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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302018.10.10 PM 11:50
제 03장 -격투 끝에
二. 패배자의 운명
◇ 요리나가(頼長)의 비참한 죽음
~ 전투 후, 행방이 묘연해진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의 동향이 판명된 것은, 난으로부터 10일 후인 7월 21일의 일이다.『兵範記(효한키)』의 기술에 따르면, 이날에 요리나가의 외가쪽 사촌형제인 코후쿠지(興福寺)의 승려 겐켄(玄顕)으로부터 진상이 보고된 것이다.
그는 전투부터 요리나가의 죽음에 이르는 경위를 조정에 언상(言上)했다. 거기에 따르면, 요리나가는 11일에 있었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뒤, 오구라이케(巨椋池)를 지나 키즈 강(木津川)을 거슬러 올라가 나라(奈良)와 가까운 키즈(木津)에 도착, 사자를 파견하여 부친인 타다자네(忠実)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하지만, 대면을 거부당했기 때문에, 요리나가의 외삼촌인 센가쿠(千覚)의 방에 드러누웠는데, 하룻밤을 꼬박 괴로워하다 14일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극심한 더위 속을, 중상을 입고서 나라까지 도망쳐온 요리나가의 집념에는 그저 경탄 할 뿐이다. 그 이상으로, 회복 불능인 깊은 상처를 입은 고통,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번민했을 고뇌에는 상상을 금치 못 할 정도다. 즉사하지 못 한 고통, 그런 요리나가와의 면회를 거부한 타다자네의 갈등, 거절당한 것을 알게된 요리나가의 절망에는 가슴이 미어진다.
요리나가를 제외한 귀족들은 물론이고, 주요한 무사들 중에도 전사자는 없었다. 그런 만큼, 날아든 화살에 목숨을 잃은 요리나가의 불운은 눈에 띈다. 운명과 신불(神仏)의 가호(加護)를 연결짓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일찍이 죠토쿠(承徳) 3년(1099) 6월, 칸파쿠(関白) 후지와라노모로미치(藤原師通)가 병으로 급사했을 때는, 그 일이 있기 4년 전에 그가 강소(強訴)를 격퇴한 히에 진쟈(日吉神社)의 저주라고 선전되었다. 또, 모로미치가 카스가 진쟈(春日神社)로부터 버림 받은 것을 자식인 타다자네 이하는 깊이 두려워했을 정도다.
따라서, 우지노쵸쟈(氏長者)이자 사다이진(左大臣)으로까지 승진한 귀공자의 비참한 죽음은, 신불에게 버림 받은 업벌(業罰)의 결과라 여겼을 것이라 생각된다. 부친인 타다자네가「氏長者タル程ノ人、兵ノ前ニ懸ル事ヤ有。サ様ノ不運ノ者ニ対面セン事、コツナカリナン」라고 칭하며 요리나가와의 대면을 거부했다고 하는『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의 일화는, 진실를 전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무엇보다 타다자네에게는, 후술할 다른 기대도 있었겠지만...
떠올려보면, 요리나가는 젊은 시절부터 셋칸케(摂関家) 적류(嫡流)에 위치하며, 귀족 정권을 짊어져야 할 존재로서 주변의 기대와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제 1장에서도 다뤘지만, 그는 유학(儒学)과「왜국(倭国)의 구사(旧事)」... 즉, 조정의 고실(故実) 학습에 정진하여, 율령제(律令制)의 원점을 되찾아 귀족 정권의 재생을 지향했다. 하지만, 시대는 율령제를 형해화(形骸化)시켰고, 주종관계의 중시나 계층질서의 변용(変容)을 동반한 인(院)의 근신의 대두, 자력구제(自力救済)의 침투에 의한 무사의 진출 같은 새로운 요소가 정치를 좌우하게 되었다. 그의 학식은 결과로서 정무를 통해 살리기가 힘들었다.
부친인 타다자네는 일단은 실각했으면서도 토바인(鳥羽院)이나 인의 근신들과 교묘하게 연계하여, 막대한 장원(荘園)을 집적(集積)함과 동시에, 무사, 악승(悪僧)의 무력을 배경으로 복합권문 셋칸케(複合権門摂関家)를 구축했다. 그런 그의 후계자가 된 요리나가는, 무력에 의한 사적제재(私的制裁)를 행사하여 악승이나 무사를 통제했다. 거기다, 신분질서가 변용하여, 주종관계 같은 인격적 결합 등의 새로운 인간관계가 창출되던 중에, 스에시게류(末茂流) 출신인 후지와라노타카스에(藤原隆季) 같은 인의 근신이나 카잔인류(花山院流) 출신인 후지와라노타다마사(藤原忠雅), 거기다 즈이신(随身) 하타노키미하루(秦公春)나 미나모토노요시카타(源義賢) 등의 무인, 무사들과의 남색관계(男色関係)까지 맺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권문의 통제, 유지에만 급급해 주위와의 알력(軋轢)을 격화시켰고, 형인 타다미치와의 항쟁으로 인해 인의 근신 세력을 적으로 돌려버려 고립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하타노키미하루와의 관계처럼, 남색관계도 자신의 감정에 맏겨버리는 측면이 강해서, 정치적인 목적의식으로 제어하지 못 했다. 그가 무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유 중 하나는, 그야말로 그 개인의 정치가로서의 능력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
그가 가진 무력, 재력은, 과연 정쟁(政争)에서 유효하게 기능을 하고 있었던걸까? 오히려, 무력을 가졌던 탓에, 적대받고 위험요소로 여겨져, 구석에 몰려 거병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중세에 맞춰 셋칸케는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독자적인 무력, 경제 기반을 구축한다고 하는... 조정의 질서나 주위 세력과의 충돌을 야기한 측면도 있었다.
장원의 형성은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이나 그녀 주변에 있는 인의 근신 세력과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토바인과도 대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를 시작으로 하는 무력의 존재는, 인의 근신들에게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요리나가는 재력과 무력과 권위를 갖고 있었던 탓에, 인의 근신들로부터 적대할 상대라 여겨져 도발을 받은 면도 있었다. 이러한 모순을 짊어지고, 요리나가는 싸움에 내몰리고 죽어간 것이다.
향년 서른일곱. 이 석학은 장례조차 치뤄지지 못 하고, 나라 가까이에 있는 한냐노(般若野)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한 잠에 이르지는 못 했다. 그의 유해는, 과거 학문의 스승이자, 출가 소식을 듣고 함께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신제이(信西)의 명령으로 파헤쳐져, 검시(検視) 당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요리나가의 자식들도 편적(貶謫: 관위가 내려가고 수도에서 먼 변방으로 유배를 가는 것)의 쓰라림을 면치 못 했다. 27일에 죄명이 선하(宣下)되고, 8월 28일에 유배지로 내려갔다. 적자(嫡子)로 여겨지던 곤노츄나곤(権中納言), 우다이쇼(右大将)였던 후지와라노카네나가(藤原兼長)는 이즈모(出雲)로 유배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에 불과 스물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친동생이자 셋째인 사콘노곤노츄죠(左近権中将) 타카나가(隆長)는 이즈(伊豆)로 유배되어, 자신의 형과 마찬가지로 귀경 전에 세상을 떠났다. 차남이자 곤노츄나곤, 사츄죠(左中将)였던 모로나가(師長)는 토사(土佐)로 유배되었는데, 9년 뒤에 귀경을 허락받았다. 아내가 비후쿠몬인의 뇨보(女房)이고, 인의 근신인 후지와라노아키요리(藤原顕頼)의 딸이었던 게 운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뿐만 아니라, 비파의 명수로서 음악적 재능을 고시라카와 텐노에게 인정받아, 안겐(安元) 3년(1177)에는 당당히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으로까지 승진한다. 과거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해야 할 정적(政敵)이었던 자의 자식을 중시한 것이다. 만만찮은 고시라카와의 속이 그만큼 깊었던걸까? 하지만, 이런 모로나가도,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가 고시라카와의 인정을 정지시켜버린 지쇼(治承) 3년(1179)의 정변(政変)으로 유배를 가야했으며, 출가를 해서 정치적 생명이 끊어졌다. 그의 자식들도 출가하였기에, 여기서 요리나가의 혈통은 정계로부터 완전히 소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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