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052016.12.02 PM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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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 ~사나다 가문을 재흥시킨 지장~

 

◇ 운노 무네츠나(海野棟綱)와의 관계

~ 센고쿠시대(戦国時代) 사나다(真田) 씨의 계보를 아는 데에 있어서 자주 참조되는 게 『白鳥神社海野系図(시라토리진쟈운노케이즈)』이다.

 시라토리 진쟈(白鳥神社)는 운노(海野) 씨의 우지가미(氏神)이기에, 대대로 그 신에 대한 숭경(崇敬)이 깊었다. 이 계보에는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 계보상으로는 「유키타카」)는 운노 무네츠나(海野棟綱)의 딸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다.

 『滋野正統家系図(시게노세이토케케이즈)』도 거의 같은 모양으로, 운노 무네츠나의 데릴사위가 사나다 단죠노츄(真田弾正忠)이며, 유키츠나(유키타카)는 그의 자식이라 한다.

 그렇다면 유키츠나의 부친은 어떨까? 유키츠나의 동생인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의 보다이지(菩提寺) 료센지(良泉寺)에서 전해지는 『良泉寺矢沢氏系図(료센지야자와시케이즈)』에 따르면, 야자와 요리츠나(처음 이름은 츠나요리, 사나다 겐노스케)는 사나다 우마노스케 요리마사(真田右馬佐頼昌)의 셋째 아들이라 한다. 

 따라서, 사나다 유키츠나의 부친은 운노 무네츠나의 데릴사위이며, 사나다 우마노스케 요리마사라는 게 현재의 통설이다. 다만, 요리마사라는 실명(実名)은 『료센지야자와시케이즈』가 거의 유일한 전거(典拠)라 할 수 있다. 그런데다 이 계보의 성립은 겐로쿠(元禄) 9년(1696)이라 확증은 없다.

 한편으로, 유키츠나 자신을 운노 무네츠나의 데릴사위라 보는 설도 근년에 제시되게 되었다. 이것은 『시라토리진쟈운노케이즈』의 공들인 검토에 기반한 것으로, ① 운노 무네츠나의 딸과 유키츠나(유키타카) 사이에는 선이 그어저 있지 않다는 것(모자관계라 명기되지 않는다는 것), ② 이 계보에서는 같은 세대 인간은 반드시 계보 상단에 옆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유키츠나는 무네츠나의 딸 아래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 ③ 운노 유키요시(幸義)에게 「실은 무네츠나의 동생이다(実棟綱弟也)」라 주기(注記)가 붙어있다는 것, ④ 유키츠나에게 「실은 유키요시의 조카이다(実幸義甥也)」라 나와있다는 것 등의 사실 때문에, 이 계보는 운노 무네츠나의 딸과 사나다 유키츠나의 혼인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다, 신뢰성이 높다고 여겨지는 『信州滋野三家系図(신슈시게노산케케이즈)』에서도 유키츠나에게 「海野小太郎聟成相続(운노 코타로의 사위가 되어 상속하다)」라는 주기가 있는 점을 지적하며, 유키츠나를 운노 무네츠나의 데릴사위로 놓고 있다. 또, 운노 무네츠나의 생년은 불명이긴 해도, 이쪽이 세대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경시할 수 없는 내용을 가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나다 유키츠나의 다섯 아들은 모두 가신인 카와라 타카마사(河原隆正)의 누이동생이 낳았다. 이 점에 약점이 남겨진다.

 이렇듯, 현재는 유키츠나를 운노 무네츠나의 외손(데릴사위의 아들)이라 보는 통설과, 본인을 데릴사위로 보는 새로운 설이 공존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유키츠나의 친아버지로서 소견이 발견되는 것은 요리마사 뿐이다. 요리마사는 타이에이(大永) 3년(1523)에 죽었다고 한다. 법명(法名)은 사나다 도탄 다이젠죠몬(真田道端大禅定門)이라 전한다.

 운노 무네츠나에 대해서는 상세한 부분은 알 수 없다. 발급 문서도, 운노령(領)의 주민이 코야 산(高野山)으로 등산할 때 숙박할 숙소를 렌게죠인(蓮華定院)으로 정한다... 라는 숙소계약서가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16세기 초두의 발급 문서가 남겨져 있는 「쿠니슈(国衆)」는 많지 않기 때문에 귀중한 사료이다.

 부친의 실명이 유키무네(幸棟), 적자의 실명은 유키요시라 전하고 있어, 센고쿠시대에는 「幸」를 대대로 츠지로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네츠나가 왜 「幸」를 사용하고 있었는지는 판별할 수 없다. 유키무네, 유키요시 모두 1차 사료상에서 발견되는 실명이 아니기 때문에, 센고쿠시대 초기의 운노 씨의 츠지도 「綱」이며, 「幸」가 붙은 실명은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타이에이 4년(1524) 7월에 부친인 유키무네의 공양을 렌게죠인에게 의뢰하고 있다(『真田御一家過去帳』). 이것은 유키무네의 기일이 아니라 공양의뢰일이기에, 부친이 언제 죽었는지는 불명이다. 애당초 코야 산에서의 공양에는 역수(逆修: 생전) 공양이 많기 때문에, 유키무네의 몰년이 이 이전이라고 한정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부친의 공양 의뢰일이 사나다 요리마사가 죽은 다음해라는 점이 주목받아, 역시 운노 무네츠나를 사나다 유키츠나의 외조부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을지 모르겠다.  

 

 

 

◇ 「사나다 우마노스케 츠나요시(真田右馬助綱吉)」란 어떤자인가?

~ 이렇게 보면, 한가지 깨닫게 되는 점이 있다. 『良泉寺矢沢氏系図(료센지야자와시케이즈)』에서,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가 사나다 우마노스케 요리마사(真田右馬佐頼昌)의 「셋째아들」이라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는 유키츠나(幸綱) 다음에 태어난 동생이기 때문에, 차남이어야하는데 어째서 셋째인걸까?

 그래서, 재차 타케다(武田) 가신단을 조사해보면 「사나다 우마노스케 츠나요시(真田右馬助綱吉)」라는 인물의 존재가 주목된다. 에이로쿠(永禄) 10년(1567)에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이 가신과 종속 쿠니슈(国衆)로부터 충성을 서약하는 기청문(起請文)을 일제히 징수했을 때에 「운노슈(海野衆)」의 일원으로서 기청문을 제출한 인물이다. 이 시기의 운노(海野) 씨의 당주는 타케다 신겐의 차남인 류호(龍芳 = 隆宝: 고쇼도사마)로, 류호는 병약한 데다 두 눈이 실명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운노 씨의 가정(家政)은 실질적으로는 가로(家老)인 오구사노 타카요시(小草野隆吉)를 중심으로 하는 합의제(合義制)로 운영되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 일원이 사나다 츠나요시였다. 

 이 기청문에 서명한 면면들은 츠나요시 이외에 토키타 츠나토미(常田綱富), 오노야마 모리시게(小野山守重), 카미오 후사토모(神尾房友), 카나이 후사츠구(金井房次), 시모야 무네요시(下屋棟吉), 나라모토 무네히로(奈良本棟広), 이시이 무네요시(石井棟喜), 사쿠라이 츠나요시(桜井綱吉), 사쿠라이 무네마사(桜井棟昌), 오구사노 타카요시, 운노 유키미츠(海野幸光)로 이뤄져 있다. 일견 알 수 있듯이, 실명의 앞 글자에 「棟」 「綱」를 쓰고 있는 인물이 많다. 이들은 운노 무네츠나(海野棟綱)로부터 편휘(偏諱)를 받은 인물들일 것이다. 편휘라는 것은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부터 이름 중 한 글자를 배령받아 개명하는 것을 말한다. 성인식을 할 때에 주어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성인이 된 뒤에 유력자로부터 편휘를 받아 관계를 강화하기도 한다. 그러한 행위 자체가 이 집단이 운노 씨 가신단임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가로인 오구사노 타카요시는 「棟」 「綱」 중 어떤 편휘도 받지 않았는데, 혹시 운노 류호(龍芳 = 隆宝)로부터 편휘를 받기라도 했던걸까? 

 말미에 서명한 운노 유키미츠는 『白鳥神社海野系図(시라토리진쟈운노케이즈)』에 따르면 운노 유키요시(海野幸義)의 적자로, 누이동생이 운노 류호에게 출가했다. 오구사노 타카요시와 함께, 운노슈를 통괄하는 중심에 위치해 있었을테지만, 가독(家督) 계승은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시라토리진쟈운노케이즈』는, 별가(別家)인 토노하라 운노(塔原海野) 씨를 운노 무네츠나의 차남으로서 계보를 잇고 있기 때문에, 사용에는 다소 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 운노슈들 중 토키타 츠나토미와 시모야 무네요시는 사나다 유키츠나의 동생인 토키타 타카나가(常田隆永)의 차남과 셋째아들에 해당한다(『系図纂要』). 따라서, 사나다 씨의 서류가(序流家)는 반드시 사나다의 가신이 되었던 게 아니며, 운노슈의 일원으로서 타케다 가문을 모셨다. 그 중 한 사람이 사나다 우마노스케 츠나요시였다.

 여기서, 어째서 츠나요시에게 고집하고 있는가 하면, 츠나요시의 칸도나(官途名)인 「우마노스케」가 유키츠나의 부친인 요리마사(우마노스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右馬助」 「右馬佐」로 차이는 있지만, 이 경우 「佐」가 오기(誤記)이고 「助」 쪽이 정확하다. 중근세 사회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실명을 부르는 게 실례가 되는 행위였다. 이 때문에, 성인식을 하고 쓰게 되는 케묘(仮名: 타로, 지로 등의 「아자나」, 일종의 미들 네임)나, 본래라면 조정으로부터 수여되는 관위(官位: 칸도나, 즈료나)를 호칭으로 사용했다. 칸도나라는 것은 중앙성청(中央省庁)의 관위, 즈료나(受領名)라는 것은 지방관의 관위를 가르킨다. 하지만 이 시대는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정식으로 수여하는 게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레벨을 제외하면 전무해서, 자신의 주군으로부터 사용하는 것을 허락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일견 무의미한 행위긴 했지만, 조정의 관위를 가신 통제에 이용한 것이다. 덧붙여, 조정의 관위에는 이카이(位階)라 불리우는 각각의 랭크가 있었지만, 그것은 모조리 무시되었다. 이 가문의 당주라면 이 정도 관위를 쓰는 것을 허락한다는 형태를 취했다.

 따라서, 이러한 통칭은 대대로 습명(襲名)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마노스케」의 일치는 무시할 수 없다. 우마노스케 츠나요시는 우마노스케 요리마사의 자식이며, 게다가 장남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라는 것이 근년에 들어 지적받게 되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유키츠나는 차남이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 그의 동생이기 때문에, 야자와 요리츠나는 셋째아들이 된다... 라는 뜻이다. 

 어째서 츠나요시가 운노 가문의 일원으로 매몰되었으며, 유키츠나가 신겐의 밑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그것은 각자가 세운 공적의 차이였을 것이다. 또, 원래부터 운노 무네츠나로부터 편휘를 받았을 때, 사나다 츠나요시, 야자와 요리츠나(첫 이름은 츠나요리. 타케다 카츠요리로부터 「頼」를 받아서 개명)가 「綱」였던 데에 반해, 사나다 유키츠나는 운노 씨의 츠지인 「幸」를 받고 있다. 유키츠나만이 이 단계에서 이미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유키츠나가 사나다 요리마사와 운노 무네츠나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 취급을 받았거나, 유키츠나의 아내가 운노 무네츠나의 딸이었기 때문이리라. 후자였다고 해도, 형인 츠나요시가 아니라 유키츠나가 혼인상대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유키츠나는 사나다 가문의 차남이긴 했지만, 요리마사의 정실(正室)이 낳은 적자였다고 생각된다. 

 덧붙여, 타케다 가문 멸망 이후인 텐쇼(天正) 11년(1583)에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가신으로서 「真右」라는 인물이 확인되는데 이것은 사나다 우마노스케(真田右馬助)의 약칭이라 여겨진다. 츠나요시나, 그의 아들인 우마노죠(右馬允)였을 것이다. 사나다 우마노죠는 그 이후에 사나다 씨를 떠나 케이쵸(慶長) 5년(1600) 6월에 코모로 성(小諸城: 코모로 시)의 성주인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를 모시게 되었고, 지교(知行) 300관문을 받았다(토요오카 시 교육 위원회 기탁 『略家譜』). 우마노죠는 겐나(元和) 9년(1623) 11월 28일에 죽었다(렌게죠인 『過去帳月坏信州小県分第一』). 공양을 한 시주는 옛 야자와 가문의 가신이자, 사나다 가문의 지키신(直臣)이 된 쇼무라 킨에몬(正村金右衛門)이다. 

 이와 관련해서 야자와 요리츠나에 대해서도 검토해봐야할 점이 지적받고 있기에 잠깐 다뤄보려 한다. 요리츠나는 유키츠나의 동생이긴 했지만, 근세 초기의 계보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확실한 사료상의 첫 발견도 텐쇼 3년이라 이상할 정도로 늦다(후술할 운노타이라 전투에서는 단순히 「야자와」라고만 나와있어, 요리츠나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신경이 쓰인 게 에이로쿠 2년(1559)에 렌게죠인에 「哲溲正賢大禅定門」의 공양을 의뢰하고 있는 「운노 사츠마노카미(海野薩摩守)」의 존재이다(『真田御一家過去帳』). 사츠마노카미는 요리츠나가 나중에 쓰게 되는 즈료나이기에, 기재된 법명도 요리츠나의 「剱光院殿来叟良泉居士」와 「叟(溲)」라는 글자가 일치한다. 어쩌면, 이 사츠마노카미가 유키츠나의 동생이며 야자와 가문의 가독을 이었고, 요리츠나는 그 자식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실은 요리츠나, 요리유키(頼幸) 부자의 생년은 두가지가 전해지고 있어 확증이 없다. 본서에서는 통설대로 요리츠나를 유키츠나의 동생으로 다루겠지만, 검토할 여지는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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