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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혐오주의* 조엘 피터 웨트킨 (시체 예술가)2011.08.10 PM 02:11
"이 뇌에는 어쩌면 악마의 생각을 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제 판결을 받았고, 지금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어"
- 조엘 피터 위트킨-
사진 자료의 성격상 미성년자의 열람을 금지한다.
[괴담] *혐오주의* 조엘 피터 웨트킨 (시체 예술가)2011.08.10 PM 02:11
"이 뇌에는 어쩌면 악마의 생각을 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제 판결을 받았고, 지금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어"
- 조엘 피터 위트킨-
혹은 토막난 시체, 원숭이, 두개의 성기를 가진 남자, 수염이 난 여자, 박제된 새,
'위트킨이 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어떤 아티스트들보다도 아트 밖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충격적으로 주박시켜 버리는 것이다.
거기에는 깊고 긴밀한 감정의 흐름이 있다.
위트킨은 시대적인 분위기의 불안한 파도를 타고 지금까지 다른 아무도 하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들 자신을 검증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또 '위트킨은 도발적이며 탁월하고 우미한 아티스트다
그는 미래에 가잔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가 사진을 초월해서 다른 미디어에 영향을 주면서
제시한 방향으로 틀림없이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사진가 듀안 마이클의 말도
위트킨을 생각할때 빠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속에서 침잠하는 시대를 통제하는 어둠의 비젼을 시각화하려 한다.
위트킨은 자신의 육체가 모르는 사이에 그를 끌고 들어가는 자기 자신의 어둠,
진정한 어둠의 광채를 보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트킨의 어둠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미를,
어둡게 빛나는 그롯타의 빛을 자신 속에서도 역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위트킨은 부정의 형상을 위해 필름에 스크레치하고, 조각성을 가미함으로써 육체를 더욱 기형화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미적 대상이 아니라 마치 우화나 코미디처럼 읽혀지고, 혹은 드라마나 비극적 서사극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결과물이 되도록 한다. 결국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들을 위해 그는 다양한 오브제, 이미지들을 서로 통합시키고 있다. 과거의 역사, 고대 우화의 잔재, 종교와 무신론, 혹은 이성과 비이성 사이의 이미지들을 오려 내어 역사의 의미를 재해석하려 한다. 이를 위해 신체를 실제적이고 상상적인 결합을 시도한다.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적 경향의 작품이 이렇게 만들어진다. 대상은 욕망과 악몽의 이미지이다. 위트킨은 사건을 목도한 것처럼 이것들을 사진으로 잘 승화시킨다. 그래서 에로틱함과 소름이 동시에 다가선다. 위트킨의 예술 목표는 인간 존재를 위한 우리의 자각을 강조한다. 그의 사진 작업은 자아의 발견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었으며, 그는 자아의 발견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한다.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 위트킨은 이중적 관념, 선과 악, 삶과 죽음의 문제를 투사하려 했다. 위트킨이 선택한 기형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현실적인 삶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하우포토넷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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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l Peter Witkin]
부모님은 형제가 아직 어릴 적에 이혼하였고
그들은 모친의 엄격한 카톨릭의 환경안에서 자라
부친은 정기적으로 양육비를 가지고 나타날 뿐인 존재가 되었다.
위트킨의 반생은, 그 출발점으로부터 결핍이나 상실의 예를 띄고 있다.
위트킨이 6세 때, 그는 강렬한 사건에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형제가 모친에게 이끌려 교회로 향하는 길 위에서 일어난,
차 3대의 연쇄 충돌사고였다.
그는, 옆으로 뒤집어진 차로부터 무엇인가가 굴러 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의 발밑에서 멈추었다. 작은 여자 아이의 목이었다.
그는 몸을 구부려 그 얼굴에 대고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그 전에 누군가에게 제지당해 버렸던 것이라고 한다.
위트킨은16살때 처음으로 카메라를 손에 넣었고, 사진에 관한 몇권인가의 책을 읽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가 강한 관심을 나타낸 것은, 코니 아일랜드의
프릭스쇼(주-서커스 등의 공연시 각 쇼 사이마다 짤막하게 보여주는 흥미거리 쇼.
주로 기괴한 외모의 장애자나 난쟁이 등을 출연시킨다)였다.
그는 그 쇼에 빈번하게 다니며 다리 3개인 남자라던지 난쟁이,
양성구유의 사진을 찍게 된다.
게다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최초의 동정을 바친 상대로서 그 양성 구유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퇴역 후, 그는 쿠퍼 유니온으로 돌아오지만, 이번엔 동양의 신비주의나 명상에 열중하게 되어
인도에 건너가 요가를 배우기도 한다.
그 후, 1974년엔 뉴멕시코 대학에 미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원생으로 지낼 수 있었던 그는,
이후10년 이상 가족과 함께 알바카키에 살며 신비의 베일에 싸인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네거티브(음화)를 문지르고 스크래치 하여 약한 암갈색의 소프트 톤을 내기 위해
인화지에 얇은 티슈같은 종이를 거듭 사용한다는 기교를 쓰고있다.
단지 그로테스크로 생생한 것뿐의 이미지라면 그 자리의 쇼크로만 끝나 버리지겠지만,
고요하게 싸인 그 세상은 우리의 의식 심층에서 움직여,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의 경계에 서서히 흔들림을 가져온다.
"이 세계관에 표현을 주는 상징적 회화 표상이란,
없어진 낙원이며,땅 위의 지옥으로써 세계의 광경이고,
이 세계 속 악의 화신으로써의 여자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