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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012018.09.10 PM 12:09
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一. 왕가의 내분
◇ 살아있는「현군(賢君)」
~ 재상경 준비를 보인 헤이시 이치몬(平氏一門)을 미나모토노요시츠네(源義経)들의 활약으로 타도 한 이치노타니 전투(一ノ谷合戦)가 끝나고, 입경 가능성은 저하되었지만, 헤이시가 여전히 야시마(屋島)를 거점으로 하여 제해권(制海権)을 장악하고 있던 겐랴쿠(元暦) 원년(1148) 여름, 우다이진(右大臣)인 후지와라노카네자네(藤原兼実)는 측근인 후지와라노노리스에(藤原範季)로부터 어떤 인물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賢君の真跡を見せしむ。現存の条、これをもって証となす。言うなかれ、言うなかれ。天下の昔にかえること、ただこの秋にあるものか。ただしなお信を取り難きことか】 (『玉葉』六月二十九日条)
카네자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현군(賢君)」이 아직 살아계시며, 그가 천하를 옛날로 돌려놓았다고 일기에 기록 하고 있다. 이 현군은 대체 누구일까?
이미 죽었다고 여겨졌으면서도, 그 사실이 의심스러웠던 텐노(天皇)라 하면, 쿄(京)에서 죽은 인물일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현군이라 칭송받고, 내란 중에 그 시대를 되돌릴 텐노라면 스토쿠(崇徳) 이외에는 생각 할 수가 없다. - 때마침 함께 사료를 살펴봐주셨던 우와요코테 마사타카(上横手雅敬)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물론, 이것은 이른바「뜬소문(浮説)」에 지나지 않는다. 스토쿠가 이미 죽었다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또, 치천의 군주(治天の君) 고시라카와 호코(後白河法皇) 아래에서,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에 의한 법황(法皇) 유폐라는 정변이 발발 한 데다, 미나모토노요시나카(源義仲)의 입경이나 겐페이 쟁란(源平争乱)이 극에 달해있었다는 것을 상기(想起)하면, 고시라카와를 부정하고 그의 형을 앞세운다는 사상이 등장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카네자네의 누이인 코카몬인(皇嘉門院)은 스토쿠의 중궁(中宮)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죽은지 이미 20년이 지났어도 더욱 더 현군이라 칭송받고, 유력한 공경(公卿)에게 추모되고 있다는 것은 심상찮은 일이다.
스토쿠가 추모를 받은 원인 중 하나는, 쿄로의 복귀를 이루지 못 하고 쵸칸(長寛) 2년(1164)에 사누키(讃岐)에서 죽은 억울함을 애도 하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사료된다. 거기다, 지쇼(治承)・쥬에이(寿永)의 내란에 돌입 하기 직전인 안겐(安元) 3년(1177), 고시라카와와 타이라노키요모리가 대립하던 중, 쿄에서 엔랴쿠지 강소(延暦寺強訴)가 미친 듯이 날뛰고, 공전절후의 대화재가 다이리(内裏)나 귀족의 저택 등... 수도에 있는 시가를 태워버렸다. 스토쿠의 원령(怨霊)이 혼란을 야기했다는 설이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었다 한다. 쿄라는 왕권의 무대의 동요가, 고시라카와의 왕권과 첨예하게 대립 하고 있던 스토쿠 원령설을 낳은 것도 당연했다. 그에 이어 격해지는 동란 속에서, 스토쿠의 원념이 사람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는 것은 의심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다. 역시나 그가 토바 인(鳥羽院)의 적자였고, 또, 퇴위 후인 텐요(天養) 원년(1144)에 여섯번째 칙선 와카슈(勅撰和歌集)『詞花和歌集(시카와카슈)』의 편찬을 명해, 백인일수(百人一首)에도 채택 된「瀬をはやみ岩にせかるる滝川の われてもすえにあはんとぞ思ふ」라는 와카로도 알려져 있듯이, 자신도 와카를 잘 지어 카단(歌壇)의 중심에 서는 등... 현군이라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는 본래의 제왕학을 익히고 있었다는 것, 거기에 그가 추모를 받은 원인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현군」이라는 평가는,「흑백을 구분 할줄 모른다」고 조차 혹평을 받았고, 사실 그의 통치하에 대혼란을 일으킨 고시라카와와의 대비가 원인인 면도 있다. 고시라카와는 와카도 신통치 않았고, 제왕으로서의 문화적 소양에도 결여되어 있었다. 게다가 중요한 정무(政務)에서도, 퇴위 익년에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 발발 한 것을 시작으로, 타이라노키요모리, 미나모토노요시나카와 충돌하여 재삼 유폐당한다거나, 쿄의 치안을 악화시키는 등.. 적어도 결과로서 실패만 이어졌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왕가의 적자로서, 교양면에서도 뛰어난 스토쿠가 황통으로부터 소외받고,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는 제왕으로서의 권위도 뒤떨어지는 동생 고시라카와와 대립하다 패배 하여 험한 꼴을 당했다는 것은, 역시나 당시의 귀족들에게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스토쿠는 배척당한걸까? 그리고, 호겐의 난에서 패배 할 수 밖에 없었던걸까? 죽은지 20년이 지나도 추모 받을 법 한 인물이 배척당한 배경에 대해 일단 검토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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