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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122016.12.05 PM 08:45
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사나다령(真田領) 검지(検地)
~ 앞에서 말한대로,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텐쇼(天正) 6~7년 무렵에 영내 검지(検地)를 실시했다.
현재 남겨져 있는 『真田氏給人知行地検地帳(사나다시큐닌치교지켄치쵸)』는 앞부분이 빠져 있고, 본거지 부근의 하라노 고(原之郷: 우에다 시 사나다 쵸 모토하라) 일대 부분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영내 검지에서 검지를 행했으리라 여겨진다.
다소 시간을 두고 있지만, 형인 노부츠나(信綱)로부터 가독(家督)을 계승함에 따라 대신하게 된 검지였을 것이다. 검지장에는 종이철 목인(目印)으로서 인문(印文) 「頼綱」라는 검은 인이 찍혀있어, 숙부인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가 켄치부교(検地奉行)를 맡았던 듯 하다.
이 검지는 토지에 대한 평가를 돈으로 나타내는 칸다카제(貫高制)로 실시되어 있으며, 또, 밭, 논, 주택에는 상중하로 등급이 매겨져 있다. 각 논밭에 어느 정도의 볍씨를 싹틔울 수 있는가 하는 「마키다카(蒔高)」도 기록되어 있어, 모두 타케다(武田) 씨의 검지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거기다 각각의 토지에는 「본고(本高)」와 「견출(見出)」이라는 기재가 발견된다. 「본고」는 검지 실시 전의 칸다카, 「견출」은 검지에 의한 증가분을 가르키는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사나다 씨가 영내 검지를 행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적어도, 노부츠나의 시대에는 검지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사나다 씨 같은 쿠니슈령(国衆領)의 검지는, 종속된 곳의 다이묘의 방식을 흉내내면서도 쿠니슈 자신이 실시하는 게 통례였다. 따라서, 타케다 씨가 파악하고 있는 사나다 씨의 지행고(知行高)와, 사나다 씨가 파악하고 있는 자신의 영지의 칸다카는 달라지게 된다.
덧붙여,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단계의 검지는 일반적으로 「사시다시 검지(指出検地)」라 부르며, 촌락으로부터의 자진 신고를 그대로 써올리는 것이라 여겨지기 쉽상이지만, 실제로는 검지를 담당하는 역인(役人)을 촌락으로 파견해 조사를 행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시다시(指出)」는 「검지」와는 달리 병행해서 실시할 수 있었다. 영주가 교대되면, 촌락은 「사시다시」를 제출해서 지금까지 어떤식으로 연공을 바쳤는지를 신고하고, 영주는 그것을 답습해서 「검지」를 행해 현상황을 재조사하는 것이다. 이 점은 자주 오해를 받는다. 하지만, 센고쿠 다이묘, 쿠니슈가 꼼꼼하게 측량을 해서 검지를 했던 것도 아니다. 이 점은 제 5장에서 타이코 검지(太閤検地)에 대해 언급할 때에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 누마타 성(沼田城) 공략
~ 텐쇼(天正) 6년(1578) 3월, 「不慮之虫気」에 의해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급서한다.
유언에 의해 양자이자 조카인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가 뒤를 이었지만, 카게카츠에게 반발한 가신들이 또 한명의 양자인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景虎)를 옹립하면서 거병했다.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이라 불리우는 집안 소동의 시작이다.
우에스기 카게토라는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의 친동생이었지만, 당시 우지마사는 히타치(常陸)의 사타케(佐竹) 씨와 대진 중이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호죠 우지마사가 동생의 지원을 의뢰했던 게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였다.
타케다 가문과 호죠 가문은 3년동안 단절한 상황이긴 했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동맹관계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이후, 동맹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우지마사의 누이동생이 카츠요리에게 시집을 왔다. 따라서 타케다 카츠요리는 호죠 우지마사의 매제에 해당한다. 카츠요리는 요청을 쾌락하여 에치고(越後)로 진군을 개시했다.
그런데 그 도중에 호죠 우지마사로부터 카츠요리에게 항의가 들어왔다.
오타테의 난에서 코즈케(上野)의 우에스기 쪽의 거점인 누마타 성(沼田城: 누마타 시)의 여러 장수들이 우에스기 카게토라를 지지하고 있었다. 즉, 호죠 편이었다. 그에 반해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가 누마타 성을 노리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에 놀란 카츠요리는 마사유키를 나무라며 쓸 데 없는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2년 뒤에 공략하게 되는 누마타 땅에, 마사유키는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타테의 난은 예상 외의 경위를 맞이하게 되었다. 북진하는 타케다세에게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화친을 요구하는 사자를 파견해 왔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인 카츠요리는, 우에스기 가문의 본거지인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 아래에 포진. 카게카츠, 케게토라의 화평조정에 나섰다. 어쩌면 카츠요리로서는 오타테의 난이 지속되다 보면 오래 비워두고 있는 본국을 오다(織田)나 토쿠가와(徳川) 씨에게 노려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군세를 이끌고 성아래에 주둔해 있는 카츠요리가 조정을 진행하게 됨에 따라, 카게카츠와 카게토라 사이의 화친은 일단 성립되었다. 그렇지만 집안 소동에서 쌍방을 납득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카츠요리가 카이(甲斐)로 돌아가자, 화친은 어이없이 파기되었다. 텐쇼 7년 3월, 우에스기 카게토라가 자결하는 형태로 오타테의 난은 종결된다. 이러는 동안, 카츠요리는 거듭되는 우에스기 카게카츠로부터의 원군 파견 요청을 묵살했는데, 중립적인 태도 그 자체가 호죠 우지마사에게는 배신처럼 보였다. 호죠 우지마사에게 있어서 카츠요리는 「동생을 죽게 내버려 둔 원수」가 되어 있었다.
양국 사이의 긴장은 나날이 높아져 갔다. 텐쇼 7년 9월, 결국 타케다, 호죠의 동맹은 파기되고, 양군은 스루가(駿河), 이즈(伊豆) 국경에서 대진하게 된다.
동맹 파기에 의해, 이와비츠 성(岩櫃城)의 성장(城将)인 마사유키는 그야말로 물만난 물고기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텐쇼 7년 8월에 코즈케의 중심에 위치한 마야바시(厩橋)의 모리 호죠 호린(毛利北条芳林: 타카히로. 우에스기 씨의 옛 가신)은 호죠 씨를 배신, 타케다 쪽에 붙어버렸기 때문에, 마사유키의 목표는 역시나 누마타를 향했다.
텐쇼 8년(1580)에 들어서자, 마사유키는 누마타로 메츠케(目付)를 파견해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덧붙여, 텐쇼 7년 12월에 카츠요리의 적자인 타케오마루(武王丸)가 성인식을 치러 노부카츠(信勝)라는 이름을 받았고, 카츠요리는 수많은 가신들에게 새로이 칸도나(官途名)와 즈료나(受領名)를 주었다. 마사유키는 이 때에 키효에노죠(喜兵衛尉)에서 아와노카미(安房守)가 되었다. 이 아와노카미라는 칸도나는 호죠 가문에서 코즈케 공략을 지휘하고 있던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 우지마사의 동생)와 같은 것이었기에, 우지쿠니에 대한 대항의식에서 이 이름을 쓰도록 명령한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최초의 목표는 오가와 성(小川城: 군마 현 미나카미 쵸)이었다. 텐쇼 8년 2월 24일, 마사유키는 성주인 오가와 카유사이(小川可遊斎)의 가신 코스게 교부노쇼우(小菅刑部少輔)의 조략(調略)에 성공. 카유사이의 설득을 맡겼다. 카유사이는 3월에 항복을 신청, 같은 달 16일에 카츠요리로부터 가증(加増)을 받았다.
하지만 이 때, 마사유키 자신은 카츠요리를 따라 스루가에 있었던 듯 하다. 실제로 군사 지휘를 맡고 있었던 것은 숙부인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였던 듯 하다. 윤 3월, 야자와 요리츠나는 누마타에 공세를 가해 대승을 거뒀고, 마사유키에게 이를 보고했다. 마사유키는 즉시 전승을 카츠요리에게 전했고, 이에 기뻐한 카츠요리는 30일에 마사유키를 이와비츠로 돌아가게 했다. 이후, 누마타 경략은 마사유키 자신이 지위를 맡게 된다.
다음 목표는 사루가쿄 성(猿ヶ京城: 미나카미 쵸)였다. 이 땅은 미쿠니 가도(三国街道)를 누를 수 있는 요충지였다. 5월 4일, 이 땅의 재지 무사들에게 명령해 사루가쿄의 산노쿠루와(三之曲輪: 산노마루)를 태워버리게 했다. 사루가쿄 성은 성의 규모로는 결코 크지 않았지만, 동남, 서남을 강으로 애워싼 요해(要害)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북쪽의 성 정면에서부터 착실하게 공격해 들어가면, 공략이 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산노쿠루와를 태운다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컸다. 6일, 마사유키는 사루가쿄 성의 조략을 지시, 얼마 있지 않아 함락시켰다. 사루가쿄 성은 미쿠니 가도상에 있어서 코즈케 측의 입구에 해당했기 때문에, 동맹국인 우에스기 씨의 본국 에치고는 호죠 씨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거의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작은 성이라고는 해도, 전략상의 의의(意義)는 작지 않았다.
마사유키는 사루가쿄 성에 오가와 카유사이를 들여보냈지만, 카유사이에게 많은 땅을 약속했기 때문에, 다른 가신들에게 줄 직학령이 없어져버렸던 듯 하다. 그래서 누마타 공략까지... 라는 약속으로 영지들 중 저자의 아이마타(相俣)와 미야노무라(宮野村)를 빌리게 된다. 이 이후에도 마사유키의 누마타 공략은 조략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상으로 줄 땅의 부족이라는 점이 커다란 문제가 된다.
또, 이 무렵에는 나구루미 성(名胡桃城: 미나카미 쵸)을 공략했다고 여겨지지만, 시기는 확정할 수 없다.
5월 23일에는, 운노 유키미츠(海野幸光), 테루유키(輝幸), 카네코 미노노카미 야스키요(金子美濃守泰清), 와타나베 사콘노죠(渡辺左近丞)를 어떤 성에 배치시켰다. 연구사상으로는 이와비츠 성이라 여겨지고 있지만, 마사유키가 그들에게 내준 문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아무리 봐도 임전태세였기에, 누마타에 있는 토네 군(利根郡)의 성곽이라 보는 쪽이 자연스럽다. 거기다 「우케토리(請取)의 쿠루와(曲輪)」 방비에 대한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면, 일정 이상의 규모를 가진 성곽이 된다. 오가와 성이나 사루가쿄 성은 지나치게 작은 데다 쿠루와의 수가 적어 해당되지 않는다.
주의하고 싶은 것은, 누마타의 유력자인 카네코 야스키요와 와타나베 사콘노죠가 이미 마사유키를 따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6월말부터 마사유키는 누마타에 대한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는데, 그 거점은 나구루미였다. 나구루미 성이라 하면, 일정한 규모를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 누마타와 지근거리에 있었다. 마사유키가 운노들을 배치한 것은 나구루미 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사유키 자신도 이 성에 들어가 진두지휘를 맡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8월 중엽, 마사유키에게로 누마타 성의 성장(城将)인 요도 신자에몬노죠(用土新左衛門尉)로부터 같은 편이 되겠다는 서약을 담은 기청문(起請文)이 도착했다. 마사유키는 진중으로 찾아온 카츠요리의 측근 아토베 카츠스케(跡部勝資), 츠치야 마사츠네(土屋昌恒)에게만 은밀히 상황을 보고, 17일에 밀서를 보냈다. 카츠요리가 나중에 「当秋中(이번 가을 중에)」라 말하고 있기 때문에(가을은 7월~9월), 얼마되지 않아 항복을 받아낸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요도 신자에몬노죠는 무사시(武蔵) 쿠니슈(国衆)인 후지타(藤田) 씨의 서류(庶流)이다. 후지타 씨의 가독(家督)은 호죠 우지마사의 동생인 우지쿠니가 이어받았다. 그래서, 우지쿠니에게 대항한다는 의미도 있었는지, 카츠요리로부터 본가의 성씨인 후지타 카바네(姓)와 타케다 가문의 츠지(通字)인 「信」를 주어져, 후지타 노부요시(藤田信吉)로 개명했다.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성립된 우에스기 측의 군기물(軍記物) 『管窺武鑑(칸키부칸)』에 따르면, 요도 신자에몬노죠의 형이 호죠 우지쿠니에게 암살당한 것을 원망해 배신한 것이라 말하고 있지만, 뒷받침할 근거는 찾을 수 없다.
텐쇼 8년 8월, 마사유키는 염원하던 누마타 성 공략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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