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122018.09.21 PM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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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三. 무사의 세상, 전야(前夜)

 

◇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의 동향

~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 무사 일족의 내분은 무엇보다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비슷한 사태는 이세 헤이시(伊勢平氏)나, 미나모토노요리모리(源頼盛), 요리노리(頼憲) 형제가 분열한 타다 겐지(多田源氏) 등에서도 발견된다. 교과서 등에서도 익숙한 것으로는 이세 헤이시에서의 키요모리(清盛)와 숙부인 타다마사(忠正)의 분열일 것이다. 이 문제를 다뤄보기 전에, 인정기(院政期)에서 최대의 무문(武門)인 이세 헤이시에 대해 잠깐 다뤄보고 싶다. 

 이세 헤이시는 칸무 텐노(桓武天皇)로부터 시작 된 칸무 헤이시(桓武平氏)의 이치몬(一門)으로, 타이라노마사카도(平将門) 추토의 입역자인 타이라노사다모리(平貞盛)의 아들인 코레히라(維衡)가 이세(伊勢)에 거점을 쌓은 것에 기원을 갖고 있다. 셋칸시대(摂関時代)는 카와치 겐지 앞에서는 존재감이 희박했었지만, 선술한대로 키요모리의 조부인 마사모리(正盛)가 시라카와인(白河院)의 호쿠멘(北面)에 가담하여 카쇼(嘉承) 3년(1108)에 카와치 겐지 출신인 요시치카(義親)를 토벌한 뒤로, 쥿코쿠(熟国)의 즈료(受領)를 역임하는 등 급속도로 지위를 향상시켰다. 

 마사모리의 아들인 타다모리(忠盛)도 시라카와, 토바(鳥羽) 두 인(院)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즈료를 역임함과 동시에, 텐쇼(天承) 2년(1132)에는『平家物語(헤이케모노가타리)』를 통해서도 알려진대로, 승전(昇殿)을 허락받은 텐죠비토(殿上人)라는 특권을 획득한다. 또, 거듭된 해적 추토 등을 통해 세토우치(瀬戸内) 방면에 세력을 침투시켰다. 선술한 토바인정기에 있었던 코후쿠지(興福寺)의 강소(強訴) 때는, 타다모리가 호쿠멘군의 중심이 되어 방어를 담당했다. 그야말로 타다모리는 군사, 경제면에서 인정의 대들보를 지탱하는 존재였기에, 그것을 이야기 하듯, 그의 관위(官位)도 공경(公卿)을 목전에 둔 정 4위상 교부쿄(刑部卿)에 이르러 있었다.

 큐안(久安) 3년 6월, 기온샤(祇園社)에서 키요모리 일행이 지닌(神人)과 난투를 벌여 기온샤의 혼죠(本所)인 엔랴쿠지(延暦寺)로부터 타다모리, 키요모리 부자의 유배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단호하게 거부 하며 강소를 저지하려는 토바인의 자세도 있어서, 생애 최대의 위기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토바인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결과가 되었다. 

 닌페이(仁平) 3년(1153) 정월, 타다모리는 58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가 죽었을 때에, 사다이진(左大臣)인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일기에 남겼다.


数国の吏を経て、富は巨万を累ね、奴僕は国に満ち、武威は人にすぐ。しかるに人となり恭倹、いまだかつて奢侈の行いあらず、時の人、これを惜しむ】 (『宇槐記抄』仁平三年正月一五日条)


 이세 헤이시는 이가(伊賀), 이세에 있는 본령(本領)을 중심으로 키나이(畿内)나 그 주변, 세토우치에서 높은 무명(武名)을 떨치고 시라카와, 토바인정기에서 최대의 군사 귀족으로서 호쿠멘의 중심적 존재이며, 동시에 즈료로서도 가장 유력한 인의 근신의 일원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부친의 사후, 뒤를 이은 키요모리는 서른여섯 살의 장년... 정 4위하일 때에 이미 승전을 허락받기도 했기에, 아키노카미(安芸守)라는 대국의 즈료에 올라있었다. 또, 동생인 요리모리(頼盛), 노리모리(教盛)도 각각 히타치(常陸), 아와지(淡路)의 즈료가 되어 이치몬의 즈료는 무려 3개 국에 달했다. 토바인의 신임도 두터워, 그 지위는 반석처럼 보였다. 

 잘 알려진대로, 당주인 키요모리와 적대하고 있던 것은 숙부인 타다마사였다. 타다마사는 오래전부터 타다자네, 요리나가를 모시고 있었고, 우지(宇治)에 저택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아들인 나가모리(長盛)가 스토쿠(崇徳)의 쿠로도(蔵人)라는 입장이라, 스토쿠, 요리나가 쌍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스토쿠들의 진영에 가담한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런데, 소설『新・平家物語(신・헤이케모노가타리)』의 모두(冒頭)에서,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는 젊은 키요모리가 부친인 타다모리의 명령으로 타다마사에게 가서 빚진 돈을 갚는 인상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어쩌면,『平家物語(헤이케모노가타리)』의「사이코키라레(西光被斬)」에서 보이는, 시시가타니 사건(鹿ケ谷事件)에서 사로잡힌 사이코(西光)의 키요모리에 대한 갖가지 욕설에 젊은 날의 키요모리가 출사(出仕)도 못 한 채였다는 것 등을 통해 촉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타다마사는 우마료(右馬寮)의 차관인 우마노스케(右馬助)에서 해임된 뒤에는 관직에도 오르지 못 한 모양새로, 재력면에서는 대국의 즈료를 역임 한 형 타다모리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탓에,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와 마찬가지로, 셋칸케에 의지했던 것이다. 따라서, 타다마사는 헤이지 이치몬 중에서도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이세 헤이시의 내분의 규모는 카와치 겐지에 비하면 훨씬 작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키요모리에게도 스토쿠와의 인연이 있었다. 그의 계모(継母)이자 타다모리의 정실(正室)이었던 후지와라노소시(藤原宗子: 훗날의 이케젠니)가, 스토쿠의 황자인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의 메노토(乳母)였다. 시게히토 친왕은 아직 스토쿠가 재위 중이었던 호엔(保延) 6년(1140)에 태어났기에, 이 시점에서는 왕가의 적자로 봤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토바인의 근신으로서 커다란 세력을 갖고있던 타다모리의 아내가 메노토로 간택받은 것도 당연했다.

 메노토라는 관계는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진다. 물론, 소시는 키요모리의 친모가 아니다. 하지만, 선대인 가장이 죽으면, 가장의 정실은 가장에 준하는 무게를 지닌다고 여겨진다. 그런만큼 키요모리도 소시의 의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소시와 시게히토 친왕과의 관계가, 난이 발발하기 직전의 키요모리의 행동을... 그리고 난 그 자체의 움직임을 규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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