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412018.10.25 AM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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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4장 -새로운 싸움

 

 

二. 타도 신제이(信西)

 

◇ 신제이(信西)와의 원한(意趣)

~ 일단은『愚管抄(구칸쇼)』에 기록된, 신제이(信西)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를 둘러싼 혼담(縁談) 이야기부터 다뤄보도록 하자. 당시,「義朝・清盛トテナラビタル」... 즉, 키요모리와 비교해 밀리지 않는다고 칭송되었던 요시토모는, 나중에 시나노 뉴도(信濃入道)로서 고명한 승려가 되는 신제이의 자식인 코레노리(是憲) -물론 당시에는 아직 속인(俗人)이었다- 를 사위로 삼고자 했다. 신제이는 이를「내 자식은 학자이니 너의 사위 같은 게 될 수 없다」며 매몰차게 거절해두고는, 키노 2위 쵸시(紀二位朝子)의 자식인 시게노리(成範)를 키요모리의 사위로 주었다 한다. 지엔(慈円)은 말한다.「ココニイカデカソノ意趣コモラザラン(원한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라고.

 이 유명한 삽화(挿話)는, 그 전제(前提)부터가 의문스럽다. 키요모리와 요시토모의 정치적 지위에는 하늘과 땅 차이 - 라고 말하면 꽤 과장된 것 같겠지만, 어찌됐든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둘을 비교해 봐도 밀리지 않았다는 것은,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가 성립된 뒤에 생긴 관념(観念)이다. 

 또, 신제이 이치몬(一門)과 요시토모의 가문의 신분을 비교해 본다면, 신제이 자신은 공경(公卿)에 버금갔고, 자식들도 호겐 3년 시점에는 쿠로도노카미(蔵人頭)가 되었던 데에 반해, 아직 요시토모는 5위에 지나지 않았다. 신분상의 차이는 역력했다. 따라서, 이 혼담은 요시토모에게 있어서 상당한 무리였으므로, 거절당한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또, 신제이의 자식들 중에 타카시나 시게나카(高階重仲)의 딸을 모친으로 둔 토시노리(俊憲)와 사다노리(貞憲), 그리고 코레노리는, 모두 학자나 관료로서 활약하는... 무사와는 대게 인연이 먼 존재였다. 신제이가 코레노리를 무문인 요시토모의 사위로 삼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것 또한 당연했다. 

 반대로 키요모리와 신제이의 이치몬은, 거의 동등한 가격(家格)을 지녔다. 또, 키요모리의 딸과 약혼한 시게노리(成憲)는, 고시라카와이 메노토인 쵸시를 모친으로 두고 있으며, 대국 즈료(大国受領)를 역임한 입장에 있었다. 무문이라고는 해도, 역시나 즈료로서 활약한 헤이시(平氏)와는 가문을 봐도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제이가 키요모리와의 사이에서 혼담을 진행시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다보니, 요시토모를 기피해서 키요모리와 제휴했다는 식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사정들을 생각해본다면, 아무리 혼담을 거절당했다고 해도, 요시토모가 신제이를 타도하고자 할 정도의 불만을 기졌다고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렵다. 호겐의 난 직후의 은상(恩賞) 문제라는 것도, 요시토모는『구칸쇼』의 겐페이(源平)가 대등하다는 사관(史観)에 의해 오해를 받아, 괴대평가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요시토모가 신제이를 공격한 것은, 노부요리와의 관계에 의한 것이며,『구칸쇼』가 요시토모의 존재나 입장을 크게 평가한 것은, 카마쿠라 바쿠후 성립 이후의 카마쿠라 쇼군(将軍) 가문의 모습을 요시토모에게 투영시키기 위함이다. 

 다음으로, 노부요리와 신제이의 대립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노부요리는 점차 야망을 부풀렸고, 결국에「오래도록 오오오미나 타이쇼 자리를 얻기를 바라기」에 이르렀다. 고시라카와로부터 노부요리의 타이쇼 승진에 관한 자문을 받은 신제이는, 이를 엄숙히 간하여 말렸고, 노부요리를 안록산(安禄山)에 비유한「장한가(長恨歌)」의 에마키(絵巻)를 작성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노부요리의 원한을 낳아, 결국에 거병, 살해하기에 이르렀다고 나온다. 이 에마키가 실존한다는 것은『玉葉(교쿠요)』켄큐(建久) 2년(1191) 11월 5일 조(条)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구칸쇼』에서는 승진을 둘러싼 분의(紛議)가 보이지 않는다.

 코노에타이쇼(近衛大将)를 희망하여 분쟁을 일으키다 자신이 파멸했다는 일화는, 쿠사카 츠토무(日下力) 씨의 지적대로,『平家物語(헤이케모노가타리)』가 묘사한 시시가타니 사건(鹿ケ谷事件)에서의 후지와라노나리치카(藤原成親)와 공통된다. 이 문제 뿐만 아니라, 키요모리에게 교훈을 내리는 시게모리와 코레카타(惟方)에게 교훈을 내리는 미츠요리(光頼)의 유사성 등... 다양한 점에서 시시가타니 사건과 관련된『헤이케모노가타리』와『헤이지모노가타리』의 기술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나리치카는 잘 알려진대로, 분수에 맞지 않는 우다이쇼(右大将)를 바라다 타이라노키요모리의 셋째 아들인 무네모리(宗盛)와 다투다 진 것을 원망해 헤이시 타도라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키요모리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노부요리와 나리치카의 일화는『헤이지모노가타리』와『헤이케모노가타리』의 원형이 가까운 시대에 성립되었다고 여겨지는 만큼, 어느쪽인가가 다른 한쪽을 모방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어느쪽이든 만들어낸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즉, 타이쇼를 바라다 사건을 일으켰다는 일화는, 문학적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애당초 이 당시, 타이쇼로 임명되는 건 한정된 가문 뿐이었으며, 당시의 노부요리는 도저히 그런 지위를 바랄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거기다 오오오미라는 관위는 셋칸(摂関), 오오오미 가문의 자식, 혹은 황족이나 텐노의 외척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며(『官職秘抄』), 인(院)의 근신의 승진은 다이나곤(大納言)이 한계라 여겨지고 있었다. 이 점은, 근본 자체가 황족 출신인 타이라노키요모리 이치몬이나 외척인 보몬(坊門) 가문은 별도로 치더라도,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에도 내내 견지(堅持)되고 있었다. 아무리 신임이 두터웠다 한들, 인의 근신이 그리 간단하게 타이쇼는 물론이고 오오오미 자리를 바라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우며, 그것이 거병의 방아쇠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의문스럽다. 

 또, 신제이가 그의 승진을 방해했다고 여겨지는데, 승진은 결원(欠員)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 호겐 3년이란 단계에서, 두 타이쇼와 마찬가지로, 다이나곤,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도 장년의 공경들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노부요리의 승진이 한계치에 다다른 것도 당연했다. 이러한 문제를 신제이와의 근본적인 대립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잘 못 되었다.

 어쩌면, 당초에는 무력을 자유자재로 행사할 수 있는 노부요리의 유용성, 유능함을 신제이도 인정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급격한 승진의 결과, 노부요리는 점점 오만해져서 신제이와 반목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반적으로 신제이와 노부요리, 요시토모가 대립한 원인이라 여겨지는 일화가 전부 양자가 대립하여 거병, 타도에 이르는 원인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거기다, 신제이 타도를 외치며 일어선 자는, 노부요리나 요시토모 만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신제이 타도에 가담한 면면들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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