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132018.09.22 PM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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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一. 정계의 격변

 

◇ 모순(矛盾)이 드러나다

~ 대로(大路)와 면해있는 유력자 저택의 문 앞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니시야마 료헤이(西山良平) 씨의 지적에 따르면, 당시의 관례로서, 문 앞에는 그 저택의 연장선이라고 해야 할 성격이 있어 무례한 태도를 취한 자는 엄벌에 처해지게 되었다 한다. 그곳을 신분이 낮은 자가 무례하다 여겨진 타카아시다(高足駄: 굽이 높은 나막신)를 신고서 지나가면, 사형(私刑)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닌페이(仁平) 원년(1151) 7월, 토바인(鳥羽院)이 가장 총애한 츄나곤(中納言) 후지와라노이에나리(藤原家成)의 저택 문 앞을 타카아시다를 신고 지나가려 한 두 명의 조시키(雑色)가 저택 안으로 끌려들어가 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다. 이 두 조시키는 다름 아닌 사다이진(左大臣)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를 모시던 이들로, 그들에 대한 폭행은 보복의 구실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요리나가의 조시키들임을 안 이에나리는 즉시 범인을 내놓고 공순(恭順)의 뜻을 내비쳤으나, 아니나 다를까... 요리나가는 보복에 나섰다. 9월 8일, 황후(皇后) 타시(多子)의 고쇼(御所)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요리나가는 가신을 이에나리의 저택에 난입시켜 저택을 파각(破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이 사건 이래 토바인은 요리나가를「ウトミオボシメ(소외시키고자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정정(政情)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요리나가가 이에나리의 저택을 파각해버린 배경에 대해『구칸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일찍이 인의 근신에게 폭행을 가한 요리나가 때문에 괴로워하던 부친 타다자네(忠実)가「カクアシクトモ家成ナドヲバエセジ物ヲ(제아무리 요리나가가 거칠다 해도, 인의 총신인 이에나리에게는 손을 댈 주제가 못 된다)」라며 야유한 적이 있었다. 요리나가는 여기에 화가나 결국 이에나리의 저택 파각을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 마치 불량청소년의 행동 같지만, 요리나가를 매도하려는『구칸쇼』의 기술인 만큼, 어디까지 진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불명확하다. 

 적어도 전년의 입궐 문제로 비후쿠몬인(美福門院)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만큼, 뇨인(女院)과 손을 잡은 이에나리와의 구렁이 깊어져 있었던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에나리는 정 2위 츄나곤이라는 인 근신으로서는 파격적인 출세를 한 상황이었기에, 묵묵히 토바의 총신으로서 커다란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 앞 장에서 말한대로 뇨인의 권위를 이용하여, 여러 나라에 대량의 장원(荘園)을 구축 해 두고 있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장원 집적(集積)을 꾀하다 셋칸케(摂関家)와의 대립을 심화시킨 원인 중 하나다. 어찌됐든, 사건의 배경에는 타다미치(忠通)를 포함한 비후쿠몬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셋칸케의 중심인 요리나가의 대립, 모순의 격화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보복을 위한 습격은, 그야말로 자력구제(自力救済)의 세상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무력(武力)을 축적하여 중세적 변용을 달성한 귀족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투가 일상다반사인 반도(坂東)와는 달리, 쿄(京)에서 자력구제적인 행동이 용인되었을 리가 없다. 이 사건으로 토바인의 불신을 초래했다는 것은, 요리나가에게 있어서 훗날에 커다란 문제를 가져다주게 된다. 타다미치는 사건 직후에 즉시 타다자네, 요리나가가 텐노(天皇)의 즉위를 꾀하고 있다고 주상하여, 인의 요리나가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 하려 했다. 

 부친인 타다자네가 토바인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있었던 만큼, 인과의 관계가 눈에 띄게 악화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리나가에게 있어서 보다 심각했던 것은, 겐푸쿠(元服)를 한 코노에 텐노(近衛天皇)가 노골적으로 요리나가에 대한 혐오를 보였다는 것이다. 익 닌페이 2년 정월 초하루, 요리나가가 공경(公卿)들을 인솔하여 텐노에게 정월 인사인 코쵸하이(小朝拝)를 하려 했을 때, 텐노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타다자네, 타다미치 쌍방에게 케이시(家司)로서 임관하고 있던 타이라노노부노리(平信範)는,「사후(左府: 요리나가)께서 머리가 너무 높으셨던 탓인가」라며 추측하고 있다. 텐노와 요리나가가 사이가 안 좋아졌다는 소문은 사람들 사이에서 확산되어 갔다. 

 그해 10월 1일, 시라카와이즈미도노(白河泉殿)로의 카타타가에교코(方違行幸)가 치러졌을 때의 일이다. 불참하게 된 칸파쿠(関白) 타다미치를 대신해 사다이진 요리나가가 우차(牛車)에서 내리는 텐노의 옷자락을 잡아주려 했을 때, 텐노는 이를 뿌리치고 스스로 옷자락을 걷으며 고쇼(御所)로 들어갔다고 한다. 두 사람의 불화는, 온갖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노부노리는「천하의 대사건이 여기서 벌어졌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양자의 험악한 관계는 이미 중대한 정치 문제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이때, 요리나가는 토바인에게 뭔가를 호소했다고 한다. 필시 코노에 텐노에 대한 중재를 의뢰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에나리 습격 사건에 이은 사랑 하는 아들의 혐오는, 토바인의 마음에 요리나가에 대한 불신감을 키워가게 했을 것이다.

 

 해가 바뀌자, 아직 열다섯 살인 코노에 텐노는 시력이 현저히 저하되었다가 병석에 눕게 된다. 왕가의 정통을 이어가야 할 텐노의 중병은 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져, 정국(政局)을 크게 전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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