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002018.09.10 AM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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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말

~ 호겐(保元) 원년(1156) 7월에 발발한 호겐의 난(保元の乱), 그리고 3년 뒤인 헤이지(平治) 원년(1159) 12월에 발발한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라는 명칭은 일본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호겐의 난은, 치천의 군주(治天の君)라 불리우는 토바 호코(鳥羽法皇)의 죽음을 계기로 발발 했다. 왕가의 스토쿠 죠코(崇徳上皇)와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 셋칸케(摂関家)의 칸파쿠(関白)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와 사다이진(左大臣) 요리나가(頼長)의 각 형제, 그리고 카와치 겐지(河内源氏) 쪽인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 요시토모(義朝) 부자,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쪽인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와 숙부인 타다마사(忠正)가 각각 적대한 골육상쟁으로, 고시라카와와 타다미치, 요시토모, 타이라노키요모리가 승리하였고, 스토쿠는 유배, 요리나가는 패사(敗死), 그리고 타메요시나 타다마사는 300년만에 부활 한 사형에 처해지기에 이르렀다. 

 한편, 헤이지의 난은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의 근신(近臣)인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와 호겐의 난에서 승리한 미나모토노요시토모가 타이라노키요모리의 쿠마노(熊野) 참배를 틈 타 신제이(信西)를 살해 하였으나, 귀경 한 키요모리에게 패배, 요리노부가 처형당하고, 요시토모 이하 카와치 겐지 이치몬(一門)은 거의 전멸하여, 키요모리가 정치적 지위를 눈에 띄게 상승시킨 사건이다. 

 이렇게 써보면, 억지로 인명 암기를 해야했거나, 또는 시험에서 인명을 잘 못 적어낸 암울한 기억을 떠올릴 분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병란(兵乱)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강한 개성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삶, 갈등을 살펴보면, 무미건조한 암기물과는 전혀 다른 사극(史劇)이 전개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두 사건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긴 하지만,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몇가지 수수께끼가 남겨져 있으며, 또 그 의미나 실태도 재고 해봐야 할 점이 다수 존재 하고 있다. 

 먼저, 매우 소박한 의문부터 시작 해보도록 하자. 어째서 호겐의 난에서는, 당시까지의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의 정변(政変)과 달리 무력(武力)이 사용되었던걸까? 그것은 무사들이 대두 했기 때문.... 이라는 걸로는 해답이 되지 못 한다. 애당초 무사의 본격적인 성립은 10세기 전반인데, 아직 무사들이 없었던 나라시대(奈良時代) 이전의 정변은 대체로 무력으로 결착을 맺었고, 패배자는 처형당하거나 하지 않았는가? 요리나가보다 앞서서 오오오미(大臣)가 정쟁(政争)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례는, 텐표호지(天平宝字) 8년(764)의 에미노오시카츠(恵美押勝)의 사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텐노(天皇)와 죠코(上皇)가 유배를 당한 선례도, 오시카츠와 함께 실각 한 쥰닌 텐노(淳仁天皇)이다. 

 그런데, 헤이안시대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다이도(大同) 5년(810)의 헤이제이 텐노(平城天皇)의 난(이른바 쿠스코의 변)을 경계로 해서 마치 헤이안쿄(平安京)가 안정되었다는 것과 궤를 같이 하듯, 정쟁은 궁정 내부의 음모라는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 셋칸 정치(摂関政治)의 성립기에 수많은 정쟁이 발생했는데, 패배자는 음모에 의해 실각하였고, 사태는 신하의 유배로 종결되었다. 셋칸이라는 지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에서도 -후지와라노미치나가(藤原道長)와 조카인 코레치카(伊周) 같은-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이 거듭 되는 무력 항쟁으로 전환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원인을 단순히 무력의 유무(有無) 등으로 귀결시킬 수 있을 리가 없다. 거기에는, 커다란 정치 구조의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왕가, 셋칸케, 무사에게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적류(嫡流)를 둘러싼 격렬한 내분이 야기되어 서로에게 증오심을 부채질 해가면서 호겐의 난에 말려들었다. 일찍이, 골육상쟁의 배경으로서, 이 시대의「도덕적 퇴폐(頽廃)」같은 식의 설명 등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이 배경에는, 인정기(院政期)를 무사 등의 중세 봉건적인 세력이 충분한 세력을 갖지 못 하고, 의연하게 인이나 대규모 사원 등의 고대적 세력이 쇠퇴했으면서도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부폐한 시대로 보는 낡은 역사관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인정기야말로 장원(荘園), 공령제도(公領制度)가 확립 된 중세의 성립기... 즉, 새로운 시대가 열린 획기적인 시기라 여기고 있다. 거기에, 귀족과 무사가 대립하여 후자가 전자를 극복 한다고 하는「발전단계설」이「금과옥조(金科玉条)」의 자리를 잃은 지금, 도덕적 퇴폐 같은 초역사적 이유로는, 이 시대 특유의 현상을 설명하기가 곤란해졌다.

 셋칸 정치와 인정의 정치 구조의 변화, 그것을 전제로 하여 분립 한 다양한 정치 세력이 격렬한 골육상쟁을 펼치면서, 무력 항쟁으로 돌입 한 원인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무사가 등장한 것에 대해서는, 단순히 치안이 악화 되어 폭력이 횡행, 자력구제(무경찰 사태)가 일반화 하여 무사가 대두 했다는 식의 설명으로 끝맺음 하는 서적도 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최근의 코치 쇼스케(河内祥輔) 씨의 저서『保元の乱・平治の乱(호겐의 난・헤이지의 난)』에서는, 이어진 헤이지의 난과 발맞춰, 각 텐노나 인이 자신의 황통(皇統)에 고집해 내분을 일으킨 점이 강조되어 있다. 텐노와 인의 의지만으로 주변이 움직이고, 내란도 야기되었다는 이해는, 그야말로 텐노나 인이 역사의 중심에 있었으며, 신하나 백성들은 거기에 따를 뿐이라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텐노나 인이었다고 해도, 정치적 활동을 전부 개인의 의지나 판단 만으로 행할 수는 없다. 황위 계승 문제도 포함해서, 그 배후에 있는 각종 정치 세력의 지원이나 이해(利害)를 반영한다는 것은 정치사(政治史) 이해의 기본일 것이다.

 역사의 동인(動因)을 개인의 기대나 자의(恣意)로 환원 하는 단락적이고 평판한 시각으로는, 호겐의 난, 나아가서는 헤이지의 난의 진상을 해명 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확실히 코치 씨의 서적은, 호겐, 헤이지의 난에 관한 과거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 하여, 사실을 확정하고자 하는 야심작이다. 평가받아야 할 점도 있어 그 의도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앞서 말 한 점도 포함해서, 결론에는 아무래도 고개를 끄덕이기가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호겐의 난으로부터 3년 뒤에 발발 한 헤이지의 난은, 무사를 주인공으로 한 병란이라 여겨진다. 귀족이 원인을 제공하고 무사가 해결 한 호겐의 난과 비교해서, 헤이지의 난에서는 무사인 타이라노키요모리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의 대립이 원인을 제공했던 것 처럼, 무사의 세력 신장이 명백하다... 라는 식의 서술을 지켜 보려는 분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말 할 수 있을까? 

 헤이지의 난에서는 신제이나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 이외에도 후지와라노츠네무네(藤原経宗), 후지와라노코레카타(藤原惟方) 같은 니죠 텐노(二条天皇)의 측근들이나, 미나모토노모로나카(源師仲), 후지와라노나리치카(藤原成親) 같은 고시라카와인의 측근 같은 수많은 귀족들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신제이와 노부요리라는 인의 근신들끼리의 상호간의 대립에, 무사인 키요모리, 요시토모의 대립이 연결되어 난이 발발 했다고 하는... 네 사람의 행동으로 사건을 다루는 마작 같은 단순한 공식은 재고 해 봐야 한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호겐의 난에서 후지와라노요리나가가 전군을 지휘하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헤이지의 난에서도 노부요리는 직접 무장을 하고 전투에 가담하고자 했다. 무사와 귀족은 명확하게 구분이 되고, 대립하면서 무사가 귀족을 차츰씩 타도 해 간다는 견해조차도 재검토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兵範記(효한키)』라는 꽤나 확실한 일기가 존재 하는 호겐의 난과 비교해, 헤이지의 난의 기본 사료는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에 작성된『愚管抄(구칸쇼)』나『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가 있다. 특히 후자의 작위(作偽)에 대해서는 국문학에서의 연구를 통해서도 밝혀져있다. 또, 전자에 대해서도, 셋칸케... 특히 타다미치를 변호 하는 자세가 명백하며, 연대적으로도 크게 차이가 나는 책이니만큼, 전면적으로 의거하기는 곤란하다.

 다만, 여기서도 귀족과 무사의 대립, 혹은 무사들의 주도권, 그리고 키요모리가 승리 할 수 있었던 필연성 같은 통설적 이해의 범위를 배제하여, 난의 의미를 재검토 해보고 싶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 서서, 두 난과 관계 된... 너무나도 개성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도록 서술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역사적 인명은 단순한 부호(符号)가 아니다. 특이한 개성의 융합과 반발이 생각지도 못 한 역사를 만들어냈음을 말 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角川ソフィア文庫 발매, 元木泰雄 저,『保元・平治の乱 ~平清盛勝利への道~』을 번역한 글입니다. 문제가 있을 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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