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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272018.10.07 PM 11:46
제 03장 -격투 끝에
一. 전투의 전개
◇ 시라카와도노(白河殿)의 사투(死闘)
~ 히가시산죠도노(東三条殿)에서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나 칸파쿠(関白)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 곁에 있던 노부노리(信範)가 전투의 구체적인 양상을 알 리도 없기에,『兵範記(효한키)』에는 전투에 관한 구체적인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愚管抄(구칸쇼)』에서는, 역시나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가 전투의 중심이었다고 나온다. 적은 병력으로 고쇼(御所)를 견고하게 수비하고 있던 미나모토노요리카타(源頼賢), 타메토모(為朝)에 대해, 요시토모의 첫째 가는 낭도(郎等)인 카마타 마사키요(鎌田正清)가 자주 공격하러 왔다가 물러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결국에 다수의 병력을 믿고 시라카와도노(白河殿)를 포위해서 불을 질렀다고 한다.
마사키요는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요시토모의 메노토고(乳母子)로, 마사이에(正家)라 개명하여 3년 후에 일어난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요시토모와 마지막까지 운명을 함께 하게 된다. 카와치 겐지(河内源氏) 조상 대대의 상전(相伝)인 낭도 야마노우치 스도(山内首藤) 씨의 이치몬(一門)으로, 당시에는 스루가노쿠니(駿河国)를 거점으로 삼았다 여겨진다. 이 이외에, 후술할 사가미(相模)의 무사인 오오바 카게요시(大庭景能)도 타메토모와의 대결로 다리에 부상을 입었는데,『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료에 등장하는 요시토모의 낭도는 모두 토고쿠 무사(東国武士)였다. 지금까지도 말 해왔듯이, 요시토모의 주력이 토고쿠에서 동원되었음을 뒷받침해준다.
전투를 가장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호겐모노가타리』이다. 이하, 동서에 기록된 전투의 양상을 살펴 보고 싶다.
우선 정면으로부터 공격한 요시토모를 카모 강(鴨川) 강변에서 요리카타가 맞이해 싸웠고, 요시토모군은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서 오오이미카도(大炊御門) 쪽의 문을 공격한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의 군이 타메토모와 조우, 강궁 앞에 심복인 이토 로쿠(伊藤六), 야마다 코레유키(山田是行)가 차례차례로 희생이 되어 허둥지둥 퇴각하였다. 그들을 대신해 요시토모군이 타메토모와 대결하게 되지만, 쉰 명이 넘는 부상자를 내고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방향의 문들도 함락시키지 못 하고, 결국에 요시토모는 방화 작전 허가를 신제이(信西)에게 요청, 인접한 후지와라노이에나리(藤原家成)의 저택에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해, 필사적인 저항을 보였던 스토쿠 죠코(崇徳上皇),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 측도 결국 패퇴했다고 한다.
동서는 타메토모에 대해 강궁으로 상대를 갑옷 채로 관통시키는 초인적인 대단함과 동시에, 전투 후의 일도 생각해서 형인 요시토모의 목숨을 구하려 한 사려 깊은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타메토모상(像)과 반비례 하듯이, 약한 척 하는 키요모리의 모습이나, 요리카타나 타메토모의 군세에 밀려 돌아간 요시토모 주종의 유약함이 강조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호겐모노가타리』의 서술에 상당한 허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 할 수 없지만, 그것을 통해 일정 정도의 사실을 찾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타메토모의 강궁으로서의 모습은『吾妻鏡(아즈마카가미)』 켄큐(建久) 2년(1191) 8월 1일 조(条)에서 볼 수 있는 오오바 카케요시의 담화에서, 타메토모를 두고「우리 조정에서 따를 자가 없을 정도의 활솜씨를 지닌 달인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사실이라 판명된다. 다만, 양자의 조우를『호겐모노가타리』는 시라카와(白河) 키타도노(北殿)의 문 안이라 하고 있는 데에 반해,『아즈마카가미』에서는 그 장소를 오오이미카도에 있는 강변이라 나와있으며, 두 서적 모두 말에 탄 상태였다고 나온다. 스토쿠 죠코 측의 무사들도 문을 지켰을 뿐이 아니라, 강변으로 진출하여 고시라카와 텐노 측과 싸웠음을 엿볼 수 있다.『구칸쇼』에 따르면 마사키요는 세 번에 걸친 공격에서 밀려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타메토모들과의 전투가 반복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스토쿠 죠코, 요리나가 측은 당초에 카모 강 강변을 방어선으로 삼아, 시라카와 키타도노를 목표로 한 고시라카와 측을 격퇴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강변에서 요시토모 이하는 격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시라카와 키타도노로 도착하기가 힘들었으리라 생각된다. 또, 요리마사(頼政) 이하의 제 2진의 지원도 필요해졌을 것이다. 건물에 접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방화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효한키』에서 말하고 있는 것 처럼, 불꽃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고시라카와 진영은 승리를 확신했던 것이다.
그런데,『호겐모노가타리』에 따르면, 요시토모가 강변에서 요리카타군과 충돌하고 있는 동안에 남쪽을 통해 돌아온 키요모리는 오오이미카도에서 바로 앞에 있던 타메토모와 싸우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이세(伊勢) 출신인 심복 이토 카게츠나(伊藤景綱)의 자식인 이토 로쿠나, 이가(伊賀)의 이노시시무사(猪武者)인 야마다 카게유키들이 타메토모에게 희생되었다. 거기서 묘사한 타메토모의 궁세(弓勢)에 과장은 있겠지만, 전사자의 이름은 허구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이세 헤이시의 옛부터의 거점인 이세, 이가 양국의 낭도들이었기에, 헤이시가 자신들을 대대로 모셔온 케닌(家人)에게 의지하고 있었음을 이야기 해준다.
또,『호겐모노가타리』는 타메토노의 궁세에 겁을 먹은 키요모리가 도망을 쳤다고 하며, 이후의 활동에 대해 다루지 않고 있다. 타메토모를 거대화함과 동시에, 헤이시 멸망 이후에 성립된 동서가 헤이시가 겁을 먹은 모습을 강조한 것도 사실이지만,『구칸쇼』에서도 키요모리의 행동은 다루지 않고 있다. 역시나 죽은 부친이나 계보가 스토쿠 죠코를 가까이서 모셨던 것이, 소극적인 태도를 가져다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키요모리의 자세는 요시토모와 대조적이며, 그와 고시라카와의 냉담한 관계도 이야기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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