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332018.10.14 PM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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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3장 -격투 끝에

 

 

三. 승자들의 명암

 

◇ 은상(恩賞) 수여

~ 전투가 종료 된 11일, 무사들에게 은상(恩賞)이 주어졌다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한 대로이다.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는 하리마노카미(播磨守)에,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는 우마노곤노카미(右馬権頭)에 각각 보임(補任)되었고, 요시토모와 미나모토노요시야스(源義康)는 우치노쇼덴(内昇殿)을 허락받았다. 덧붙여, 요시야스는 8월에 들어서면서 종 5위하로 서작(叙爵)되어, 전투 단계에서는 6위였기 때문에, 이 우치노쇼덴은 6위 쿠로도(蔵人)로의 보임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키요모리가 임명받은 하리마노카미는, 꽤 커다란 의미를 가진 관직이다.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 초기에 기록된 관직제도에 대한 해설서인『官職秘抄(칸쇼쿠히쇼)』에 따르면, 즈료(受領) 중에서 하리마, 이요(伊予) 양국은 4위 죠로(上臈)를 임명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당시, 3위 이상인 공경(公卿)이 즈료를 겸임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4위 죠로라는 것은 즈료들 중 최고봉을 의미한다. 사실, 시라카와인(白河院), 토바인(鳥羽院)의 인정기(院政期)에 하리마노카미, 이요노카미로 임명된 자들 중 태반은 다른 즈료로 바뀌지 않았으며, 살아있기만 하다면 공경으로 승진할 수도 있었다.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의 부친인 후지와라노나가자네(藤原長実)나 사촌형제인 후지와라노이에나리(藤原家成)도, 하리마노카미를 거친 뒤에 공경으로 승진했다고 하는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 17일에는 키요모리의 신청에 의해, 동생인 요리모리(頼盛), 노리모리(教盛)가 모두 우치노쇼덴을 허락받았다. 이렇다 할 공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헤이시 이치몬(平氏一門)에게는 생각지도 못 할 정도의 은상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원래의 정치적 지위의 높이와, 스토쿠 죠코(崇徳上皇)의 일파에서의 전신(転身)이라는 것이 평가받았던걸까? 

 이와는 대조적으로, 최대의 공로자였어야 할 요시토모에게는, 당초에 우마노곤노카미라는 낮은 관직이 주어진 데에 지나지 않았다.『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 따르면, 요시토모가 불만을 얘기한 결과, 겨우 사마노카미(左馬頭)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한다. 큰 공적도 없는데 대국의 즈료가 되고, 이치몬들도 은상이 주어진 키요모리와, 일족과 척을 지면서 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관직 밖에 주어지지 않았던 요시토모. 이 은상의 격차가 요시토모의 불만을 초래해 결국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의 요인이 되었다는 해석을 자주 볼 수 있다.

 요시토모가 우마노곤노카미에서 사마노카미로 관직을 옮긴 것은,『兵範記(효한키)』를 통해서도 뒷받침되는 사실로, 당초의 관직에 요시토모가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키요모리와 비교해서 관직이 떨어진다고 해서, 이를 요시토모에 대한 억압이나 부당한 인사 조치로 보는 건 잘 못 된 시각이다. 난이 일어나기 이전의 양자의 관직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키요모리는 대국인 아키노카미(安芸守)라는 지위에 있었던 데다, 우치노쇼덴을 허락받아 위계(位階)도 정 4위하에 도달해 있었다. 당시는 정 4위상이라는 위계가 원칙적으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머지 않아 공경 승진도 될 법한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이치몬도, 대게 즈료의 지위에 있었던 데다,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를 위해 참전해주었기 때문에, 은상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원래, 스토쿠 죠코에게 친근감을 가졌으면서도, 굳이 고시라카와 텐노 진영에 참전했다는 것 자체가, 고시라카와 텐노 진영의 승리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키요모리는, 구체적인 군공의 유무를 떠나, 승리의 공로자인 셈이다. 후술하겠지만, 셋칸케(摂関家)가 쇠퇴하고, 왕권이 분열되어 권위가 저하된 상황 아래, 헤이시 이치몬의 정치적 지위는 상대적(相対的)으로 상승하게 된다. 

 여기에 반해, 요시토모는 원래 5위하라는 5위 중에서도 가장 말석이고, 토고쿠(東国) 변경인 시모츠케노카미(下野守)라는 즈료로서는 가장 낮은 임국(任国)을 가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 일족은 전투의 희생자가 된 게 아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모반인으로서 처형당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궁중의 군마를 관리하는 메료(馬寮)라는 중직을 얻은 데다, 카와치 겐지(河内源氏)가 시작 된 이래 처음으로 우치노쇼덴을 허락받았다는 것은 오히려 파격적인 대우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물며 사마노카미는, 전임자가 인(院)의 근신인 거물 후지와라노타카스에(藤原季)였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꽤 격식 높은 관직이었던 것이다. 

 겐지의 적류(嫡流)로서 우치노쇼덴을 허락받고, 고시라카와 텐노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또, 장년의 토고쿠 체재라는 경험을 통해 토고쿠 무사들 대부분을 조직한 요시토모는, 그야말로 무사의 동량(棟梁)이라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키요모리 다음 가는 존재로서 정계(政界)의 중심에 뛰어들게 된다. 덧붙여, 요시토모와 행동을 함께 한 요시야스는, 케비이시(検非違使)로서 활약했는데 익년 5월에 요절하게 된다. 아시카가(足利) 일족의 대두는,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의 성립이라는 사건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인사를 수행한 중심은, 인의 근신이자 승려인 신제이(信西)였다. 다음으로, 신제이에 대해 다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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