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542018.11.12 PM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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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5장 -싸움의 종식

 

 

二. 고시라카와(後白河)의 측근의 전멸

 

◇ 요시토모(義朝)의 패배

~『百練抄(햐쿠렌쇼)』에 따르면, 전투의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官軍を大内に遣はし、信頼卿己下の輩を追討す。官軍分散し、信頼の兵、勝ちに乗じて襲来し、六条河原で合戦す。信頼・義朝ら敗北す」. 즉, 로쿠하라(六波羅)로부터 헤이시군(平氏軍)이 다이리(内裏)를 습격했으나 분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에 기세를 얻은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 측이 로쿠하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로쿠하라 저택 앞에서 벌어진 로쿠죠카와라 전투(六条河原の合戦)에서 노부요리와 요시토모는 패퇴했다고 말하고 있다. 

 로쿠하라에서 출격한 대장군이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의 적자인 시게모리(重盛)와, 동생인 요리모리(頼盛)였다는 것, 또 호리카와(堀河) 부근에서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에 시게모리가 화살을 맞은 말 위에서 떨어졌다가 목재 위로 활을 지팡이 삼아 다시 일어선 뒤에 말을 바꿔 탔다고 하는 일화는『愚管抄(구칸쇼)』『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서 공통되게 서술되고 있다. 하지만, 전자가, 시게모리가「ユユシク見ヘケリ(여유를 보였다)」라고 되어 있는 데에 반해, 후자는 겨우 사지(死地)를 벗어났다고 되어 있듯이, 전투에 관한 기술은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헤이지모노가타리』에서는 다이리로 쳐들어간 헤이시 측과, 오오미야오오지(大宮大路)와 면한 오오다이리(大内裏) 동쪽의 각문을 지키려 한 요시토모 측의 격투가 묘사되어 있다. 특히 타이켄몬(待賢門)에서는 헤이시의 대장인 시게모리가, 수비 측의 대장인 노부요리를 격파했기 때문에, 요시토모의 적자인 요시히라(義平)가 재차 시게모리를 격퇴하는 분전을 보였다. 이때, 헤이시 측은 「적을 속여 유인해 내었다」고 하며, 퇴각은 겐지 측을 불러낼 방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게모리는 호리카와(堀河)의 목재 위에서 간신히 내려서려던 것을 카마타 마사이에의 군에 둘러싸였고, 낭도인 「요자에몬노죠 카게야스(与左衛門尉かげやす)」들이 목숨을 걸고 카마타군에 뛰어들어서야 겨우 사지를 벗어났다고 한다. 이쿠호몬(郁芳門) 쪽을 공격한 요리모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이켄몬으로 통하는 나카미카도오오지(中御門大路)에서 퇴각했는데, 카마타 마사이에의 낭도가 내민 쿠마테(熊手)에 걸려 넘어졌으나, 헤이시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여기던 명검 누케마루(抜丸)에 의해 위기를 모면했다. 거기다 낭도 토나이 타로(藤内太郎)가 적 7, 8기를 쓰러트리면서 공격을 감행하는 동안 간신히 로쿠하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구칸쇼』에 따르면, 요시토모는 즉시 쿄의 마을 안으로 뛰어 들어가 사거리에서 낭도들과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고 하고 있기에, 문에서 헤이시 측과 교전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요시토모의 입장에서 보자면, 텐노가 부재중이라 텅빈 곳간이 되어버린 다이리에 고집할 의미는 없으니 오로지 로쿠하라로 가면 된다고 하는『구칸쇼』의 기술에 따랐을 것이다. 따라서, 타이켄몬 등에서 화려한 전투가 전개되었다고 말 하는『헤이지모노가타리』의 기술에는 작위성이 엿보인다.

 동서에서는 이쿠호몬에 있던 요시토모가 타이켄몬에서의 전투의 양상을 살피고 있었다고 나온다. 쿠사카 츠토무(日下力) 씨는, 본래 두 문 사이에는 오오이료(大炊寮), 다이젠시키(大膳職) 등이 있어 그걸 넘어 훤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타이켄몬에서의 전투에 대한 서술은 건물이 소실되어 이쿠호몬에서 타이켄몬이 훤히 보이게 된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의 창작이라 보고 있다. 

 또, 로쿠하라로 귀환한 헤이시 측도「カチテノ上ハ心モオチ居テ見物ニテコソアリケレ」라며『구칸쇼』에 나와있듯이, 헤이시 측은 승리를 거머쥐고 귀환하였으며, 귀족들도 이에 안심해 마음 놓고 지켜보았다 한다. 시게모리가 호리카와의 목재 위에의 활약에 대한 삽화(挿話)도, 선술한대로『구칸쇼』에서는 여유를 가지고 행동했다고 나온다. 이렇게 보면,『헤이지모노가타리』가 말 하는 것 처럼, 아슬아슬하게 귀환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어쩌면, 요시토모군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그중 일부가 헤이시 측과 조우했을 것이다. 어쩌면 헤이시의 대군에게 섬멸당할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부대를 분산시켰을지도 모르겠다. 헤이시 측은 다이리 탈환을 위해, 일부러 한발짝 물러나 겐지 측을 다이리로부터 유인해내는 작전을 취했을 것이다. 이 행동이「여세를 몰아(勝ちに乗じ)」라 기록된 것이라 생각된다.

『구칸쇼』에 따르면, 어찌됐든 요시토모들은 로쿠하라에 도달하여 한때는 저택 안에서 어느정도 소동이 일었으나, 감은 실로 미늘을 얽어맨 갑옷 차림에 검은 말을 탄 키요모리는 아무런 미동도 없어 그의 그런 모습은 참으로 듬직했다고 한다. 필시, 요시토모군의 실태를 다 파악하고 있었기에 동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헤이지모노가타리』에는, 로쿠하라에서의 격투가 묘사되어 있다. 전투의 모두(冒頭), 먼저 꾀병을 부린 노부요리가 전장을 빠져나갔다. 이어서 고죠카와라(五条河原)에서 양상을 살피던 미나모토노요리마사(源頼政)를, 화가 난 요시히라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쫓아 해산시켰으나, 요시토모의 심복인 야마노우치 스도(山内首藤) 씨 출신인 토시츠나(俊綱)가 전사했다는 기술이 나온다. 이러한 이야기들은『구칸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요리마사는 지쇼(治承) 4년(1180) 5월, 고시라카와의 아들인 모치히토왕(以仁王)과 함께 헤이시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병사를 일으켰다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같은 무문인 겐지라고는 해도, 셋츠 겐지(摂津源氏)의 선조인 미나모토노요리미츠(源頼光)로부터 그는 4대째, 한편 요시토모는 요리미츠의 동생이자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선조인 요리노부(頼信)로부터 5대째이기에 요리마사와 요시토모의 동족 의식은 희박했다. 첫번째로, 요리마사는 어디까지나 텐노의 명에 따라 적군(賊軍)을 토벌하는 입장에 있었기에 요시히라와의 교전이 사실이라 친다면, 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덧붙여 요리마사는 비후쿠몬인(美福門院)과 가까이 지내던 자로, 낭도인 시모코베(下河辺) 일족은 비후쿠몬인의 황녀인 하치죠인(八条院)의 장관(荘官)이었으며, 닌페이(仁平) 3년(1153)에는 비후쿠몬인의 쇼덴(昇殿)도 허락받았다. 비후쿠몬인과 니죠 텐노가 죽은 뒤에는 하치죠인을 모셨으며, 모치히토왕이 거병했을 때에 그를 따랐던 것도 모치히토왕이 하치죠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요시토모와 요시히라는 한 몸이 되어 로쿠하라를 공격하였고,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한 카이다테(垣楯)를 1, 2열 돌파했다고 하는데, 그 군세는 일족, 낭도를 포함해 20기 남짓이었다고 한다. 요시토모군이 요리마사군의 공격을 받고 카모 강(鴨川) 서쪽으로 물러났을 때, 헤이시의 심복인 이토 카게츠나(伊藤景綱), 타이라노이에사다(平家貞)의 공격을 받았고, 전사한 토시츠나의 부친인 스도 토시미치(首藤俊通), 카타기리 카게시게(片桐景重) 등이 적을 막으며 죽어나가는 사이에 요시토모는 탈출했다고 한다.

『구칸쇼』에서도 패배한 요시토모군은 10여기 남짓 남았을 정도였다 한다. 이는 전사자나 도망자가 나와 수가 줄어든 결과였는데, 어찌됐든 원래부터 병력이 적었다는 것은 틀림 없다. 요시토모의 패배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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