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202018.09.30 PM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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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二. 치천의 군주의 사망

 

◇ 요리나가(頼長)에 대한 도발

~ 케비이시(検非違使)들은 동원된 다음날인 6일, 조속히 히가시야마 호쥬지(東山法住寺) 부근에서 무사를 체포했다. 사로잡힌 이는야마토 겐지(大和源氏) 출신의 무장인 우노 치카하루(宇野親治)로, 그는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의 케닌(家人)이었다.『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서는, 영지인 야마토노쿠니(大和国) 우노(宇野)에서 상경하려던 것을 타이라노모토모리(平基盛)에게 추포되었다고 하는데,『兵範記(효한키)』에 따르면 요리나가의 케닌이 쿄(京)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에「너무나도 수상쩍다」라는 이유로, 이유를 묻기 위해 추포되었다 한다. 그야말로「예방구금(予防拘禁)」이기에, 요리나가 일파에 대한 도발이라 보는 하시모토(橋本) 씨의 판단에 따라야 할 것이다.

 야마토 겐지는, 그 유명한 미나모토노미츠나카(源満仲)의 차남으로 후지와라노미치나가(藤原道長)로부터「살인의 달인」이라 야유받았던 요리치카(頼親)의 자손에 해당한다. 요리치카, 요리후사(頼房) 부자가 코후쿠지(興福寺)와의 항쟁에 패배해 유배되었고, 야마토 최대의 권문(権門)인 코후쿠지의 군문(軍門)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야마토노쿠니 안에서 세력 확대는 거의 마무리 지은 상태였다. 요리후사의 아들인 요리토시(頼俊)는 무츠노카미(陸奥守)로 재임 중이던 엔큐(延久) 2년(1070), 고산죠 텐노(後三条天皇)가 칸무 텐노(桓武天皇)를 흉내낸 것이라 여겨지는 오랑케 토벌을 기획했을 때, 키요하라(清原) 씨와 함께 무츠 북쪽의 정벌을 행하였으나, 재청 관인(在庁官人)의 반항 등으로 조정의 은혜를 받지 못 했다. 그의 아들인 요리하루(頼治)는 카호(嘉保) 2년(1095) 칸파쿠(関白) 모로미치(師道)의 명으로 엔랴쿠지 강소(延暦寺強訴)를 격퇴했을 때, 신요(神輿)를 화살로 명중시켜버렸기 때문에 나중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것이, 야마토 겐지 발전의 싹을 잘라버려, 셋츠 겐지(摂津源氏)를 포함한 세 계통의 겐지 가문들 중에서 가장 별볼일 없어진 원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반대로 코후쿠지로 들어가 사원 내부의 실권을 장악한 악승(悪僧) 신지츠(信実) 같은 인물도 등장하게 되지만, 대체로 셋칸케(摂関家)의 가산기구(家産機構)에 종속 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나 타다마사(忠正)와 달리 치카하루의 활동을 전하는 사료는 없다. 약소한 존재였던 탓에, 재빨리 추포당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후의 사태의 진행은 급격했다. 이틀뒤인 8일은 토바인(鳥羽院)의 쇼나노카(初七日: 죽은 뒤 이레째에 드리는 불공)에 해당해, 토바 안라쿠쥬인(安楽寿院)에서는 나이다이진(内大臣) 사네요시(実義) 이하가 출석하여 성대한 법회(法会)가 치러졌다. 하지만, 같은 날에,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의 진영은 두가지 중대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먼저, 고시라카와는 쿠로도노카미(蔵人頭) 후지와라노마사노리(藤原雅教)를 호쟈(奉者)로 삼아 여러 나라의 코쿠시(国司)에게 윤지(綸旨)를 내려, 타다자네(忠実), 요리나가가 장원(荘園)으로부터 무사들을 동원하는 것을 저지하라 명했다. 윤지는 텐노의 개인적인 의지로 발급 할 수 있는 간편한 형식의 문서로, 조속한 처치를 필요로 할 때에 내려졌다. 쿄 안에 있는 케닌에 이어 여러 나라에서의 셋칸케령(領)의 무사의 움직임을 막도록 함과 동시에, 셋칸케 모반이라는 정보를 여러 나라에 전하는 의미를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후수를 취하게 된 요리나가에게, 지방 무사를 동원시킬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조치라 할 수 있다.

 같은 날, 쿠로도 타카시나노토시나리(高階俊成)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병력이 요리나가의 저택인 히가시산죠도노(東三条殿)로 난입, 저택 내부를 검지(検知)함과 동시에 몰관(没官)하기에 이르렀다. 셋칸케의 상징이라고도 항 수 있는 보물을 보관하고 있는 히가시노쿠라마치(東蔵町)에도 같은 조치가 치러졌다. 이때, 요리나가의 명으로 저택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던 효도인(平等院)의 승려 쇼손(勝尊)이 추포되었고, 본존(本尊), 문서를 압수함과 동시에 심문이 치러졌다. 셋칸케를 오랫동안 모셔온 케이시(家司) 타이라노노부노리(平信範)는「자세하게 쓰기가 어렵다(子細筆端に尽くしがたい)」라며 말을 흐렸는데, 압수품에 의해 요리나가의 죄상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틀림 없다. 

 덧붙여,『호겐모노가타리』는 원적조복(怨敵調伏)을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모반 계획이 드러났으며, 11일에 요리나가의 히젠노쿠니(肥前国)로의 유배가 결정되었다 한다. 유배에 대한 기술은 동시대의 사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없지만, 저택의 몰관이 행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요리나가가 죄인으로 확정되었다는 것, 또, 그 죄명이 모반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순식간에 사태는 크게 전개되어 갔다. 그 배경에 수완이 뛰어난 신제이(信西)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이미, 요리나가에게는 고시라카와, 타다미치(忠通)의 실정(失政)을 기다렸다가 정권 부활을 꾀할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추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면, 정치적 생명을 최종적으로 끝내야 할지, 아니면 무력에 의해 태세 만회를 한 번에 해치워버려야 할지... 그 중 어느쪽이든 선택 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던 것은 스토쿠(崇徳)와 똑같았다. 확실히 그에게는 직접적인 압력은 가해지지 않았지만, 이미 고시라카와 측은 7월 5일에 스토쿠 죠코(崇徳上皇)와 요리나가가 같은 마음으로 텐노 타도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을 유포하고 있었다. 요리나가가 모반을 기도했다고 여겨지게 된다면, 당연히 스토쿠도 거기에 가담하여, 고시라카와 텐노 타도를 목표로 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요리나가의 유배와 동시에, 스토쿠도 실각, 유폐 처분에 처해지게 된다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토바인의 죽음에 의해, 부활 가능성이 생긴 것도 잠시,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에 스토쿠, 요리나가는 실각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사태는 그야말로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이나 타다미치의 기대대로 진행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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