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212018.10.01 PM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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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三. 병란의 발발

 

◇ 스토쿠와 요리나가의 합류

~ 이러한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 진영의 움직임에 대한 스토쿠인(崇徳院)과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의 행동이 판명되는 것은, 9일 밤이 되어서 부터이다. 먼저 스토쿠인이 토바(鳥羽) 타나카도노(田中殿)를 탈출하여 몇 안 되는 사람들과 함께 시라카와(白河)에 있는 시라카와 키타도노(白河北殿)로 갔다. 원래는 토바인(鳥羽院)의 고쇼(御所)였기에, 타이라노타다모리(平忠盛)가 승전(昇殿)을 허락받은 토쿠쵸쥬인(得長寿院)을 저택 안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당시는 스토쿠의 친누이동생인 사키노사이인 토시 내친왕(前斎院統子内親王: 훗날의 죠사이몬인)의 고쇼였으나 내친왕은 토바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토바로 거처를 옮겨 비어있었다.『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스토쿠는 강제로 문을 열고 침입했다고 한다. 

『兵範記(효한키)』에는「上下奇となす。親疎しらず」라 나와있어, 갑작스러운 행동에 수상하게 여기는 눈길이 있었다고 나와있다. 요리나가와 달리, 스토쿠에게는 특별히 압력이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이 예상외였을 것이다. 토바에는 죽은 토바인의 호쿠멘 무사(北面武士)인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나 타이라노모리카네(平盛兼)들이 집결해 있어, 요리나가 모반에 대한 누(累)가 스토쿠에게 끼치게 되면 즉시 체포 당할 위험이 있었다. 또, 코치(河内) 씨가 지적했듯이, 토바인이 주로 인고쇼(院御所)로 이용한 시라카와키타도노로 들어가는 것으로 인해, 스토쿠야말로 토바인이 죽고나서 뒤를 이은 치천의 군주(治天の君)임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귀족들을 소집하기 위함이 아니라, 후술할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나 헤이시 이치몬(平氏一門) 같은 귀추가 불분명한 무사를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요리나가는 그보다 하루 늦은 10일에 시라카와키타도노로 합류한다.『효한키』에 따르면, 타이라노타다마사(平忠正)나 미나모토노요리노리(源頼憲)가 동시에 병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타다마사의 자택이 우지(宇治)에도 있었던 것은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타다자네, 요리나가의 측근 무사들도 이 당시에는 우지에 거주하고 있었고, 요리나가와 함께 입경(入京)했을 것이다.『구칸쇼』는, 고시라카와 측이 노부카네(信兼)에게 요리나가 추토를 명령했으나 놓쳐버렸다고 한다. 어쩌면, 무사단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간단히 공격 할 수 없어 입경을 허락해버렸을 것이다. 

 이 이외에, 스토쿠 측에는 측근이라 봐야 할 타이라노마사히로(平正弘) 일족, 인쿠로도(院蔵人)가 되어있던 타다마사의 아들이 나가모리(長盛),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일파인 미나모토노요리키류(源頼清) 출신인 타메쿠니(為国) 등이 참집(参集)했다. 이들 중, 나가모리의 존재는 스토쿠와 요리나가의 연결고리를 알아차리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마사히로는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의 일족으로, 시나노(信濃) 북부에도 영지를 갖고 있는 등... 각지에 세력 기반을 갖고 있었으나, 즈료(受領)에 이르지는 못 하고 에후(衛府) 정도의 관위(官位)에 머물러, 강소(強訴) 등이 있을 때에만 소소하게 활동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타메쿠니는 신제이(信西)의 사위라는 흥미로운 존재였으나, 인정기(院政期)에 활동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인척관계는 신제이가 무명이었을 때에 맺어진 것이었을까?

「세력이 대단했다(勢ズクナ)」라는 식으로 비웃음 당한 스토쿠 측에서 최대의 무력이 된 이는 미나모토노타메요시 일족 밖에 없었다. 그는 토바인의 호쿠멘으로서 사이몬(祭文)에 이름을 올렸던 데다, 장남인 요시토모(義朝)가 고시라카와 텐노 진영에 참진하고 있었던 만큼, 마지막까지 머뭇거렸지만, 결국 스토쿠의 부름에 응해 요리카타(頼賢), 타메토모(為朝) 이하, 일곱 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인고쇼로 들어왔다.

 무엇보다, 그 무력은 약체였다.『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서의 타메요시는, 이미 케닌(家人)을 요시토모에게 양도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 실태는 선술한대로 토고쿠(東国)로 파견 된 요시토모가 토고쿠 무사의 조직화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대로 셋칸케(摂関家)와 대립하는 인의 근신들에게 접근,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도 고시라카와 텐노 진영에 가담해버렸던 것이다. 요시토모에게 대항하려고 내려갔던 요시카타도, 전년에 요시히라(義平)에게 멸망당했다. 토고쿠 무사의 참전 같은 건 기대 할 수도 없었다. 또, 친제이(鎮西)로 파견 된 타메토모도 조정을 분노케 한 행동을 했던 만큼, 그럴싸한 무력을 동원하지 못 했다. 덤으로, 카와치(河内)에 거점을 두고 있던 셋째 아들 요시노리(義範)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었는지 그 어떤 진영에도 참전하지 않았다. 

 덧붙여,『효한키』는 타메요시의 참전 배경에 대해, 토바인의 질책으로 칩거하고 있었던 것을 스토쿠에게 간절하게 설득을 당한 결과라 나와있다. 하지만, 타메요시와 스토쿠의 접점은 없으며, 그가 최종적으로 참전을 결단한 배경에는, 오랜 기간 주군으로 모셔왔던 요리나가와의 제휴가 관계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타메요시는 로쿠죠 호리카와(六条堀河) 이외에, 시라카와와 꽤 가까웠던 엔가쿠지(円覚寺) 부근을 점거하고 있었으며, 스토쿠의 입경과 함께 급거 합류했을 것이다. 선술했듯이 스토쿠가 시라카와로 침입한 배경에는, 당시 엔가쿠지의 거점에 있던 타메요시 일족과 합류할 목적도 있었으리라 본다. 또, 시라카와도노(白河殿)의 남쪽인 로쿠하라(六波羅)의 헤이시 이치몬의 참가에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토바인이 죽은 뒤, 고시라카와 텐노 진영의 공세를 받아 위기에 몰려있던 스토쿠와 요리나가는, 어쩔 수 없이 제휴했던 것이다. 그들은 시라카와 키타도노를 거점기지로 삼아 미나모토노타메요시들의 무력을 내세워 고시라카와 측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고시라카와 진영도 무사의 동원을 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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