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072016.12.03 AM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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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 ~사나다 가문을 재흥시킨 지장~

 

◇ 유키츠나(幸綱)의 타케다(武田) 가문 종속

~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上杉) 세력의 시나노(信濃) 출병은 싱거운 마무리를 맞이했다. 이것에 의해,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는 다른 길을 찾게 된다.

 텐분(天文) 11년(1542) 6월 24일, 카이(甲斐), 시나노의 여러 세력에게 격진이 몰아쳤다.

 전년에 가독(家督)을 찬탈한 타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가, 동맹국의 스와 요리시게(諏方頼重)를 급습한 것이다. 이 해 4월, 스와 요리시게와 하루노부의 누이동생인 네네(禰々)와의 사이에서 아들인 토라오(寅王)가 태어났으며, 11일에 참배를 막 끝낸 참이었다. 

 요리시게에게서는 하루노부의 쿠데타에 이의를 제기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노부토라(信虎) 추방 이후에도 변함 없는 우호관계를 맺고있다는 인식을 가졌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하루노부 측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전년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에 의한 사쿠(佐久), 치이사가타 군(小県) 출병이 있었을 때에, 스와 요리시게가 사쿠 군에서 세력을 확대한 적이 있었다. 하루노부는 이를 새치기 행위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神使御頭之日記(신시고토노닛키)』에 「甲州の人数も村上殿も身をぬかるる分ニ侯て」라 나와있는 것은, 새치기 행위라는 인식이 스와 타이샤(諏訪大社)의 신관들 사이에서 존재해, 악재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루노부는, 그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6월 29일, 돌연 스와 군(諏訪郡)으로 침입한 타케다군을 앞에 두고, 요리시게는 제대로 된 방어전 준비 한번 해보지 못하고 7월 4일에 항복한 뒤 코후(甲府)로 호송된다. 그리고 21일, 동생인 요리타카(頼高)와 함께 할복명령을 받게 된다. 명문가 스와 씨의 어이없는 멸망이었다. 

 이러한 추이를 유키츠나가 봤을 때 어떠했을까? 유키츠나를 코즈케(上野)로 쫓아낸 세 씨족들 중, 타케다 노부토라는 하루노부에게 추방당하고, 스와 요리시게도 하루노부에게 멸망당했다. 즉, 유키츠나에게 있어서 하루노부가 가독을 이은 타케다 씨는 적이 아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타케다 씨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의 관계도 변화했다. 두 가문은 종래에 동맹관계에 있었지만,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의 사쿠, 치이사가타 출병으로 관계가 냉랭해졌다. 동맹의 파국은 텐분 14년(1545)에 찾아왔다. 타케다 하루노부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사가미(相模)의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 모두와 동맹관계를 맺고있었지만, 이마가와, 호죠 두 나라는 당시 적대관계에 있었다. 동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본국인 스루가 동부를 점령한 호죠 씨에게 공세를 가했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도 호죠 쪽인 무사시(武蔵) 카와고에 성(河越城: 사이타마 현 카와고에 시)을 포위했다. 이 모두와 동맹을 맺고있던 하루노부는 사태를 단번에 해결해 보리라 생각해, 이마가와, 호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의 「삼자화친(三和)」을 제안한 것이다. 세 다이묘도 이를 받아들여 호죠 우지야스는 스루가 동부를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반환하고 화친을 맺었다. 그런데,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카와고에 포위를 계속해 수락했어야할 화친을 무시하는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이는 호죠 우지야스에 대한 배신행위였음은 물론이고, 화친을 중개한 하루노부의 면목을 묵살한 행위였다. 이마가와 씨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된 우지야스는 반전공세에 나서서 우에스기 세력을 격퇴, 궁지를 벗어났다. 동시에, 타케다,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동맹도 사실상 붕괴되었다. 

 어쩌면 유키츠나가 하루노부를 의지했던 것은, 이 무렵이었을 텐분 16년(1547), 사쿠 군 침공을 진행시킨 하루노부는, 시가 성(志賀城: 사쿠 시)을 포위했다.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시가 성 구원군을 파견해 오타이하라(小田井原: 나가노 현 미요타 마치)에서 타케다 세력과 충돌한다. 결과는 타케다 측의 압승이었다.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와 타케다 씨의 동맹 파기를 확인할 수 있었음과 동시에, 이 이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가 시나노로 침공할 수 없게 된다. 옛 영지 복귀라는 운노(海野) 일족의 꿈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이 전투를 모델로했다고 여겨지는 기술이, 타케다 가문의 역사를 담은 군기물(軍記物) 『甲陽軍鑑(코요군칸)』에 「碓氷峠合戦(우스이 고개 전투)」로서 발견된다. 거기에는, 사나다 유키츠나의 이름이 타케다 편으로서 기록되어 있다. 유키츠나는 일찌감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를 떨쳐내고, 타케다 하루노부에게 종신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 토이시 성(砥石城) 공략과 본령 복귀

~ 『甲陽軍鑑(코요군칸)』에 따르면, 유키츠나(幸綱)의 타케다(武田) 가문 사관은 하루노부(晴信) 쪽으로부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상으로 즉각 본거지인 사나다 고(真田郷)가 주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사나다 고는, 무라카미(村上) 씨의 군사적 거점인 토이시 성(砥石城: 우에다 시)과 지근거리에 있었다. 무라카미 씨의 세력권 안에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나다 고 복귀는 물리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거기다 텐분(天文) 17년(1548)에 타케다군은 우에다하라 전투(上田原合戦)에서 무라카미 측에게 대패를 맛봐 북진책은 중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텐분 18년(1549) 3월 14일, 유키츠나는 하루노부의 명령을 받고 같은 시게노(滋野) 일족인 사쿠 군(佐久郡)의 쿠니슈(国衆) 모치즈키 겐자부로(望月源三郎)에게 700관문을 준다는 용주인장(龍朱印状)을 건내는 사자를 맡았다. 덧붙여, 용주인장이라는 것은, 하루노부가 만들어낸 타케다 가문의 공문서로, 카오(花押)를 대신해 용 모양이 새겨진 주인을 찍은 것이다. 당연히, 이 이전에 유키츠나 자신도 영지를 얻었을테지만, 이른바 당장의 수당(宛行)이었던 듯 하다. 익년 7월 2일, 하루노부는 유키츠나에게 「본의(本意)」를 전달한 다음, 스와가타(諏訪形) 300관문과 요코타 유적(横田遺跡) 카미죠(上条) 700관문을 더한 합계 1000관문에 달하는 영지를 주기로 약속했다. 스와가타, 카미죠는 본령인 사나다 고 부근에 있는 지명이며, 여기서 말한 「본의」라는 것은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에게 설욕을 갚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키츠나는 본령 탈환을 위해, 하루노부의 시나노(信濃) 침공에 온 힘을 다하게 된다. 

 텐분 19년(1550) 8월 말, 하루노부는 토이시 성을 정찰하러 나섰다. 29일에는 스스로 실지검분(実地検分)을 행하고 화살을 쐈다. 이는 어쩌면, 공격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쟁을 행하기 전의 주술적인 의식이었으리라. 사츠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씨가 분고(豊後)의 오오토모(大友) 씨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분고를 향해 조복(調伏: 저주)을 담은 활을 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上井覚兼日記』). 어쩌면 이와 같은 행위가 아니었을까? 9월 3일에는 토이시 마기와(間際)에 진을 치고, 9일에 드디어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의 개전이었던 듯 하다.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토이시 포위에 위기감을 느꼈다. 전쟁 중이었던 타카나시 마사요리(高梨政頼)와의 화친을 성립시키고, 반전하여 타케다 쪽의 테라오 성(寺尾城: 나가노 시)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원군으로서 선택된 것은 유키츠나로, 23일에 테라오로 파견되어 28일까지 무라카미 세력을 철수시켰다. 토이시 공략군으로의 복귀는 29일이다.

 그렇지만, 하루노부는 토이시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키츠나가 귀진한 다음날인 30일에 철수가 결정되었다. 10월 1일, 철수하는 타케다군을 배후로부터 무라카미군이 급습했다. 「토이시쿠즈레(砥石崩れ)」라 불리운 대패였다. 유키츠나의 본령 복귀의 꿈이, 타케다 씨의 시나노 북부 진출이 짓밟힌 것 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런 토이시 성을 유키츠나는 어이없게 공략해버렸다. 텐분 20년(1551) 5월 26일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코요군칸』(하루노부의 측근인 코마이 코하쿠사이의 집무기록이라 여겨진다)에는 「砥石ノ城真田乗取(토이시 성을 사나다가 빼앗다)」라는 담담한 기술만이 있어, 군사적 행동이 아니라, 모략(謀略)에 의한 공략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다만 이 이후, 토이시의 「재흥(再興)」이 화제로 올라와있기 때문에, 성곽의 수복이 필요할 정도의 전투는 있었던 듯 하다. 

 사정은 확실하지 않지만, 『코요군칸』에는 유키츠나가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속여서 쳤다고 하는 일화가 실려있다. 거기에 따르면, 유키츠나는 운노슈(海野衆)인 스노하라 와카사(春原若狭), 소자에몬(惣左衛門) 형제를 요시키요 곁으로 파견해 「사나다의 성을 빼았아 보일터이니, 실력이 뛰어난 무사들을 빌려주십시오」라고 말하게 했다. 요시키요가 기뻐하며 파견한 500명이 유키츠나의 거성에 있는 니노쿠루와(二ノ曲輪: 니노마루)에 들어가자마자, 본성(本城: 혼마루)와 산노쿠루와로부터 협공을 해 섬멸시켰다고 한다. 이 이야기 자체는 토이시 성 공략에 대한 일화는 아니지만, 운노(海野) 일족을 써먹고 있었다는 진실미가 있다. 덧붙여, 형인 와카사는 운노 씨 가로(家老) 오구사노(小草野)로의 개명(改名)을 허락받아, 운노 씨에게 양자로 들어간 하루노부의 차남 류호(龍芳)의 필두 가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오구사노 와카사노카미 타카요시(小草野若狭守隆吉)이다. 즉, 실존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토이시 공략에 의해, 유키츠나는 드디어 염원하던 사나다 고 복귀를 달성한다. 또, 이 결과 유키츠나는 타케다 씨 피관이라는 신분을 유지하면서도, 사나다 고에서의 영국내 자치권을 유지하는 「쿠니슈」라는 신분도 회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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