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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풍자쇼] 어느 안주 포식자의 변명2021.05.28 AM 12:36
어느 안주 포식자의 변명
미필들은 모르겠지만, 의외로 군에서 술 먹을 일이 많아. 대대창설일이니 체육대회니 뭐니 해서 소주가 박스채로 들어오지. (맥주는?) 나도 그게 안타까워. 우리 부대는 오로지 소주뿐이었어. 주임원사님 취향이 그쪽이었걸랑, 꺼흑.
나름 군 생활 알차게 보낸 나지만, 딱 하나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술이야. 그때 뒤지도록 퍼 마셨어야 했는데,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주사는 뭔지 알아뒀어야 하는 건데! (...) 얼마나 좋아. 행패 부린들 민간인에게 폐를 끼치길 하나, 해봤자 평소 서로 갈고 닦은 선후임과 한바탕 하기까지 더 하겠어? (...) 곯아떨어지면 옆에서 부축해 주지, 등 두드려 주지, 그러다 혹시 잘못해서 죽으면 나라에서 보상해 주지. ..잠깐, 보상해 주는 거 맞나? 크흠.
나름 많이 마셨다는 게 2병 반이었어. 전역 17일 앞두고 열린 체육대회, 가는 사람 미리 배웅한다고 다들 한 잔씩 따라주더라. 누군 작은 병에 살포시, 대대장님은 사발에 꾸역꾸역, 와우. ..문제는, 취하지 못 했다! (주량 자랑 하는 거니?) 아니! 안타까워서 그래! 술과 화해할 기회 날린 것 같아서! (뭔 소리야!)
..난 술을 증오했어. 아빠가 취해서 돌아오는 날엔 전쟁이 터졌으니까. 싸움에, 별거에, 이혼에.. 그래서 소년은 다짐했지. 난 절대 술을 먹지 않겠다. 아빠처럼 되지 않겠다. ..집착에 가깝도록 술을 멀리했어. 하, 그럴 수밖에. 모든 매체가 날 압박했거든. 친척은, 우리 집안이 술을 잘해! 선생님은, 나쁜 건 대물림 된답니다. 심지어 교과서조차, 인생은 유전입니다. 이런 데 내가 조심 안 하고 견딜 수 있겠냐고. (...)
갑자기 분위기 심해됐네. 워워, 가볍게 들으시라. ..걱정 마. 지금은 트라우마 탈출했단 말씀! 더 이상 알코올이 두렵지 않아. 왜? 이젠 날 믿거든! 마셔보니 맛이 없어! 소주, 공업용 알코올 왜 먹니? (야!) 맥주? 진짜 오줌 맛 나던데? 응?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지. (미친놈아!) 막걸리니, 위스키니 우웩! 심지어 그 달다는 이마트표 스위트 와인 접해봤지만 전혀 만족 못했어. 그거 마실 시간에 제로 코크 한 잔 더 하겠다!
그래, 술의 노예가 되기엔 내 미각이 너무 뛰어났던 거지. (...) 사실, 더 큰 이유. 제대로 마시는 친구들을 경험했기 때문이야. 즐겁게, 적당히, 술잔에 사이다 부어도 상관하지 않는 친구! ..닫혔던 맘이 슬금슬금 풀렸어. 술, 너 천하의 나쁜 놈은 아니구나?
물론 지금도 술을 좋아하진 않아. 누가 사준다 하더라도 거부해. 근데 술자리는 좋아한다? 그곳에 안주가 있으니까! 남들 마시고 떠들 때, 하나라도 더 처먹는 일념으로, 캬하하! (민폐네!) 아니! 이게 무슨 민폐야! 그럼 초대를 하지 말던가! ..꺼흑. 사실 점점 저녁에 부르질 않아. 술 먹겠다 싶으면 먼저 들어가래. 이게 친구들이냐!
후우, 농담, 아니 진담이고.. 고맙다, 이것들아! 족발 사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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