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362018.10.19 AM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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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3장 -격투 끝에

 

 

三. 승자들의 명암

 

◇ 어중간한 승자 타다미치(忠通)

~ 승자는 형식적으로는 우대받기 마련이다.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는 부친인 타다자네(忠実)로부터 양도받은 막대한 장원(荘園)의 영주가 되었으며, 9월 13일에 있던 지목으로 적자인 모토자네(基実)는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으로 승진한다. 차남인 모토후사(基房) 역시 8월에 서작(叙爵)을 받았고, 9월에는 5위인 채로 코노에츄죠(近衛中将)를 겸임한다. 이 5위 츄죠라는 자리는, 셋칸케(摂関家) 적류(嫡流)의 자제들로 거의 한정되어 있던 특권적 지위였다. 타다미치 이치몬(一門)은, 호겐의 난(保元の乱)의 승자로서, 셋칸케 적류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승리는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이나 신제이(信西) 이하의 인(院)의 근신에 의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이기에, 타다미치는 셋칸으로서의 특권을 차례 차례 잃어가게 된다. 선술했듯이, 우지노쵸쟈(氏長者)의 임명권도, 그리고 장관(荘官)의 교대조차도 텐노(天皇)의 명령에 종속할 수 밖에 없어진 것이다. 타다자네에게 의절당하고, 장원과 무력(武力) 같은 권문(権門)으로서의 가산(家産)을 잃었으며, 비후쿠몬인을 호종(扈従: 모시고 수행함)하는 것으로 정치적 지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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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인 타다자네를 실각시키고 동생인 요리나가를 죽음으로 내몬 뒤 셋칸케의 우두머리가 된 타다미치였으나 이미 시대는 셋칸케의 영향력이 희미해지던 때였으니...]

 


 그의 무력함은 명백해졌다. 2년 뒤인 호겐(保元) 3년 4월, 타다미치가 카모사이시(賀茂祭使)의 행렬을 구경하고 있었을 때, 그의 앞을 가로지른 새 재상(宰相)인 츄죠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의 무례를 욕하고, 부하들이 그 수레를 부숴버렸던 것이다. 칸파쿠(関白)인 자신의 앞을 가로질러 가는 무례를 범한 노부요리에게 잘못이 있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노부요리의 호소를 접한 고시라카와(後白河)는 이에 격노, 타다미치의 케이시(家司)인 타이라노노부노리(平信範)와 후지와라노쿠니츠나(藤原邦綱)의 덴죠(殿上: 궁중 정전에 오를 수 있음을 허락받음) 자격을 박탈시키고 근신처분을 내린 것이다. 타다미치는 고시라카와의 자의적(恣意的)인 처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뿐만 아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동년 8월, 고시라카와 텐노로부터 황태자인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에게 양위가 치러졌을 때의 일이다. 후지와라노노부노리(藤原信範)가『兵範記(효한키)』에 기록하고 있듯이, 이 양위는「부처와 부처」... 즉, 비후쿠몬인과 신제이의 의논에 의해 결정되어「다른 사람들은 참여하지」못 했다고 한다. 따라서, 칸파쿠 타다미치는 황위계승이라는 중대사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본래, 텐노의 보좌역이면서도, 황위계승에도 관여할 수 없었던 타다미치. 이미 셋칸케의 무력화(無力化)는 명백했다 할 수 있다.

 거기다, 놀랍게도 타다미치는, 갖은 고초를 겪어가며 노부요리의 누이동생과, 적자이자 이미 칸파쿠가 되어 있었던 모토자네를 결혼시켰다. 아무리 노부요리가 인의 근신이라고는 해도, 타다미치는 어째서 이런 굴욕적인 혼인에 응한걸까? 

 헤이지(平治) 원년(1159) 11월, 이세노쿠니(伊勢国)에 있던 셋칸케령(領)인 스카노쇼(須可荘)와 이웃해 있던 무사 타이라노노부카네(平信兼)가 난입하여, 대대로 모셔온 게시(下司)인 타메카네(為兼) 부부를 감금한 데다 자식 세 명을 살해하기에 이르었다. 노부카네는 타다미치를 이전부터 모셔오고 있어, 이 문제에 대한 고소가 셋칸케 만도코로(政所)에 닿아있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셋칸케령들끼리의 분쟁이었다. 그야말로 무법적인 자력구제(自力救済)의 세계였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과, 호겐의 난으로 당시까지 장원을 관리해온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 이하의 무력이 괴멸되었다는 것은, 결코 관계 없지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다미치가 노부요리와의 혼인을 여의치 못 하게 된 원인이었다. 타다미치는 장원 관리를 위한 무력으로서 후술할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 이하를 장악한 노부요리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토자네의 혼인과 무력이 밀접하게 연간되었다는 것은,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노부요리가 멸망한 뒤, 모토자네가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의 사위가 되었던 것을 통해서도 뒷받침 된다. 

 셋칸케는, 인이나 텐노가 부재 중일 때 대행으로서 왕권의 한켠을 짊어지는 존재이다. 하지만, 호겐의 난 이후의 셋칸케는 형식적으로 완전한... 이른바 거세당한 정치세력에 지나지 않아, 유력한 권문에게 들러붙어 간신히 살아남게 된다. 모토자네의 적자인 모토미치(基通)도 당초에는 키요모리에게, 이어서 고시라카와로 갈아치우면서 정치적 지위를 유지했다. 모토자네의 동생인 모토후사는 미나모토노요시나카(源義仲)와 손을 잡았다가 몰락했다. 또 다른 동생인 카네자네(兼実)는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라는 당첨 된 복권을 뽑았다.

 교과서의 등장하는 인물풍으로 말하자면, 카마쿠라 바쿠후를 뒷배로 삼은 쿠죠 카네자네(九条兼実)나 그의 손자인 미치이에(道家) 이외에, 이후의 셋칸에서 정무를 주도하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죠 요시모토(二条良基)나 이치죠 카네요시(一条兼良) 같은 사람들처럼, 문화인으로서 활약하는 데에 그치게 된다. 이것이 그후의 셋칸케의 실태이다. 왕권의 일익으로서 제도화된 것을 중시한 측면도 있었지만, 제도화는 형식화, 형해화(形骸化)를 의미함을 명기해야 한다. 다만, 정권에서 한 자리 차지했다고 한다면, 근대의 수사인 코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가 있긴 하지만...

 어찌됐든, 왕가, 셋칸케라는 인정기(院政期)의 정치를 영도해온 양대 권문은 해체되고, 무력화하여 인의 근신이나 키요모리, 요시토모 같은 무사들이 그들의 굴레로부터 해방된다. 이러한 정계의 구조적인 변화와, 이어진 헤이지의 난의 발발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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