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392018.10.22 PM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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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4장 -새로운 싸움

 

 

一. 정계의 세력지도

 

◇ 천박한 은총(御寵)

~ 대게 일본사를 배운 사람 중에서,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의 장본인인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에게 좋은 인상을 가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문무(文武) 모두 밝지 않고 능력도 없으며, 또, 기예도 없다. 그저 조정의 은혜를 입은 걸 자랑스러워 하는 것으로도」급격한 승진을 이루었다고 한다.『愚管抄(구칸쇼)』에서도「천박해보일 정도의 은총(御寵)을 받았다」라는 비판적인 기술이 발견된다.「총(寵)」라 하면, 죠코(上皇)와의 남색관계(男色関係)를 염두 해 둔 기술이라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는 무능했으면서도,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과의 남색관계에 의해 파격적인 출세를 이룰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승진에 기대를 걸었던 신제이(信西)에게 오히려 화를 내고 살해했으며, 니죠 텐노(二条天皇)와 고시라카와인을 유폐해 멋대로 정치를 단행했는데, 어이 없게도 자신의 실책으로 텐노, 죠코의 탈출을 허락하여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 앞에서 패배했다. 그것도, 전투가 있었을 때에 아군인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에게 매도 당하고, 무구(武具)를 걸쳤으나 낙마하여 코피를 쏟고 마는...『헤이지모노가타리』와『구칸쇼』에서 묘사된 노부요리는 공통되는 점이 있어, 그것을 정리해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사료가 패배자에게 신랄한 건 당연하다. 노부요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특히『헤이지모노가타리』의 경우는 유능한 신제이와 대비시키기 위해 과도하게 무능력함을 강조한 면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을 그대로 진짜라 받아들이는 건 곤란하다.

 확실히 그는 급속도로 승진했다. 일개 무사시노카미(武蔵守)가 호겐(保元) 2년(1157) 3월에 명문가의 상징인 코노에츄죠(近衛中将)를 겸임한 이래, 10월에 쿠로도노카미(蔵人頭), 익년 2월에는 산기(参議), 8월에는 곤노츄나곤(権中納言), 11월에는 케비이시벳토(検非違使別当)를 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동안에 위계(位階)도 종 4위하에서 정 3위로 다섯 단계나 급상승하고 있다. 선술한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과의 충돌로 고시라카와가 노부요리를 비호하여 말도 안 되는 처치를 취한 것도, 급격한 승진 도중에 해당하는 호겐 3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고시라카와가 노부요리를 총애했던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력이 모자란 고시라카와의 자의(恣意) 만으로 이런 인사가 실현가능했을까? 이미 타케우치 리조(竹内理三) 씨가 지적했듯이, 당시, 인사에는 신제이가 커다란 발언력을 갖고 있어, 노부요리의 승진도 신제이가 용인했기 때문에 실현된 면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또, 산기로서 공경으로 승진한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실무 능력을 가졌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기에, 무능한 노부요리를 총애한 고시라카와가 강제로 승진시켰다는 이해는 의문스럽다.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은 노부요리의 가계(家系)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노부요리의 부친과 조부는 모두 산니(散位)였으면서도 공경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인(院)의 근신으로서는 명문인 가문이었다. 때문에 노부요리는 신제이보다 훨씬 가격(家格)이 위였다. 노부요리의 부친과 조부에 대해,『헤이지모노가타리』는 각각의 이름이「나카타카(仲隆)」「스에타카(すえたか)」라고 나와있는데, 실제로는 부친의 이름이 타다타카(忠隆), 조부는 모토타카(基隆)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유명한 미도칸파쿠(御堂関白) 미치나가(道長)의 형인 나카노칸파쿠(中関白) 미치타카(道隆)로 당도하게 된다. 

 미치타카의 아들들인 코레치카(伊周), 타카이에(隆家) 형제는 미치나가와 첨에하게 대립한 것으로 유명한데, 노부요리는 동생이자 강직한 성격을 가진 타카이에의 자손에 해당한다. 타카이에는 다자이곤노소치(大宰権帥)로서 다자이후(大宰府)로 내려가있던 칸닌(寛仁) 3년(1019), 하카타 만(博多湾)에 침입한 토이(刀伊)의 해적들을, 무사들을 질타하여 격퇴한 무인풍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타카이에의 아들은 츠네스케(経輔)는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그의 자식들은 공경 지위까지 오르지는 못 했다. 

 노부요리는 츠네스케의 장남인 모로이에(師家) 계통에 속하는데, 그보다 먼저 공경으로 부활하는 건 동생인 모로노부(師信) 계통이라, 이때부터 고토바인(後鳥羽院)의 외척, 보몬(坊門) 가문이 배출된다. 모로이에 계통이 공경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츠네스케의 증손이자 노부요리의 조부인 모토타카 때부터이다. 모토타카의 모친이 호리카와 텐노(堀河天皇)의 메노토(乳母)인 케시(家子)였기 때문에, 그는 시라카와인(白河院)의 근신으로서 활약해, 하리마(播磨), 이요(伊予) 등의 대국의 즈료(受領)를 역임하여 종 3위로 승진한 것이다. 노부요리의 부친인 타다타카는 인의 근신의 자식으로서 여섯 살에 서작(叙爵), 열 살에 탄바노카미(丹波守)로 서임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뒤, 역시나 하리마, 이요 등의 대국즈료를 역임하여 종 3위에 도달했다. 

 덧붙여, 타다타카의 아내인 에이시(栄子)는 겐에이(元永) 2년(1119)에 탄생한 아키히토 친왕(顕仁親王)... 즉, 훗날의 스토쿠 텐노(崇徳天皇)의 메노토가 되었으며, 누이동생은 다이지(大治) 2년(1127)에 탄생한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 즉, 훗날의 고시라카와의 메노토로 기용되었다. 츠노다 분에이(角田文衛) 씨가 추측한대로, 이 메노토라는 연고(縁故)가 노부요리와 고시라카와를 이어주는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이치몬은, 스에시게류(末茂流) 등과 함께, 대국즈료계통 인 근신의 대표격인 존재였다.

 타다타카는 큐안(久安) 6년(1150) 8월 3일, 마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을 기록한 신제이의 편저『本朝世紀(혼쵸세이키)』에는「数国の刺使を経て家富財多し。性・鷹・犬を好む。人がため施しを好み、その報いを望まず。世その大度に伏す」라던가「馬癖あり。もっとも控御を巧む」라는 식의 기술이 있어, 인의 근신으로서 부유했던 것은 물론이고, 수렵, 승마를 특기로 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선조인 타카이에와 마찬가지로 무인풍의 인물로, 도량이 커서 인망을 얻었다고 나온다. 상당히 높은 평가인데, 그 대단한 신제이도 설마하니 그 무인풍의 인물의 피를 이어받은 이에게 참살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을 것이다. 

 거기다 주목해야 할 것은, 타다타카의 인척관계이다. 에이시에게서 태어난 장남 타카노리(隆教)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타이라노타다모리(平忠盛)의 사위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이자 타다모리의 외손자이기도 한 타카치카(隆親)는 공경이자 오오오미(大臣)로서 활약한 키요모리 밑에서 헤이시(平氏)의 기반인 하리마(播磨)의 즈료가 되는 등... 헤이시 이치몬에 준하는 입장에 있었다. 

 차남인 모토나리(基成)는 코지(康治) 2년(1143)에 무츠노카미(陸奥守)에 취임,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무츠노카미의 지위에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임기 종료 후에도 이치몬이 연속해서 즈료에 취임하고 있었기에, 무츠는 일족의 지행국(知行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토나리 자신은 그대로 히라이즈미(平泉)에 머무르면서 결국에 히라이즈미의 최고 실력자인 후지와라노모토히라(藤原基衡)의 적자인 히데히라(秀衡)를 사위로 받아들여, 큐쥬(久寿) 2년(1155)에 오우슈 후지와라(奥州藤原) 씨 최후의 당주가 된 야스히라(泰衡)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의 동생이 노부요리였으며, 그도 적자인 노부치카(信親)를 키요모리의 딸과 결혼시켰다. 타다타카 이후, 이치몬에서 무문(武門)에 대한 친근감, 깊은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노부요리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를 중심으로 한 무사와의 관계에 대해 재검토 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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