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042016.12.02 PM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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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 ~사나다 가문을 재흥시킨 지장~

 

◇ 오오토 전투(大塔合戦)와 유키 전투(結城合戦)

~ 하지만 이 이후, 사나다(真田) 씨는 역사의 겉무대로부터 모습을 감춘다.

 이 다음으로 사나다 씨가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은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인 오에이(応永) 7년(1400)의 일이다.

 이 해, 시나노 슈고(信濃守護)인 오가사와라(小笠原) 씨의 입부(入部)에 반대한 코쿠진(国人)들이 봉기군을 형성하여 저항했다. 「다이몬지 잇키(大文字一揆)」라 불리운다.

 이 다이몬지 잇키에 네즈 토오미츠(禰津遠光) 휘하의 무사로서 「実田(사네다)」가 참전하고 있다(『大塔物語』). 네츠 씨는 시게노산케(滋野三家) 중 한 가문으로, 그 휘하에 속해 있는 「사네다(さねだ)」 씨야말로 「사나다(さなだ)」 씨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ね」 「な」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는 견해이다. 일견 견강부회(牽強付会)하겠지만, 이러한 발음 구별이 애매한 케이스는 적지 않다. 

 네즈 토오미츠가 이끌고 있는 무사들 중, 네즈 일문과 「사네다」 이외의 면면은, 사쿠라이(桜井), 벳푸(別府), 코다나카(小田中), 요코오(横尾), 마가리오(曲尾) 같은 무사들로, 이는 센고쿠시대(戦国時代)에 운노슈(海野衆)로서 확인할 수 있는 씨족이나 사나다 씨의 본거지인 사나다 고(真田郷) 주변의 지명을 성씨로 가진 무사들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보더라도 「実田(사네다)」 씨 = 사나다(真田) 씨라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어서, 사나다 씨의 소견이 발견되는 게, 에이쿄(永享) 12년(1440)의 유키 전투(結城合戦)이다.

 유키 전투는 카마쿠라 쿠보(鎌倉公方: 카마쿠라 후의 장관)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의 멸망 뒤, 잔당들이 그의 남겨진 자식인 아시카가 하루오마루(足利春王丸), 야스오마루(安王丸)를 받들어 거병한 것으로 인해 발발했다. 하지만,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에게 토벌당해 바쿠후로부터 칸토(関東) 지배를 맡아왔던 카마쿠라 후(鎌倉府)는 여기서 일단 멸망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시나노 슈고인 오가사와라 마사야스(小笠原政康), 오가사와라 모치나가(小笠原持長), 무라카미 요리키요(村上頼清)에게 통솔받으면서 바쿠후 쪽에 참전한 무사로서 「사나다 겐타(真田源太), 사나다 겐고(真田源五), 사나다 겐로쿠(真田源六)」가 발견된다(『信陽雑志』). 케묘(仮名: 성인식을 할 때에 붙이는 통칭) 앞에 「源」을 붙이는 이름은 센고쿠시대의 사나다 씨와 같았다. 여기서야 겨우, 사나다 씨와 직접적으로 이어진다고 여겨지는 선조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유키 전투가 일어났을 때에는 아시카가 하루오마루, 야스오마루를 따르다 야마가타 미노 뉴도(山県美濃入道)에게 목이 베인 「사나다」의 존재가 지적받고 있다(『永享記』 『鎌倉大草紙』). 이 때문에, 일견 사나다 씨는 바쿠후 쪽, 카마쿠라 후 쪽으로 나뉘어 참전한 것 처럼 보인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나다라는 이름을 쓰는 무사단은 보소 반도(房総半島)에도 소재하고 있었다. 나중에 보소 반도에서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가 되는 사토미(里美) 씨는, 아시카가 모치우지를 따랐던 세력이다. 따라서, 카마쿠라 후 쪽에서 싸웠던 사나다 씨는 사토미 씨에게 피관(被官)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시나노의 사나다 씨와는 전혀 다른 계통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 등장 이전의 사나다 씨의 족적이다. 너무나도 그 흔적이 적어 놀라워하실 분도 있지 않을까? 

 

 

 

◇ 사나다(真田) 「유키타카(幸隆)」의 실명(実名)

~ 센고쿠시대(戦国時代)의 사나다(真田) 씨는 에이쇼(永正) 10년(1513)에 태어난 유키타카(幸隆)를 초대로 한다. 하지만, 동시대의 확실한 사료에서는 「유키타카(幸隆)」라는 실명(実名)을 확인할 수 없다.

 먼저 텐분(天文) 9년(1540/ 다만 부기된 간지는 텐분 8년의 것), 유키타카는 생모인 교쿠소테이인 다이젠니(玉窓貞院大禅尼)의 공양을 코야 산(高野山)에 있는 렌게죠인(蓮華定院)에 의뢰했다. 그런데, 렌게죠인의 공양장(供養帳: 공양 의뢰를 정리한 장부로 과거장의 일종)을 보면, 시주는 「真田弾正忠幸綱(사나다 단죠노츄 유키츠나)」라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에이로쿠(永禄) 5년(1562) 6월 13일자로 야마가 진쟈(山家神社)에 봉납된 이타도비라(板扉)에 「大檀那幸綱幷信綱」로 부자가 함께 주서(朱書)되어 있다. 

 즉, 유키타카의 정확한 실명은 「유키츠나(幸綱)」인 것이다. 

 그렇다면 「유키타카」라는 실명이 처음 발견되는 것은 어떤가 하면, 앞에서 말한 『칸에이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이다.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명령으로 여러 다이묘(大名)들이 제출한 계보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다. 이때, 유키츠나의 손자인 노부유키(信之)는 아직 살아 있었다. 따라서, 「유키타카」가 정확한 실명인 것 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최초의 실명이 유키츠나이고, 나중에 유키타카로 개명했다는 견해도 있다. 또, 아무래도 조부의 이름을 착각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실은 「유키츠나」 쪽이 자연스럽다. 유키츠나의 외조부... 혹은 장인인 운노 무네츠나(海野棟綱)를 시작으로 유키츠나, 노부츠나(信綱)로 삼대로 이어진 「綱」라는 글자를 실명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에도시대 이전의 일본인의 실명은 보통 한자(漢字) 두 글자로 이뤄졌다. 이중 한 글자로 그 가문이 대대로 사용한 글자를 넣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대대로 실명에 사용해온 글자를 토오리지(とおりじ) 혹은 츠지(つうじ)라 한다(둘 다 通字로 표기). 이 경우 「綱」를 츠지로 대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반대로 아무런 이유 없이 츠지를 버린다는 것은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왜... 사나다 노부유키는 『칸에이쇼카케이즈덴』 편찬 당시에 조부의 이름을 「유키타카」라 신고했던걸까?

 우선 전제로서 일러두고 싶은 것은, 이 계보에 기록되어 있는 센고쿠시대의 부쇼(部将)들의 실명 대부분이 엉망진창이라는 점이다. 딱히 노부유키 혼자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코야 산 렌게죠인의 공양장으로 대표되는 과거장(過去帳) 류는, 「유키타카」의 이름을 「잇토쿠사이(一徳斎)」라는 재호(斎号)와 한 세트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유키츠나가 출가했을 때에 잇토쿠사이 코류(一徳斎幸隆)라는 호(号)를 썼을 가능성이 남겨진다. 즉, 실명이 아니라 법명(法名)이 아닐까... 라는 것이다. 그 법명이 손자 세대에는 실명으로 잘 못 받아들여진 게 아니었을까? 

 센고쿠시대의 사나다 가문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 잘못을 바로 잡고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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