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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242018.10.04 PM 11:49
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三. 병란의 발발
◇ 야습(夜襲) 결단
~ 스토쿠 죠코(崇徳上皇)와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 진영에서는 즉시 군의(軍議)가 열렸고, 스토쿠와 요리나가는 머리를 맞대고 밀담을 나눴다.『兵範記(효한키)』의 10일 조(条)에 이러한 기술이 발견되기 때문에, 선술한 코치(河内) 씨는 스토쿠 측과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 측에 어떠한 교섭이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까지의 경위를 통해서 보면,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다. 이 기술은, 나중에 항복한 후지와라노노리나가(藤原教長)의 공술(供述)을 바탕으로 노부노리(信範)가 기술한 것이다. 일기라고는 해도, 훗날에 보고 들은 것을 고쳐 쓴 부분도 있었다. 일기를 사료로 사용 할 경우, 이런 점에 충분히 주의 할 필요가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스토쿠는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를 호간다이(判官代)로, 그의 적자라 할 수 있는 요리카타(頼賢)를 6위 호간다이로 임명했다. 그들을 직접적으로 스토쿠 앞에 부르기 위한 수속이었으리라. 이때,『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서는 타메요시가 야습에 의한 선제 공격을 주장했다고 하는데,『愚管抄(구칸쇼)』가 기록했듯이 타메요시가 헌책한 것이 사실이라 생각된다. 타메요시는, 스토쿠와 함께 토고쿠(東国)로 내려가, 겐지의 누대(累代)의 케닌(家人)을 조직해서 저항할지, 선제 공격을 할지를 두고 설파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토고쿠에서는 장남인 요시토모(義朝)가 우세였으며, 쿄(京)를 벗어나면 스스로 정당성을 방치하고 패주해 몰락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토고쿠 운운 하는 것은 지엔(慈円)의 창작이라 여겨지지만, 선제 공격을 무사들이 주장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특히 친제이(鎮西)에서 격심한 전투를 경험한 타메토모(為朝)라면 야습의 유효성을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적은 병력으로도 적이 방심한 틈을 찌르는 기습이 효과적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 주장을 각하한 것이 요리나가였다는 것은『호겐모노가타리』『구칸쇼』가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전자에서 그는 죠코, 텐노가 나라를 두고 다투었을 때에, 10기, 20기 정도의 병력으로 전투를 치르는 야습 따위는 할 수 없다고 하며, 야마토(大和) 코후쿠지(興福寺)의 악승(悪僧)의 가세를 기대했다고 한다. 후자에서는, 히가키 타로(檜垣太郎)... 즉, 미나모토노요리모리(源頼盛) 등의 요시노(吉野)의 군세의 도래를 기대하면서 공격안을 각하시켰다고 나와있다. 이렇게 보면, 기본적으로는 세가 없었기 때문에, 야마토의 군세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는 자세라 익숙했을 것이다. 야습에 대한 부정은, 후술할 신제이(信西)와의 대비를 통해 나중에 창작되어 삽입된 이야기라 생각된다.
이 시점에서 병력의 수가 열세였다는 것은 명백하며, 원군이 도착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소수의 병력으로 무모한 공격을 가하기 보다 거점에서 농성하는 쪽이 싸우는 방법으로서는 정확하다. 또, 일단 평판이 나쁜 요리나가의 무사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도, 평소부터 권문(権門)의 맹주로서 주종관계에 있는 무사를 통솔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여기에 대해, 타카마츠도노(高松殿)의 고시라카와 텐노 진영에서도, 전투를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다.『효한키』에 따르면,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가 아사가레이노마(朝餉の間: 텐노가 식사를 드는 방)로 불려가, 작전을 주상했다고 한다. 하지만,『효한키』에 따르면, 이 이후 등장하는 것은 오로지 요시토모 뿐이다. 선제 공격을 주장한 요시토모는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고, 고쇼(御所) 정원에 있었던 신제이도 칸파쿠(関白)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에게 결단을 내려줄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텐노의 어전에 있었던 타다미치는 눈을 깜빡이며 허공을 올려다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날이 바뀐 11일 미명, 타다미치는 그제서야「サラバ、トクヲイチラシ候へ」라며 출격 명령을 내렸다.
신제이 등 인(院)의 근신 세력들은, 요리나가를 도발하여 생각한대로 거병을 일으키게 했기 때문에, 한 시라도 빨리 공격을 가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토고쿠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고, 야습의 유효성을 잘 아는 요시토모가 공격을 재촉한 것 또한 당연했다. 거기다, 나라(奈良)에서 올 악승 이하의 원군이 예측되었던 것도 그들이 공격을 서두르는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구칸쇼』는 타다미치가 결단을 주저했음을 강조하지만, 성인이 된 고시라카와 텐노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칸파쿠인 타다미치가 텐노를 무시하고 최종 결단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는 전례 없던 전투, 게다가 이례적인 야습을 주저한 고시라카와의 결단이 늦었던 것이리라. 코치 씨는 개전 결정의 지연으로 타다미치가 권력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이미 신제이들의 주도도 명백했기에, 이 의견은 도저히 따르기 어렵다.
타다미치의 결단을 들은 요시토모는, 히노마루(日の丸)를 그린 붉은 부채를 휘두르며 관군(官軍)으로서 출격을 할 수 있어 기뻐했다고 한다. 어딘가의 응원단 같은 것을 방불케 하는 희안한 소란스러움이다. 코치 씨는 이를 황위 결정을 위한 전투에 참가한 것에 대한 기쁨이며, 이 이후 무사는 황위 결정에 가세하는 것을「아이덴티티(identity)」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시계(視界)에는, 전투에 냉담한 키요모리나, 조정 따윈 무시하라며 양언(揚言)한 코즈케노스케(上野介) 히로츠네(広常)의 존재는 들어오지 않았던 듯 하다.
요시토모가 가장 기대한 것은, 부친과의 오랜 기간의 확집(確執)을 극복하여, 텐노에 대한 봉사에 의해 카와치 겐지(河内源氏) 정적(正嫡)이라는 지위를 확립하는 데에 있었다. 고시라카와와의 관계를 깊히 다지는 것으로 인해 관위(官位)를 시작으로 하는 정치적 지위를 단번에 상승시키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최대의 병력을 동원했으면서 키요모리의 행동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나 스토쿠와의 관계에 구애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리하여, 호겐(保元) 원년(1156) 7월 11일 미명, 키요모리가 이끄는 300기, 요시토모가 이끄는 200기, 요시야스(義康)가 이끄는 100기, 총세 600기가 시라카와(白河)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여기서 호겐의 난(保元の乱)의 무력 충돌이 개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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