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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182018.09.27 PM 11:52
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二. 치천의 군주의 사망
◇ 토바인(鳥羽院)의 임종
~ 7월 2일 신각(申刻: 오후 4시 무렵), 토바인(鳥羽院)은 토바(鳥羽)의 안라쿠쥬인고쇼(安楽寿院御所)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쉰네 살.『兵範記(효한키)』의 당일 기록에 따르면. 발병은 5월 22일이었다고 한다. 이후 약 1개월 남짓한 투병생활이었다.
임종 직전, 스토쿠인(崇徳院)은 토바인 곁을 찾아갔으나, 대면하지는 못 했다. 아버지 인과 화해 할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겠지만, 결국엔 그걸 실현시키지 못 한 것이다.『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스토쿠를 안내한 자도 없었던 모양이다. 토바인이 위급하다는 보고를 듣고 몰려온 우차(牛車)나 말들로 혼란하던 중, 쿠로도(蔵人) 타이라노노리이에(平範家)가 스토쿠가 탄 우차와 조우, 그 종자가 던진 돌에 맞아 황급히 내리려다 눈꺼풀에 부상을 입는 소동도 일어났다. 토바인은 총비(寵妃)인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의 딸로부터 그 사건을 전해들은 직후, 일단 눈을 크게 부릅뜨고 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덧붙여,『古事談(코지단)』에 따르면, 중태에 빠진 토바인은 측근인 후지와라노코레카타(藤原惟方)에게, 자신의 유해를 스토쿠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실이라 친다면, 스토쿠를 이렇게까지 기피한 인의 격심한 증오를 이야기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코레카타는, 당시 곤노우쇼벤(権右少弁), 5위 쿠로도, 우에몬노곤노스케(右衛門権佐)라는... 다이죠칸(太政官), 텐노 주변, 케비이시(検非違使) 쪽의 실무를 담당하는 세 역직을 겸임한... 이른바 삼사겸대(三事兼帯)의 능리로, 후술할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 된다.
이리하여, 스토쿠는 결국 토바인과 화해할 기회를 영원히 잃었다. 그것은 동시에, 스토쿠나 요리나가(頼長)를 억제할 존재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구칸쇼』에 따르면, 중태에 빠진 토바인은,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을 모후(母后)로서 칸파쿠(関白) 타다미치(忠通), 오오오미(大臣) 이하가 한 마음으로 지지해줘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한다. 즉, 비후쿠몬인은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의 모후로서 왕가 가장의 지위에 올라, 아버지 인의 부재로 약체화 한 왕가의 결속을 꾀했던 것이다. 스토쿠에 대한 억압이나 다름 없었다.
[자신의 아내와 조부인 시라카와 텐노 사이에서 태어난 스토쿠 텐노를 아들로 여기며 살아야 했던 토바 텐노]
확실히, 외척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셋칸시대(摂関時代)였다면 외척이나 그 일족에게 둘러싸인 모후는 강대한 권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스자쿠 텐노(朱雀天皇)에게서 무라카미 텐노(村上天皇)로의 양위를 실현시킨 후지와라노온시(藤原穏子)나, 미치나가(道長)에게 나이란(内覧)을 내려주었다고 여겨지는 이치죠 텐노(一条天皇)의 모친인 센시(詮子)는 그 대표격인 여성이었다. 모후에게는, 텐노나 셋칸을 결정할 강대한 인사권이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엔 그러한 권한은 아버지 인에게 일원화(一元化)해있어, 모후의 연고자들이 고위고관을 차지해 권력을 쥘 수 없는 상태였다. 하물며, 신분이 낮은 인의 근신 가문 출신인 비후쿠몬인에게 왕가의 가장으로서의 역할 같은 건 바랄 수 없었던 것이다.
셋칸시대와 달라진 점으로는, 황통으로부터 소외당한 죠코(上皇)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셋칸시대에서는, 유력한 외척과 대립하다 자신이 황위에서 쫓겨난다거나, 그 자손이 황통으로부터 배제된 죠코가, 재차 정치의 중심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미치나가의 부친인 후지와라노카네이에(藤原兼家)에게 황위를 빼앗긴 카잔 호코(花山法皇)처럼, 풍류나 신앙의 세계에서 남은 생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역대 텐노들 중에서, 칙선 와카슈(勅撰和歌集)에 가장 많은 노래를 남긴 스토쿠에게는 어울리는 생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게 그러한 풍류로 가득한 은둔 생활은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황통을 벗어나, 임시로 출가하려 해도, 유력한 황자라도 있다면 인정(院政)은 가능했다. 정당한 황위계승자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에게 만에 하나의 사태라도 생긴다면, 스토쿠 죠코가 치천의 군주로서 부활 하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 황위 결정은 아버지 인에게 일원화되어 있었고, 아버지 인이 죽은 뒤에 후계자가 죽는다던가 하는 불의의 시태가 발생한 경우에는, 무력에 의한 황위 탈취 가능성도 생겨버리는 것이다.
선술했듯이, 고산죠 텐노(後三条天皇)에 의해 황위계승자로 결정된 사네히토 친왕(実仁親王)이 죽은 뒤, 스케히토 친왕(輔仁親王)에게 계승되었어야 할 황위는 시라카와(白河)에 의해 그 아들인 호리카와(堀河)에게 주어졌다. 이후, 시라카와, 호리카와, 그의 아들인 토바와 스케히토파와의 사이에서 첨예한 대립이 생겼고, 토바 텐노는 미나모토노타메요시 이하의 무사의 경호를 필요로 해, 결국에는 텐노 암살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번에는 정당한 황위계승자의 즉위를 기다리지 못 하고 아버지 인이 서거, 중간다리로서 권위가 모자란 텐노가 남겨졌다. 반대파의 준동(蠢動)은 당연히 예상되었으리라 생각되낟. 그런 탓에, 비후쿠몬인 측에 의해 스토쿠는 상당히 위험한 존재가 되었고, 그를 억제하고 있던 토바가 죽은 지금은 이미 주살해야 할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셋칸시대는, 텐노가 외척에게 둘러싸여 있어, 왕권의 중심이 될 인물도 복수 존재했다. 이러한 안정된 시대와 달리, 왕가 가장인 아버지 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던 인정기(院政期)는, 아버지 인의 죽음과 함께 권력이 눈에 띄게 불안정해져, 폭력이 드러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적대자를 주살한다고 하는... 나라시대(奈良時代) 이전에나 볼 법한 극심한 대응이 생겨난 원인이 있었다.
주살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타다자네, 요리나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셋칸케 주류라는 권위와, 셋칸케의 막대한 가산과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불안정한 고시라카와와 칸파쿠 타다미치가 구성한 왕권에서는, 그 억압이 곤란했음이 예상된다. 그리고, 그들을 타도하는 데에는, 토바인 사후의 혼란과 장례로 정치활동이 억제되어 있는 지금 뿐이었다. 왕권을 둘러싼 격렬한 항쟁, 그리고 강대한 무력을 품은 권문의 타도. 여기에, 무사를 결집하여 무력에 의한 정변이 발발한 커다란 원인이 있었다.
황위를 유지, 일단은 국가 권력을 장악한 고시라카와 진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커다란 불안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타이라노키요모리 이치몬(一門)의 동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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