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572018.11.15 PM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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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5장 -싸움의 종식

 

 

三. 최후의 승자

 

◇ 츠네무네(経宗)와 코레카타(惟方)

~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가 죽임을 당하면서, 12월 29일에 발생한 병란(兵乱)은 일단 수습되었다. 29일, 니죠 텐노(二条天皇)는 로쿠하라(六波羅)에 있던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의 저택에서 하치죠(八条)에 있는 양모(養母)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다이리(内裏)가 전란으로 황폐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국모(国母)와 일체화 하는 것으로, 혼란에 의해 저하된 권위를 재흥(再興)하려는 의도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고시라카와 죠코(後白河上皇)는, 해가 바뀐 정월 6일이 되어서야 하치죠 호리카와(堀河)에 있던 후지와라노아키나가(藤原顕長)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죠코와 텐노가 모두 하치죠에 일시적 거주를 하면서 마치 하치죠가 왕권의 소재지(所在地)라는 모습을 보였다. 아키나가는 당시 정 3위 산기(参議)로, 시라카와인(白河院)의 심복인「밤의 칸파쿠(関白)」... 즉, 아키타카(顕隆)의 셋째 아들이자 코레카타(惟方)의 숙부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인의 근신이었기 때문에 인고쇼(院御所)로 고른 것이겠지만, 동시에 노부요리, 요시토모 측의 잔당의 움직임도 염려되고 있었던 만큼, 키요모리의 거점인 로쿠하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가 텐노와 죠코의 임시 거주지로 선택했을 것이다.

 덧붙여, 원래 하치죠 부근은 다이리에서 멀리 떨어진 쿄(京)의 남쪽 끝이라, 황족이나 상류 귀족은 거의 거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통의 발전과 함께 호화로운 저택이 늘어서게 된다. 토바인(鳥羽院)과 비후쿠몬인의 황녀이자 대장원의 영주였던 하치죠인(八条院)이 이 땅에 거주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되었다. 또, 나중에 후쿠하라(福原) 천도(遷都)에 실패한 키요모리가 새로운 궁도(宮都)의 중심으로 삼으려 했던 곳도 이 하치죠와 쿠죠(九条) 부근이었다. 

 이 시점에서의 승리의 입역자는 텐노를 탈출시키고 고시라카와인의 측근을 고립시켜, 키요모리를 진압을 위한 무력(武力)으로서 동원한 니죠 텐노의 측근인 츠네무네(経宗)와 코레카타(惟方)였다. 신제이(信西)가 매장당하고, 무력을 배경으로 대두한 노부요리도 멸망했다. 인을 가까이서 모시며 인정(院政)을 추진하려던 존재도, 그들과 정무의 주도권을 다투던 세력도 소멸했던 것이다. 이미 니죠 텐노의 친정(親政) 확립은 확실해졌으며, 코레카타가 그의 심복으로서, 츠네무네는 셋칸(摂関)으로서, 정무를 주도하게 되는 입장에 선 것이다.

 기세 당당하던 그들은, 친정 확립을 향해 강제적인 방책을 취했다. 고시라카와가 아키나가의 저택의 사지키(桟敷)에서 하치죠오오지(八条大路)의 민중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 츠네무네와 코레카타는 갑자기 목재를 쌓아두는 장소인 호리카와에 있던 판자들을 대어 고시라카와의 시계를 차단시켰다 한다. 고시라카와는 즉위후에도 이마요(今様)를 애호했는지, 민중의 예능을 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취미의 문제가 아니라, 약체화 한 왕권을 강화 할 수단을 민중과의 연결고리에서 찾으려 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그런 만큼, 사지키 봉쇄에는 짓궂음을 넘어, 고시라카와의 왕권을 부정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고시라카와에 대한 억압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다.『愚管抄(구칸쇼)』에는「カヤウノ事ドモニテ、大方此二人シテ世ヲバ院ニシラセマイラセジ、内ノ御沙汰ニテアルベシト云ケル」(이런 행위를 하면서 이 두 사람은 "인에게는 정권을 넘겨서는 안 된다. 텐노의 정무로 가야 한다"로 칭하였다)라고 나와있듯이, 츠네무네와 코레카타는 아무렇게나 트집을 잡아 고시라카와에게 압력을 가해 인정을 정지시키고 니죠 텐노의 친정을 실현시키려 한 행동이라 생각된다. 

 신제이, 노부요리, 요시토모를 모두 잃은 고시라카와에게는, 이미 의지 할 만한 심복은 없었다. 구석에 몰린 고시라카와는 키요모리에게 기대게 된다.『구칸쇼』에 따르면,「"ワガ世ニアリナシハ、コノ惟方・経宗ニアリ。コレヲ思フ程イマシメテマイラセヨ"」라며 키요모리를 맞이했다 한다. 世にありなし... 즉, 인정을 펼칠 수 있을지 말지는 츠네무네와 코레카타 두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일개 신하에게 죠코가 울면서 간원했다는 점에서, 고시라카와의 입장이 얼마나 약했는지를 엿볼 수 있으며, 키요모리와의 거리감을 보여주고 있다. 또, 그 자리에는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도 있었다고 하니, 그 역시 두 사람의 행동에 강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또, 헤이지의 난(平治の乱) 이전에 노부요리와 제휴하고 있던 관계로, 그의 입장은 악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만큼, 타다미치는 츠네무네에 의한 셋칸 탈취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이리하여, 타다미치는 고시라카와에게 접근해 함께 츠네무네를 축출하고자 계획을 짜게 되었을 것이다. 

『구칸쇼』에 따르면 키요모리도 내심 생각한 바가 있었던 듯 하며, 2월 20일에 타다카게(忠景), 타메나가(為長)라는 두 낭도를 다이리 내부로 파견하여 츠네무네와 코레카타를 체포했다. 그후의 처치는 믿기 어려웠다.『구칸쇼』가 기록한 대로에 따르면「コノ二人ヲカラメトリテ、陣頭ニ御幸ナシテ御車ノ前ニ引スヘテ、オメカセテマイラセタリケル(이 두 사람을 체포하여 다이리의 진두에 행차하신 고시라카와의 수레 앞으로 끌고와서 고문으로 그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를 다 들리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 지엔(慈円) 조차도「ソノ有サマハ、マガマガシケレバ、カキツクベカラズ(그 모습은 그야말로 꺼림칙했다)」는 말을 흘리고 있다.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과 산기 자리에 앉은 공경(公卿)이 체포되어 다름 아닌 다이리에서 고시라카와인의 눈 앞에서 고문을 받고 비명을 지르게 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관위를 가진 이에 대한 고문은 면제되었어야 하기에, 공경이 이렇게까지 굴욕적인 형벌을 받는 사태는 상상을 초월했다. 고시라카와에 의한 사형(私刑), 보복이나 다름 없었다. 이러한 행위는, 고시라카와의 특이성의 소산(所産)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타다자네(忠実)나 요리나가(頼長)에게도 자력구제(自力救済) 같은 행동은 발견된다. 시대의 산물(産物)이라고도 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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