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와 사민주의] 경제민주주의 핵심은 '노동해방'과 '복지국가' 정신2015.06.15 PM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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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프랑스의 총파업 모습(사진=노동자연대)


한국 자본주의의에 대해 비정상성, 봉건성, 전근대성으로 접근하고 그 정상화를 지향하는 것이 진보의 이념적 지향이어서는 안되며, 자본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계급모순과 갈등, 빈부격차 등을 그대로 직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위원장의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3차례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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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 진보진영에서 보편적 복지와 함께 가장 많이 논의되는 화두가 경제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이다. 그리고 경제민주주의란 재벌그룹 개혁(즉 재벌그룹 축소 + 재벌그룹 해체)과 함께 대기업-중소영세기업간의 갑을 관계 개선 + 동반성장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자유주의적 프레임으로 이해된 경제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경제민주주의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그것은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추구하던 소비에트 공화국식의 국가 사회주의화를 반대한다는 맥락에서 제시된 개념이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대표가 자본가들의 대표에 맞서, 미시(기업)와 거시(국민경제), 그리고 메소(산업) 차원에서 노-자간에 일종의 공동통치(협치)의 지배구조(governance structure)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이래 스웨덴과 독일 등 유럽과 그리고 미국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경제민주주의 역시 ‘자본+부르주아’의 일방적-전횡적 지배에 맞서는 ‘노동+무산자’들의 복지권·시민권과 노동권, 노동조합권, 그리고 산업 및 국민경제 전체의 지배구조=통치구조에 있어 노자 공동의 공동 통치 구조를 의미했다. 즉 그것은 총노동 대 총자본간의 대립 전선을 전제하면서 양자간의 공동통치 지배구조 구축을 통해 자본과 유산자들을 압박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개념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서는 총노동 대 총자본 간의 대립전선 개념은 쏙 빠져버리고, 그 대신 대자본 대 중소자본+영세자본간의 대립 전선 개념으로, 즉 자유주의의 프레임으로 전환되어 버렸다. 그리고 경제민주주의 투쟁의 주역은 노동자들(가장 가난한 비정규직 및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 포함)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기업주들(자본가들)이 되어 버렸다.

경제민주주의를 그 본래의 의미로 되돌려야 한다.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은 노동해방과 복지국가이다. 5천만 국민의 대다수인 직장인들, 종업원들, 그리고 영세자영업자들이 꿈꾸는 것은 장시간 근무·노동과 산업재해로부터의 해방, 안정적인 일자리,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 구현, 산별 단체교섭의 법적 의무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을 보장하는 공화국이다. 이렇듯 초보적 단계의 노동해방을 이룩한 그런 민주공화국이 바로 경제민주주의 공화국이다.

담론적 설득력의 한계에 직면한 복지국가 운동

4년 전 무상급식 열풍과 함께 호기 있게 출발한 복지국가 운동은 요즘 침체와 전망 부재의 상태에 빠져있다. 왜 그럴까?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복지재정 즉 증세의 실패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올바른 지적이다.

그런데, 더 깊게 질문해보자. 왜 부자 증세를 비롯한 증세 담론은 대중적 열풍은커녕 대중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을까? 그 여러 이유의 하나는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증세의 관점에는 착취 또는 불로소득에 관한 정치경제학적 관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조세 전문가들은 흔히 부자 증세의 논거로 지불능력론을 제시한다. 부자들은 부유해서, 즉 세금 지불능력이 더 많기 때문에 그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런 논법은 즉각적인 반박에 직면하는데, 부자들의 소득 역시 그들이 ‘땀 흘려’ 획득한 대학 학위와 재산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직위와 자격증으로부터 얻은 소득, 한마디로 말해서 ‘근로 소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듯 피땀을 다해 획득한 소득과 재산에 대하여 고율의 세금을 거두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짓, 남의 것을 강탈하는 사악한 행위라는 반박이 제시되고, 그것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들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과연 이러한 반박에 대해 뭐라고 다시 역공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설득할 것인가?

현재의 복지국가론에는 착취론 즉 불로소득의 정치경제학이 없어

1970년대 영국 노동당은 연간 10억이 넘어가는 개인소득부터는 90%의 세율로 과세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든 선진국(미국, 스웨덴, 독일, 일본 등 모두 포함)에서 소득세 최고 세율은 75~90%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박정희에서 노태우에 이르는 군부 독재 시기에 부자들이 내야할 소득세 최고세율은 75~90%에 달했다. 그리고 그것을 40% 대, 30% 대로 대폭 깎는 부자 감세를 단행한 것이 김영삼 문민정부에 이어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는 이른바 민주정부들이었다.

2008년에 집권한 이명박 정권만 혼자 부자감세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명박 정권은 단지 레이건·부시 공화당, 마가렛 대처 보수당을 흉내 내면서 그것을 32%로 더욱 낮추려 하다가 큰 역풍을 맞았을 뿐이다.

아무튼, 고소득자들에 대한 고율 과세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논거는 본래 ‘불로소득=착취론’이었다. ‘정당한 소득’이란 “자신의 노동과 노력의 댓가”로 얻은 것이어야 하며, 그것을 초과하는 소득은 모두 불로소득인 바, 불로소득이란 결국 타인의 노동과 노력의 성과를 가져가는 것 즉 착취 또는 요행(행운)의 결과일 뿐이며 따라서 국가(그것이 군부독재 국가이건 민주공화국이건)가 환수해서 사회=국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제아무리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개인이라도 타인의 5배, 10배 이상의 소득을 얻는다는 것은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소득은 명백한 착취 또는 불로소득이라고 보았다.

왜 불로소득이 발생하는가?

불로소득론은 ‘착취론=수탈론’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왜 “불로소득의 획득 = 착취”가 발생하는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진보진영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것은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입장이다. 즉 한국 경제에 관한 한, 자유주의의 경제사상이 진보정당(통진당과 정의당, 하물며 노동당도)과 노동운동, 시민운동을 지배하고 있다.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완전 경쟁시장을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며, 완전경쟁시장(그것을 그들은 ‘공정한 시장질서’라고 부르는데)에서는 모든 생산요소(자본, 노동, 토지)가 자신의 가격을 획득하므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소득분배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다만 시장이 왜곡되어(market distortion) 완전한 경쟁적 시장질서가 형성되지 않을 경우 지대(rent)가 발생하는 바, 지대가 바로 불로소득이라고 본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우리나라의 경우 개혁적,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경쟁적 시장질서를 만드는 것이 바로 ‘진보적 과제’이며, 그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재벌그룹 개혁을 통해 경제력 집중을 축소 또는 해체시키고(통진당과 정의당, 노동당의 ‘재벌그룹 해체’ 강령은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테제이다), 중소영세 기업 지원 및 시장 개방(진입 장벽 허물기)이라고 본다.

한편 불로소득에 관한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의에는 헨리 조지 추종자들의 토지 불로소득 논의도 포함되는데, 19세기의 고전파 경제학자인 리카르도(Ricardo)의 연장선에 있는 미국의 경제학자인 헨리 조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착취(불로소득)와는 무관하며 다만 토지 소유만이 불로소득을 발생시킨다고 보았다(이것이 바로 ‘토건족’ 개념의 뿌리인 자유주의 경제사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하물며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노동당 일부와 기본소득론자들마저 헨리 조지의 토지 불로소득론을 인용하면서 이른바 토건족을 비판하는 자유주의 성향을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의 복지국가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침체는 복지국가 담론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 담론(철학과 정치경제학)의 한계이다. 완전경쟁시장(재벌그룹 축소/해체, 토건족 해체,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중소벤처기업 지원 등)을 가장 중요한 경제민주주의 담론으로 내세우는 자유주의의 정치경제학으로 과연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스웨덴 복지국가가 과연 사회민주주의 담론 없이 가능했던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전공 학자들은 압도적으로 “스웨덴 복지국가는 ‘실용주의’(즉 탈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스웨덴 복지국가가 탈이데올로기적 실용주의의 산물이었을까?

예컨대 1930~50년대 사이에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였던 복지장관 구스타프 묄러의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보자. 묄러는 시종일관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를 그 자체 ‘착취’체제라고 파악했으며, 그 착취를 어떻게 하면 ‘점진적으로 폐기’해나갈 것인지를 늘 고민했다. 비그포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묄러가 전개한 보편적 복지론(시민권에 기초한 사회복지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정적 유토피아에 관한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분명 반인간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반생태적인 체제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 정신이 없이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주의·노동해방을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지양은 단지 소유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소득과 투자, 경제민주주의와 노동해방 등 다차원적인 영역에서 진행될 수 있다.

생산수단(즉 기업) 소유의 사회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소득과 투자의 사회화와 노동시장(노동력 시장)의 사회화는 상당 부분 가능하다. 지난 1백년간의 세계 역사 경험은, 그리고 특히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경험은, 자본에 대한 사회화가 다차원의 세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냐 반자본주의냐’라는 흑백논리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보편적 복지와 노동해방-경제민주주의, 생태환경 보존과 남북한 평화공존-평화통일이라는 4대 비전이 실현되는 민주공화국은 100% 반자본주의가 아니며 그렇다고 100% 순수 자본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지만 지옥도 아니다. 적어도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지옥 같은 악질적 자본주의(시장 자유주의)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민주적이며 생태적이고 평화적인 세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궁극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잠정적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리고 앞서 말한 4대 비전을 잠정적 유토피아라고 부르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좌파세력은 궁극적 유토피아가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하고 토론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수천만 국민들이 당장 힘들어하는 일상 생활과는 동떨어진 공허한 토론이 되기 일쑤였다. “우리는 몇 십 년, 몇 백 년 뒤에나 찾아올 유토피아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되새겨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제안한다. 4대 비전과 그 비전에서 비롯되는 아젠다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남쪽에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제시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의 잠정적 유토피아로 삼아, 루소가 말한 사회계약을 맺자. ‘잠정적 유토피아에 관한 사회계약’을 맺는 그런 대안정당을 출범시키자.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한 발짝 전진하는 ‘역사적 진보’이다.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모두가 함께 하는 ‘역사적 블록’의 구축이다. (끝)

댓글 : 2 개
프랑스야 농민봉기로 시작되었으니
사진출처가 노동자연대길레 글도 걔들 글이겠거니 하고 읽다가 뭐지? 얘네답지 않은데? 했더니 역시나 아니었네요 ㅋㅋ 레디앙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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