 참견들.

짜증이 밀려든다.

창문을 닫아도 스며드는 한기처럼.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세면대 가득 물을 받았다.

일렁임이 멈추자 얼굴이 비친다.

구역질이 나와 피를 토하자

그 얼굴이 시뻘게진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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