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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102018.09.20 AM 12:02
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三. 무사의 세상, 전야(前夜)
◇ 요시토모(義朝)와 토고쿠(東国)
~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는 코지(康治) 원년(1142) 무렵에야 겨우 서작(叙爵)을 받았다. 종 5위하라고 하는「귀족(貴族)」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이 역시 오오토노(大殿)인 후지와라노타다자네(藤原忠実)의 지원이 도움이 되었던 듯 하다. 이 무렵의 타다자네에 대한 타메요시의 충성스러운 모습은, 실로 눈 부셨다.
동년 8월에는 선술 한대로 코후쿠지(興福寺)의 악승(悪僧)을 오슈(奥州)로 유배를 보냈다. 명목상으로는 칸파쿠(関白) 타다미치(忠通)의 명령이었지만, 물론 실제로 이 명령을 내린 것은 타다자네. 코후쿠지에서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악승 신지츠(信実)의 반대파를 숙청하는 게 목적이었다. 익년 6월에는, 타다자네를 모시는 무사들끼리의 다툼을 진정시켰고 10월에는 텐노지(天王寺)로 참배를 간 타다자네, 요리나가(頼長)의 경호를 맡았다.
그렇게 봉사한 보람이 있었는지, 타메요시는 큐안(久安) 2년(1146)에 에후(衛府)로 복귀하여 통상의 사에몬노쇼죠(左衛門少尉)가 아니라, 이례적인 사에몬노타이죠(左衛門大尉)로 취임했다. 즈료(受領)를 받는 것도 눈 앞이었다. 적자가 되었으면서도 살인범을 감춰준 대물림 된 실책으로 토구우타테와키센죠(東宮帯刀先生)라는 지위가 흔들리고 있던 요시카타(義賢)도, 코지 2년(1143)에 노토(能登)에 있는 장원(荘園)의 아즈카리도코로(預所)로 보임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몸과 마음 모두」요리나가의 심복이 된다. 큐안 4년 정월 5일, 요리나가는 다음과 같은 기술을 일기인『台記(타이키)』에 남겼다.
【今夜、義賢を臥内に入る。無礼に及ぶも景味あり(不快ののちは初めてこの事あり)】
[오늘밤, 요시카타를 침소에 들였다. 난폭하게 굴었지만 나름의 맛이 있었다(불쾌함 뒤에는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었다)]
남색(男色)은 무사 사회에서 만연하고 있었는데, 그 배경에는 앞에서도 다뤘던 인격적 결합(人格的結合)이라고도 칭해지는 주종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경우는 쿠게(公家)와 무사라고는 해도, 요리나가와 요시카타의 관계에도 그러한 요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반해 폐적당한 요시토모(義朝)는 셋칸케(摂関家)와 무연(無縁)했을까? 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의 활동에 셋칸케는 깊이 관계하고 있었다. 요시토모는「카즈사조시(上総曹司)」라 칭해졌듯이, 일단은 타이라노타다츠네(平忠常)의 자손 카즈사노스케 츠네즈미(上総介常澄)에게 받아들여진 듯 하지만, 동씨족은 단순히 11세기 전반에 타다츠네가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선조인 요리노부(頼信)에게 종신한 이후의 케닌(家人)이라는 게 아니었다. 셋칸케령(領)인 스고노쇼(菅生荘)의 장관(荘官)이었던 것이다.
결국 요시토모는 미우라(三浦) 씨와 제휴한다. 에이지(永治) 원년(1141)에 미우라 요시아키(三浦義明)의 딸 사이에서 장남인 요시히라(義平)를 얻었으며, 카마쿠라(鎌倉)에 있는 「타테(楯: 저택)」에도 거주한다. 이 미우라 씨의 본령(本領)인 미사키노쇼(三崎荘) 역시 셋칸케령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요시토모는 차남인 토모나가(朝長)를 사가미(相模)의 호족이자 쿄에서도 활동하고 있던 하타노 토오요시(波多野遠義)의 딸과의 사이에서 얻었는데, 이 하타노 씨도 셋칸케령인 하타노노쇼(波多野荘)의 장관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시토모와 제휴하여 그 메노토(乳母)를 배출 한 나카무라(中村) 씨도 셋칸케와 관계가 깊은 하야카와노쇼(早河荘)의 장관이었다. 그야말로, 셋칸케의 가산기구(家産機構)에 둘러싸인 채로 요시토모는 동쪽으로 내려갔다는 뜻이 된다.
카와치 겐지와 토고쿠 무사라 하면, 마치 수많은 무사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후다이(譜代)인 인격적 주종관계가 있었다는 듯이 설파되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라고 해야 할 존재가, 하타노 씨의 선조인 사에키 츠네노리(佐伯常範)이다. 그는 30년이나 요리요시(頼義)에게 임관하였고, 젠쿠넨 전투(前九年合戦)에서 요리요시가 전사했다는 오보(誤報)를 듣고 순사(殉死)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는 후지와라노히데사토류(藤原秀郷流)에 속하며, 본래는 재경 군사귀족이었다. 그런 그가, 셋칸케령인 하타노노쇼의 장관으로서 내려간 것이니, 요리요시와의 주종관계는 재경 중에 형성되었다는 뜻이 된다. 또, 그 주종관계도 겐지가 모셨던 셋칸케의 가산기구를 매개로 한 것이라 생각된다.
카즈사노스케, 미우라, 나카무라 등의「후다이」낭도도, 셋칸케의 가산기구에 의존하여 주종관계가 계속 되었다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카와치 겐지와 토고쿠 무사의 결합은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셋칸케 가산기구에 의존 한 것이었으며, 그 범위도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에 주의 해야 한다.
카즈사노스케 츠네즈미와 손을 잡은 요시토모는, 츠네즈미 일족인 치바 츠네시게(千葉常重), 츠네타네(常胤) 부자를 압박하여 그들의 영지인 소마노미쿠리야(相馬御厨)를 분할한다. 이는 시모우사노카미(下総守)로서 소마노미쿠리야 탈취를 꾀했던 후지와라노치카미치(藤原親通)를 배제하고 츠네즈미와 츠네시게들을 조정한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대립하는 무사단을 조정하는 상위 권력... 바꿔 말하자면 쇼군 권력(将軍権力)의 원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배경에는, 카와치 겐지의 무문(武門)으로서의 권위나, 풍부한 전투, 전술지식 등... 전통적인 무위(武威)도 존재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관위(官位)가 바닥을 치고 있던 타메요시나 무관(無官)인 요시토모의「권위」만으로 조정이 실현될 수 있을 리가 없다. 치카미치가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의 딸인 코카몬인(皇嘉門院)을 모셨던 인시(院司)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배제 하려 했을 때에, 타메요시가 모시던 셋칸케의 최고 실력자인 타다자네의 지원이 상정된다.
그 뿐만은 아니다. 미우라, 나카무라 씨나 모쿠다이(目代)와 손을 잡은 요시토모는, 텐요(天養) 원년(1144)에 인접하는 오오바노미쿠리야(大庭御厨)에 난입하여, 오오바(大庭) 씨의 굴복과 관아령(国衙領)의 확대를 꾀했다. 여기에도, 미우라, 오오바, 두 씨족의 조정이라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모쿠다이와 연계하듯, 타다자네와 손을 잡은 토바인(鳥羽院) 근신인 사가미노카미(相模守) 후지와라노요리노리(藤原頼憲)의 지원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쿄에서 쫓겨난 요시토모는, 토고쿠에서 몇년간 거주하게 된다. 카와치 겐지의 무장으로서 장기간 칸토(関東) 남부에 거주하며 거점을 형성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의 활동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어서, 훗날의 요리토모(頼朝)의 기반을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요시토모의 배경에 셋칸케령의 확대, 안정... 또는 토바인 관계자의 지행국(知行国) 지배 강화 같은 목적으로, 타다자네나 인의 지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요시토모는 중앙의 권위에 의존해서 무사단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탓에, 중앙의 정세의 변화와 함께, 그의 정치적 입장도 변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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