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032018.09.12 AM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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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一. 왕가의 내분

 

◇ 인(院)의 근신들의 대두

~ 나리히토 친왕(体仁親王)의 모친인 토쿠시(得子)의 가계(家系)는 스에시게류(末茂流)라고 하는... 후지와라 홋케(藤原北家) 중에서도 방류(傍流)에 속하며, 셋칸시대(摂関時代)까지는 보잘것없는 즈료(受領)를 배출 하는 정도로 신분이 낮은 가문이었다. 공경(公卿)으로까지 도달하지 못 했고, 대체로 4위, 5위를 상한선으로 하는 귀족 가문을 두고 쇼다이후층(諸大夫層)이라 칭했다. 그런데, 그녀의 조부인 후지와라노아키스에(藤原顕季)가 시라카와인(白河院)의 메노토고(乳母子)였던 관계로 인(院)의 근신으로서 급속도로 대두하였고, 시라카와인의 외척인 칸인류(閑院流) 출신인 후지와라노사네스에(藤原実季)의 양자가 되어 결국에는 공경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아들인 나가자네(長実), 이에야스(家保) 모두 인의 근신으로서 활약, 대국(大国)의 즈료를 역임 하면서 공경으로 승진했다. 

 역사학의 개념으로서의 인의 근신이라는 것은, 이 스에시게류 처럼 셋칸시대까지는 중, 하급 귀족이었다가, 인에게 발탁되는 것에 의해서 급속도로 높은 정치적 지위를 얻은 존재를 말 한다. 물론, 셋칸을 시작으로, 초기의 시라카와인의 인정을 지탱한 다이고 겐지(醍醐源氏) 출신인 미나모토노토시아키라(源俊明) 등... 전통적인 상류 공경 가문에 속한 공경들 중에서도 인을 가까이서 모셨던 자는 적지 않다. 하지만, 이것과 인의 근신은 역사적 성격을 달리 하는 것으로, 구분해서 생각 해야 한다.

 인의 근신들 대부분은, 인의 사적인 행사를 담당하는 인노쵸(院庁)의 4위 벳토(別当)에 취임하였고, 태반은 즈료로서 활약 한 뒤에, 만년에 가서야 히산기(非参議: 종 3위 이상이긴 하나 아직 산기로 임관 하지 못 한 이를 가리킨다) 종 3위로서 공경 자리의 말석을 차지한다는 경력을 거치게 된다. 최고의 격식을 자랑하는 -바꿔 말 하자면 가장 수입이 많은 대국인 하리마(播磨)나 이요(伊予)를 시작으로 하는 부유한 나라들(당시의 말로 표현 하면 쥿코쿠)의 즈료를 역임하여 인에게 관직과 맞바꿔 경제 봉사를 행하여 성공 하는 데에 매진했다. 인정기에 활약 한 즈료층은, 이 스에시게류 이외에도, 후지와라 홋케 출신인 요시카도류(良門流), 미치나가(道長)의 형인 미치타카(道隆)의 자손으로 노부요리(信頼)를 배출 한 미치타카류(道隆流), 홋쇼지(法勝寺) 조영에서 활약 한 타메이에(為家) 등이 배출 된 타카시나(高階) 씨, 그리고 무문(武門)으로서 유명한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등이 있다.   

 이러한 가문들은 모두 인정기에 들어서면서 메노토고 관계나 장원 기부를 시작으로 하는... 시라카와, 토바인(鳥羽院)들과의 개인적 연고를 통해 등용된 존재로, 셋칸시대의 즈료와는 면면을 달리 하고 있다. 인의 근신의 즈료는, 결코 셋칸시대로부터 존속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인이 독자적으로 육성시킨 존재들이었다.

 한편, 인의 근신들 중에는 벤칸(弁官), 쿠로도노토(蔵人頭) 같은 실무관료직을 역임 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에 즈료에도 취임하긴 했지만, 역임 하는 나라의 수가 적어서 후반생은 오로지 실무관료로서 활약 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라카와인의 근신인 후지와라노타메후사(藤原為房) 계통이다. 특히, 타메후사의 아들인 아키타카(顕隆)는, 시라카와인의 중대한 정무 결재를 보임했다. 

 예를 들자면, 호안(保安) 원년(1120)에 칸파쿠(関白) 후지와라노타다자네(藤原忠実)가 시라카와인에게 사실상 파면당했을 때, 인은 타다자네의 숙부인 이에타다(家忠)가 후계 칸파쿠로서 어울리는지를 아키타카에게 질문했다. 이때, 아키타카의 반대로 이에타다의 칸파쿠 취임은 소멸되었다. 아키타카의 권세는『中右記(츄유키)』에「천하의 정무는 이 한 사람의 말에 달려있다」라고까지 칭해지는 것을 통해서도 명백 하다 말 할 수 있다.『今鏡(이마카가미)』의 잘 알려진 기사에 따르면, 밤동안 인고쇼(院御所)에서 실질적으로 정무 결재를 맡았던 그는,「밤의 칸파쿠」라는 이름을 자칭하고 다녔다 여겨진다. 가계는 다르지만, 신제이(信西)도 본래 이 실무관료계 근신에 속한다.

 그들은 신분은 낮았어도 유능했기에, 인이 마음 먹고 발탁시킴에 따라 정치의 중추에 관여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정이 신분 질서를 타파하여, 인재를 등용 한 측면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은, 머리가 굳은 상류 귀족들로부터도「뛰어난 신하(良臣)」라는 식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 

 그런데, 대국의 즈료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다. 토쿠시의 부친인 나가자네가 쵸쇼(長承) 2년(1133) 8월에 죽었을 때, 우다이진(右大臣)인 후지와라노무네타다(藤原宗忠)는「쇼다이후(諸大夫)는 츄나곤(中納言)에 오르는데 대게의 경우 재능과 지혜가 있어 타이벤(大弁)에 임명된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여직 나곤(納言)에 오르지 못 하느니」라며 매도 했을 정도다. 그런 무능한 인물에게 즈료 근무를 하게 하는 것은 이상하다 생각되지만, 즈료의 실무는 다이칸(代官)으로서 현지로 파견 되는 모쿠다이(目代)가 담당 하고 있어, 유능한 모쿠다이가 있기만 하다면 문제는 없었던 것이다. 실무관료계와 대국즈료계의 가계는,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어찌됐든, 인은 인의 근신을 정치, 경제적인 기반으로서 중시했다. 특히 남색(男色)도 포함해 인격적, 정보적인 주종관계로 포섭당해 마음 가는대로 부려먹는 게 가능했던 인의 근신들은, 인의 전제정치를 지탱하는 존재였기에, 인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된다. 인의 근신 가문 출신인 토쿠시가 토바인의 총애를 받은 것도, 그러한 풍조와 무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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