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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192018.09.29 PM 01:31
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二. 치천의 군주의 사망
◇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의 동향(動向)
~ 토바인(鳥羽院)의 장례는 인(院)이 서거한 호겐(保元) 원년(1156) 7월 2일 유각(酉刻: 오후 8시 무렵)부터 토바(鳥羽)에서 치러졌다. 수행한 이는 사다이죠(左大将)이자 토바인의 측근이었던 후지와라노킨노리(藤原公教). 그리고, 그것을「검지(検知)」한 이는 토바인의 심복이자 킨노리의 딸을 장남인 토시노리(俊憲)의 아내로 맞이해 있던 신제이 뉴도(信西入道)였다.
토바인의 유해는, 인이 생전에 지명해둔 여덞 명의 역인(役人)들에 의해 관(棺)에 안치되었다. 인은 유조(遺詔)에서「연(縁)」의 유무(有無)를 따지지 말고,「은혜(恩)」를 입은 자를 역인으로 기용할 것을 명하고 있다. 혈연관계보다도, 근신(近臣)으로서의 주종관계를 중시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미우치관계(身内関係)가 결정적인 의미를 지녔던 셋칸시대(摂関時代)에서, 주종관계가 중심이 된 인정기(院政期)로의 변화가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역인은 모두 인을 가까이서 모셨던 근신들이었는데, 출가한 신제이 이외에는, 모두 토바인의 인노쵸(院庁)의 4위 벳토(別当)나 호간다이(判官代)를 맡고 있었다. 그 면면들은, 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 후지와라노노부스케(藤原信輔), 카즈사노카미(上総守) 미나모토노스케카타(源資賢), 이요노카미(伊予守) 타카시나노모리아키(高階盛章), 우마노카미(右馬頭) 후지와라노노부타카(藤原信隆), 이즈모노카미(出雲守)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 사쇼죠(左少将) 후지와라노나리치카(藤原成親), 우에몬곤노스케(右衛門権佐) 후지와라노코레카타(藤原惟方), 그리고 신제이였다.
이들 중 노부스케와 노부타카는 부자지간으로, 인의 근신이었던 후지와라노미치타카류(藤原道隆流)에 속해 있었다. 미치나가(道長)와 격렬하게 대립하여 후에 다자이노소치(大宰権帥) 재임 중에 토이(刀伊)의 입관(入冠)을 격퇴한 것으로 알려진 무인 공경(武人公卿) 후지와라노타카이에(藤原隆家)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노부타카의 딸인 쇼쿠시(殖子)는 고토바 텐노(後鳥羽天皇)의 모친이며, 그 동생인 보몬 노부키요(坊門信清)는 외척으로서 나이다이진(内大臣)으로까지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의 주모자인 노부요리(信頼)도 미치타카류였는데, 그의 계통과는 노부스케의 조부 대에 갈라졌다. 나리치카는 알려진대로 시시가타니 사건(鹿ケ谷事件)의 주모자 중 한 사람으로 살해당한 인물로, 선술한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의 사촌형제인 이에나리(家成)의 셋째 아들이며 노부스케의 외손자에 해당한다.
후지와라 씨 이외의 면면들 중, 미나모토노스케카타는 우다 겐지(宇多源氏) 출신으로, 부친인 아리카타(有賢) 대부터 인의 근신으로 활약했다. 동시에 사이바라(催馬楽) 등에도 뛰어났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는 고시라카와(後白河)의 측근이 되어『梁塵秘抄(료진히쇼)』편찬에 참가하기도 했다. 타카시나노모리아키는 홋쇼지(法勝寺) 조영(造営)으로 유명한 타메이에(為家)의 증손자로, 이요(伊予)라는 최고 격식을 가진 즈료(受領)가 되어 있었듯, 대국 즈료를 역임한 가문 출신이다. 미나모토노미츠야스는, 토바인의 총비(寵妃)인 토사노츠보네(土佐局)의 부친으로, 미나모토노요리미츠(源頼光)의 계보를 잇는 미노 겐지(美濃源氏)에 속하는 호쿠멘(北面)의 무장이었다. 그는 딸의 연고(縁故)로 무문 겐지 출신들 중에서 최고위인 정 4위하로 승진해,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에 필적하는 위계(位階)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대부분 즈료를 역임하고 있었던 데에 반해, 코레카타는 쿠로도노카미(蔵人頭)나 벤칸(弁官) 같은 실무관료로서 활약한 타메후사류(為房流)에 속했으며, 부친은 토바인의 오른팔이라고도 해야 할 아키요리(顕頼), 조부는 시라카와인(白河院)의 정무 결재를 보좌하여「밤의 칸파쿠(関白)」라는 이명(異名)을 얻은 아키타카(顕隆)였다. 당시, 토구우다이죠(春宮大進)라는 지위에 있었으며, 토바인으로부터 특별히 황태자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의 측근으로 선발된 인물이다.
이렇듯, 입관역에는 토바인의 인정기 말기를 지탱한 주요한 인의 근신들이 나란히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키요모리, 요리모리(頼盛) 같은 헤이시 이치몬(平氏一門)의 면면들이 보이지 않은 게 특히나 눈에 띈다. 역시나, 소시(宗子)가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의 메노토(乳母)였기 때문에, 스토쿠(崇徳) 측과의 연결고리를 경계받고 있었으리라. 토바인이 살아있던 중인 6월 1일에, 유력한 군사 귀족들이 인고쇼(院御所), 다이리(内裏)의 경호에 동원되었을 때에도, 헤이시 이치몬은 제외되어 있었다. 최대의 무문인 그들의 귀추가 명확하지 않게 되고, 정세는 예측불허의 사태에 내몰려 있었다.
그것이 크게 변화한 것은, 3일 후인 5일이다. 이 날, 쿠로도 미나모토노마사요리(源雅頼)가 고시라카와 텐노의 칙명을 얻어, 케비이시(検非違使)들을 소집, 쿄(京) 안에서의 무사의 움직임을 정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여기서 동원된 케비이시는, 사에몬노죠(左衛門尉) 타이라노모토모리(平基盛), 우에몬노죠(右衛門尉) 타이라노코레시게(平惟繁), 미나모토노요시야스(源義康)였다.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모토모리가 바로 키요모리의 차남이었다. 여기에 이르러, 결국 키요모리 일족은 고시라카와 진영에 참진했으리라 생각된다.
『兵範記(효한키)』에 따르면, 이러한 무사들은「죠코(上皇), 사후(左府)의 도신(同心)으로서 군(軍)을 일으켜,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 봉사했다」라는 소문에 대응하기 위해 동원되었다고 한다. 헤이시의 참전으로 결정적 우위에 선 고시라카와 진영이, 스토쿠, 요리나가(頼長)를 명확하게 도발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서는, 키요모리가 비후쿠몬인으로인해 소집되었다고 나오는데,『愚管抄(구칸쇼)』에서는 소시가 요리모리에게 키요모리와 협력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시게히토 친왕의 메노토인 소시의 친자식은 요리모리 뿐이었기에, 타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 씨의 지적대로, 스토쿠와의 연고에 의해 참전해야 할 진영을 고르지 못 하고 망설이고 있었던 것은 키요모리가 아니라 요리모리였으리라 생각된다. 키요모리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에 준하는 권위를 가진 소시나 요리모리와의 분열, 적대를 회피하기 위해 자중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여기서, 고시라카와 진영의 무력은 완전히 갖춰지게 되었다.
토바인이 살아있던 중인 6월 1일에 인의 명령을 유력 군사 귀족들이 동원된 데에 이어, 고시라카와 측은 7월 5일에 케비이시, 그리고『호겐모노가타리』만의 기술이긴 하지만,「여러 나라의 사이리(宰吏), 병사를 진군시켰다」라고 나와있는 것 처럼, 여러 나라의 관아(国衙)에서 조직되어 있던 지방 무사를 동원했다. 이는, 큐안(久安) 3년(1147)에 타이라노타다모리(平忠盛), 키요모리 부자의 유배를 요구한 엔랴쿠지 강소(延暦寺強訴)를 억제하려 했을 때에 취해진 동원령과 비슷한데, 인정기에 있어서 대규모 강소 등에 대응하기 위한 공적동원 형태(公的動員形態)이다. 특히 케비이시, 여러 나라의 무사의 동원은, 텐노가 통솔하는 국가기구를 매개로 한 것이었기에, 텐노라는 입장을 최대한으로 살린 동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케비이시는 이미 토바인의 인정기 때부터 수도 내부의 경비라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고있었던 데에 지나지 않아, 호겐의 난에서도 난의 발발 전에 쿄에서의 무사에 대한 단속을 행하는 데에 머물렀다. 또, 여러 나라의 무사들에 대해서는 활동의 실태도 상세하게 알 수 없다. 헤이시 이치몬과 왕가의 구성원과의 개인적인 결합을 통해 내려린 판단이, 난의 귀추를 결정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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