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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072018.09.16 AM 12:16
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二. 셋칸케(摂関家) 분열
◇ 쿠게(公家)・부케(武家)・지샤(寺社)
~ 일본의 중세시대는 세 개의 커다란 세력이 상호 보완 해가면서 하나의 지배조직을 형성 하고 있었다 여겨진다. 그 세 개의 세력이라는 것은 쿠게(公家)와 부케(武家), 그리고 지샤(寺社) 세력이다. 부케만을 중세적 세력이라 보고, 남은 두 세력을 고대적인... 극복 해야만 할 존재로 보는 단순한 견해는, 오늘날 거의 모습을 감췄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히 쿠게라 하면 유약했고, 그런 탓에 몰락을 여의치 못 했다고 하는 인상이 여전히 남아있는 듯 한 면이 있다. 하지만, 아직 공무(公武)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인정기(院政期)에는, 쿠게에게도 부케와 공통되는 성격이 현저하게 발견된다.
부케와 쿠게... 즉, 황족이나 귀족을 구분 하는 한가지 지표가 되는 게, 자력구제(自力救済)와 공적인 법(法)의 세계로부터 자립한 독자적인 법권(法圏)의 존재일 것이다. 설화 세계(説話世界)에 대한 이야기지만, 셋츠노쿠니(摂津国) 타다노쇼(多田荘)를 개척한 미나모토노미츠나카(源満仲)는, 그 땅에서 수렵을 하고 살면서, 그와 동시에 낭도들에 대한 사형(死刑)을 포함해, 엄격한 사형(私刑)을 전문으로 했다고 한다. 또 토고쿠(東国)에서는, 무사들이 사적인 전투에 매진하고 있어서 살해나 약탈도 꺼리낌 없이 저질렀다. 이렇듯, 쿠게 사회와 다른 독자적인 법이나 질서를 가졌다는 점에, 자력구제적인 세계를 살아간 무사의 특색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실은 인정기의 셋칸케에도 이러한 측면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료가 남겨져 있다. 요리나가의 일기인『台記(타이키)』 큐안 3년(1147) 10월 24일 조의... 다음의 기술을 처음으로 봤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禅閤、法橋寛誉を殺す。世もって刑罰法にすぐるとなす】
젠코(禅閤)란 출가하기 전 칸파쿠였던 타다자네를 가리킨다. 홋쿄(法橋)라 하면 승강(僧綱: 승려들을 통솔하는 직책)의 일원, 칸요(寛誉)의 부친은 공경(公卿)인 오오쿠라쿄 후지와라노타메후사(大蔵卿藤原為房), 그런 출신 가문도 뛰어난 고승을, 타다자네는 사적인 처형으로 살해 해버렸다는 뜻이다. 당시, 사형은 공적인 귀족 사회에서는 행하지 않아서, 주위에서 떨어져 있는 무사의 영지에서 사적으로 치러졌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귀족... 그것도 정점에 선 셋칸케에서... 게다가 고승에게 사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칸요는 본래 타다자네 밑에서 사원 내부의 통제를 보좌하는 승려였다. 사형에 처해진 원인은 불명이지만,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처형당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코후쿠지 승려에 대한 사형, 유배를 독자적으로 행했다는 점에서, 무사와 공통되는 중세적 권문(権門)으로서의 셋칸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타다자네가 기용한 악승 신지츠는 야마토 겐지(大和源氏) 출신으로, 어쩌면 무사로서의 실력을 배경으로 내부의 통제를 단행한 것이라 생각된다. 우지노쵸쟈(氏長者)는 악승에게 영지 급여나 안도(安堵)도 행하고 있어, 양자는 그야말로 영지를 매개로 통합되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 위급해졌을 때, 텐노를 등지고 요리나가를 위해 봉기한 신지츠들의 모습에, 은혜와 봉공 관계를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 통제를 위한 무력이 된 타메요시 이하의 무사들도, 후술 할 장원의 아즈카리도코로(預所)로의 보임 같은 영지 급여나, 관직 추천 등을 받음과 동시에, 타다자네의 가산기구(家産機構)를 이용하여 무사단을 조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사로서의 존립기반도 셋칸케에 의존하게 되어서, 단순한 용병 같은 존재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한편, 타메요시의 봉사 내용도, 타다자네, 요리나가의 신변 경호에 머무르지 않고, 앞의 악승 통제나 사후(伺候)하는 무사단에 대한 단속, 거기다 자원의 수확 등 다방면에 걸쳐 타다자네의 가정적 경찰력(家政的警察力)이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특히, 셋칸케령(領) 장원 관리에 있어서, 카와치 겐지(河内源氏) 출신 무사들은 필수 존재가 되어 갔다. 그야말로, 타다자네와 타메요시 이하는 긴밀한 주종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귀족과 무사의 주종관계라 하면 기묘하게 여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형(私刑)의 모양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귀족과 무사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양자의 간격이 강조된 배경에는, 귀족과 무사는 계급이 다르다고 하는 고정관념이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귀족, 무사가 명확하게 구분 된 것은, 긴 전란을 거친 뒤의 일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셋칸케는 오오토노 타다자네를 정점으로 하여, 귀족은 물론이고, 무사나 악승도 주종관계로 조직한 정치세력이 되어 있었다. 이것을「복합 권문(復合権門)」이라 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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