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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022018.09.11 AM 01:37
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一. 왕가의 내분
◇ 스토쿠(崇徳)의 비극
~ 에이지(永治) 원년(1141) 12월 7일, 츠치미카도도노(土御門殿)에서 스토쿠 텐노(崇徳天皇)에서 양자인 나리히토 친왕(体仁親王: 코노에 텐노)으로의 양위가 진행되었다. 바로 그『愚管抄(구칸쇼)』에서 지엔(慈円)은 말 한다. 그 센묘(宣命)에「皇太子(황태자)」라 되어 있어야 할 부분이「皇太弟(황태제)」라 나와 있었기 때문에,「コハイカニト又崇徳院ノ意趣ニコモリケリ(스토쿠인이 토바 죠코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사태가 벌어졌다... 라고.
나리히토는 인(院)의 근신인 곤노츄나곤(権中納言) 故후지와라노나가자네(藤原長実)의 딸인 토쿠시(得子: 비후쿠몬인)를 모친으로 호엔(保延) 5년(1139)에 태어나 이때는 막 세 살이 되었을 때다. 나가자네는 곤노츄나곤 자리에까지 이르렀다고는 해도, 원래는 즈료층(受領層)에 속한 인의 근신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모친의 신분이 갖는 관계로 인해 스토쿠 텐노의 중궁(中宮)인 후지와라노세이시(藤原聖子)의 양자로서 양육되었다. 따라서, 양자라고는 해도 나리히토는「황태자」였어야 했다. 후술하겠지만, 인정(院政)을 행하는 게 가능했던 죠코(上皇)는, 텐노의 직계존속(直系尊属)으로 한정되어 있어 아직 스물세 살인 스토쿠가 양위에 응한 것도, 장래의 인정을 약속 받았기 때문이나 다름 없었다.
성인을 맞이 한 텐노가 양위 한다는 것 자체는, 이미 토바(鳥羽) 자신이 경험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스물한 살 때인 호안(保安) 4년(1123), 조부인 시라카와인(白河院)의 지시에 의해 아직 다섯 살이던 스토쿠에게 양위했다. 인에게 있어서 성인을 맞이 한 텐노가 존재 하면, 텐노의 정치 개입을 초래 하여 인정을 계속 하는 데에 지장이 된다. 따라서, 성인 텐노의 즉위는 인정기(院政期)의 관례라 해도 좋다. 텐노의 양위, 후계 텐노의 결정 등은 텐노의 인사권을 장악 한 치천의 군주(治天の君)가 생각 한 대로였다. 문제는, 속임수에 의해 스토쿠의 인정을 저지했다는 점에 있다.
인정이라는 것은 텐노를 배출 한「집안(イエ)」, 왕가의 가장인 아버지 인... 즉, 치천의 군주가 텐노를 시작으로 하는 인사권의 장악을 통해, 정무(政務)를 농단 하는 정치체제이다. 황위 결정을 할 때에 외척이나 모후(母后) 이하, 텐노의 미우치(身内)들이 큰 권한을 보유한 셋칸시대(摂関時代)와는 이런 점에서 크게 다르다. 유력한 외척이 없던 고산죠 텐노(後三条天皇)가, 엔큐(延久) 4년(1072) 12월, 스스로 시라카와 텐노(白河天皇)에게 양위함과 동시에, 그의 동생인 사네히토 친왕(実仁親王: 요절)을 토구우(東宮)로 세운 이래 아버지 인이 독자적으로 황위를 결정하게 되었고, 이어진 시라카와 텐노의 양위가 인정 성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버지 인이 황위를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은 부권(父権)에서 유래한다. 그런 탓에, 인정이 가능한 것은, 선술한대로 텐노의 직계존속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권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게 된 당시, 아버지 인은 강대한 권력과 권위를 갖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 하자면, 텐노 이하의 인사권을 배경으로, 실질적인 정무의 주도권이나 호쿠멘(北面) 이하의 무력(武力) 등을 치천의 군주가 한손에 장악한 것이었다. 여기에 반해 치천의 군주가 아닌 죠코에게는, 아무런 권력도 권이도 없었다. 따라서, 센묘의 속임수가 사실이었다고 한다면, 스토쿠의 인정이라는 꿈은 산산조각이 되어 날아가버렸다는 뜻이 된다.
어째서 토바인은 스토쿠에게 잔혹한 짓을 한걸까? 그 배경에는, 스토쿠의 모친이자 토바의 중궁이었던 타이켄몬인(待賢門院)... 즉, 후지와라노쇼시(藤原璋子)와, 그녀의 시아버지이자 토바의 조부이기도 한 시라카와인과의 밀통에 대한 소문, 그리고 스토쿠의 출생과 관련 된 의문이 가로 놓여 있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즉, 카마쿠라시대의 설화집인『古事談(코지단)』에 수록된 유명한 설화에 따르면, 시라카와인은 유자(猶子)로서 토바에게 출가 한 쇼시와 밀통을 이어왔다는 것 때문에, 토바는 스토쿠를 시라카와인의 자식이라 보고「오지고(叔父子)」라 칭하며 기피했다고 여겨진다.
물론 오늘날에 진상을 알 방법은 없다. 다이지(大治) 4년(1129)에 시라카와인이 죽은 뒤, 즉시 스토쿠를 퇴위시키지 않았던 것, 스토쿠의 자식인 시게히토(重仁)가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자였다는 것 때문에, 토바인의 스토쿠 출생에 대한 의혹이 당초부터 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혈연관계를 실증 할 수 없었던 당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상당한 근거의 존재를 의미하며,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하물며, 부자관계를 권위의 원천(源泉)으로 보는 인정에 있어서, 친자가 아니라 여겨진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커다란 타격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토바가 스토쿠의 인정을 저지하여 그의 자손이 황통을 계승하기를 거부한 원인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 할 바가 없다.
이렇듯, 황위 계승은 선대인 치천의 군주의 기대나 자의(恣意)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따라서, 인정은 셋칸시대 처럼, 외척을 시작으로 하는 미우치들의 공동정치와는 성격이 크게 달랐다. 거기에, 왕가 계승의 불안정함이 존재했고, 두 번에 걸쳐 인정을 부정당한 스토쿠의 비극이나, 호겐의 난(保元の乱)의 원인(遠因)도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토바인은 양위 문제 이후에도 스토쿠의 병문안을 가는 등... 표면적으로는 가장으로서 너그러운 태도로 대했다. 스토쿠가 특별히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했다. 하지만, 양자의 마음 속 갈등은 어떠했을까? 사실, 이로부터 14년 뒤에 코노에 텐노(近衛天皇)가 요절했을 때, 토바는 재차 스토쿠의 인정에 대한 바람을 꺾어버렸다. 단순히 출생의 비밀이라는 문제를 뛰어넘는 기피의 원인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또, 어떠한 정치적 이해(利害)가 내포되어 있었다고 생각 해야 할 것이다.
그건 둘째치고, 강제적 퇴위와 속임수를 목격 한, 스토쿠를 애워싸고 있는 세력의 격분은 심상치 않았던 부분이 있었다. 스토쿠의 모친인 타이켄몬인의 측근인 미나모토노모리유키(源盛行)와 무녀(巫女)인 스자쿠(朱雀) 부부는, 발 빠르게도 익년 정월이 되자 셋츠노쿠니(摂津国) 히로타샤(広田社)에서 토쿠시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원인이 되었고, 타이켄몬인은 강제 출가로 내몰리게 된다. 또, 타이켄몬인의 근친이자 당시의 조정에서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있던 칸인류 후지와라(閑院流藤原) 씨 출신 공경들은, 온갖 핑계를 대며 정무 보기를 내팽겨치고 있어, 사건의 파문이 얼마나 컸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움직임도 표면적으로는 진정화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 불만은 정계의 저류(底流)로서 잠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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