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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152016.12.07 PM 05:15
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 그렇지만, 오다(織田) 정권의 토고쿠(東国) 지배는 길게 지속되지 못했다.
텐쇼(天正) 10년(1582) 6월 2일의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에 의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노부타다(信忠) 부자는 자결. 타케다(武田) 씨 공략 때에 코즈케(上野)로 진군한 오다 노부후사(織田信房)도 운명을 함께했다. 타케다 가문 멸망으로부터 불과 3개월 후의 일이다.
이 충격적인 정보는 6월 9일에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곁에도 전해졌다(『石川忠総留書』). 군기(軍記)류에 따르면, 카즈마스는 가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쿠니슈(国衆)들에게 혼노지의 변에 대한 정보를 고백, 인심을 장악했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카즈마스는 큰일은 나지 않았으니 안심하라는 서장을 보냈다.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 곁에는 6월 11일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우지나오의 부친인 우지마사(氏政)는 카즈마사에게 호죠 씨가 모반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터이니 안심해도 좋다고 즉시 써서 보냈지만, 물론 거짓말이었다. 부자가 그렇게나 고전했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는 멸망했고, 중앙 정권으로서 호죠 씨의 짐이 되어 있던 노부나가도 이젠 없다. 호죠 씨가 노부나가에게 종속하고 있었던 이유는, 카츠요리와의 전쟁 때문이었기 때문이지 충성심이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익 12일, 영지에 동원령을 내걸어 머지 않아 코즈케로 침공했다.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18일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익 19일의 칸나가와 전투(神流川の戦い)에서 대패, 본령인 이세(伊勢)로 패주하게 된다.
군기류는 이 때,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가 카즈마스 귀국을 지원했다고 하는데, 손을 쓰지 않았던 게 진실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생모와 노부시게(信繁)를 인질로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즈마스는 키소(木曾)령을 통과할 때의 교섭에서 징수했던 인질을 키소 요시마사(木曾義昌)에게 내어주는 꼴이 되었다. 마사유키가 이 사태를 언제 파악했는지 알 수 없지만, 모친과 아들은 해방될 기회를 잃고말았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옛 타케다령에 배치한 다른 부장(部将)들도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 일로 인해, 옛 타케다령은 사실상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다. 노부나가의 압력이 소멸된 호죠 우지나오는 오다 정권을 이반하였으며, 멸망 직전까지 내몰려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도 일전(一転), 비원이었던 시나노(信濃) 북부의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들어갔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죽었다고는 해도, 오다 가문이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도 오다 정권에 대해 「모반인」이 된 호죠 씨를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옛 타케다령 제압에 나섰다. 이것이 「텐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이라는 호칭이 제창되고 있는... 호죠, 토쿠가와, 우에스기 씨에 의한 타케다 가문 옛 영지 쟁탈전이다.
◇ 「텐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의 시작
~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인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만이 아니었다. 타키가와(滝川) 세력이 추방당한 것을 알게된 후지타 노부요시(藤田信吉)는, 성주대리인 타키가와 기다유(滝川儀太夫: 카즈마스의 조카)에게 누마타 성(沼田城) 인도를 요구했다(『管窺武鑑』). 그러나 기다유는, 이 성은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진상한 것이기 때문에 마사유키에게 돌려주는 게 맞다고 지적하며 노부요시의 요구를 거절했다.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도 기다유의 의견을 옳다고 해서 누마타 성은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반환되는 게 결정되었다(『里見吉政戦功覚書』).
마사유키가 누마타 성 반환을 위한 군세를 보낸 것은 6월 13일의 일이다. 성 안에서는 아직 후지타 노부요시가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건의 조정을 맡은 사토미 요시마사(里見吉政)의 설득에 의해 누마타를 떠나 에치고(越後)로 달아났다. 이 때문에, 후지타 노부요시가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의 지원을 맞이했다고 말하는 사료도 있다(『管窺武鑑』). 그렇다는 이유도, 후지타 노부요시는 호죠 씨로부터 타케다(武田) 씨에게로 붙어 누마타 성을 넘겨준 부장(部将)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타키가와군이 코즈케(上野)를 철수해서 호죠 씨가 누마타를 제압하기라도 한다면, 처형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타키가와 카즈마스도 누마타로 사나다 씨 지원을 위한 원군을 파견했다. 이는, 누마타의 혼란이 장기화된다면, 호죠 씨와 협공을 당할 위험성을 고려한 결과였을 것이다. 덧붙여 『加沢記(카자와키)』는 누마타의 유력자 카네코 미노노카미 야스키요(金子美濃守泰清)가 마사유키에게 종속했다고 기록한다. 미노노카미의 동향을 통해 보자면, 누마타슈(沼田衆)는 마사유키를 반기는 길을 택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이 타키가와 기다유의 판단을 좌우했을 것이다. 덧붙여, 카네코 미노노카미 야스키요는 이 이후, 데릴사위인 이치바(一場) 씨를 의지해 이와비츠(岩櫃) 부근인 아츠타(厚田: 군마 현 히가시아가츠마 쵸)에서 은거하였으며, 그곳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하지만 마사유키는 이미 오다 가문에 종속된 쿠니슈(国衆)로서의 틀을 벗어나는 행동에 나섰다.
6월 10일, 마사유키는 새로운 인문(印文)인 「道」주인(朱印) 사용을 개시한 것이다. 이는 야마가 진쟈(山家神社) 호조인(宝蔵院)에게 사령(社領)을 기부한 문서에 사용된 것으로, 사나다 씨에게 있어서 최초의 주인장(朱印状)이다. 이후, 타케다 씨처럼 봉자(奉者)를 기록한 봉서식 주인장(奉書式朱印状)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이게 왜 문제인걸까? 일반적으로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는 종속 쿠니슈에게, ① 주인장 사용 허가, ② 흑인장(黒印状) 사용 허가, ③ 인판장(印判状) 사용 불가(카오만 사용)이라는 3단계로 랭크를 매긴다. 가령 키소 요시마사(木曾義昌)는 타케다 시절에는 주인장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오다 정권 복속 후에는 흑인으로 고쳤으며, 혼노지의 변 이후에 다시 주인을 사용하고 있다. 타케다 시대나, 노부나가 생존 중에 마사유키가 주인을 사용한 사례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주인장의 무단사용이라는 뜻이 된다. 혼노지의 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즉시 새기기라도 했던걸까? 이 시점에서, 마사유키는 오다 정권으로부터 이반할 생각을 굳혔던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마사유키는 6월 12일에 누마타슈인 온다 이가노카미(恩田伊賀守), 16일에 아가츠마슈(吾妻衆)인 칸바라 쿠나이쇼우(鎌原宮内少輔)의 복속을 인정, 소령(所領)을 주었다. 온다 이가노카미의 가신화는,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이해를 얻은 것이라 봐도 좋다. 또, 칸바라 씨는 사나다 씨의 친척이기에, 복속 교섭은 쉬웠으리라 여겨진다. 21일에는 아가츠마의 토호(土豪) 유모토 사부로에몬노죠(湯本三郎右衛門尉)를 이와비츠로 들였다. 이 명령은 「道」주인을 써서 보냈다.
한편, 우에스기 카게카츠도 누마타의 유력자인 와타나베 사콘노죠(渡辺左近丞)에게 누마타 공략을 명령했다. 6월 16일의 일이었다. 하지만 마사유키는 앞에서 말한대로 13일에는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허가를 받아 누마타 반환을 위한 군세를 파견했다. 혼노지의 변에 관한 정보를 얻고난 뒤, 칸나가와 전투(神流川の戦い)까지의 불과 10일 정도 사이에, 마사유키는 타케다 시대의 「코즈케 북부의 군지(郡司)」 관할영역을 회복한 것이다.
문제는, 옛 영토인 코즈케 탈환에 불타오르고 있던 호죠 씨의 동향이다. 호죠 우지나오의 코즈케 진출은 대단히 빨라서, 마사유키는 단독으로의 진검승부는 불가능하다 판단했다. 그런데다, 마사유키의 본령인 치이사가타(小県)에는 시나노 북부의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개 군을 제압한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마사유키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종속하는 것에 의해 호죠 씨에 대한 대항을 시도했다.
그런데, 마사유키는 곧 바로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렇다기 보다도, 뒤집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호죠 우지나오가 시나노 사쿠 군(佐久郡)으로 군세를 보내 치이사가타 군 운노타이라(海野平)에 포진했기 때문이다. 사나다 가문에게 있어서는, 40년 전의 악몽을 되살아나게 하는 땅이다. 마사유키는 즉시 우에스기 씨를 이반하여 호죠 씨에게 출사한다.
7월 9일, 호죠 우시나오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귀속을 칭찬, 사자를 맡은 사나다 가문의 가신 헤키 고에몬노죠(日置五右衛門尉)에게 코즈케 서부 코지마 고(小島郷: 타카사키 시)를 지행(知行)으로 주었다. 호죠 우지나오는 코즈케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는데, 시나노 침공을 우선시하여 사나다 마사유키가 확보한 누마타, 이와비츠령과 모리 호죠 호린(毛利北条芳林: 타카히로)의 본거지인 마야하시(厩橋)령에는 손을 대지 않고 우스이 고개(碓氷峠)를 넘어 시나노로 들어갔다. 이것이 마사유키에게는 행운이었다. 반대로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마사유키를 모반인이라 인정, 사나다령인 미시마(三島: 군마 현 히가시아가츠마 쵸)를 우라노 노토노카미(浦野能登守)에게 주었다. 물론, 코즈케에는 우에스기 씨의 세력은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공수표나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시기, 모리 호죠 호린도 코즈케에서 세력을 확대, 소쟈(惣社: 마에바시 시)령을 확보했다.
마사유키는 7월 12일에 운노까지 진을 진군시킨 호죠 우지나오 곁으로, 익 13일에 참진을 하였다. 우지나오는 그대로 카와나카지마까지 군세를 진군시켜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대치한다. 타케다 가문의 옛 가신으로, 우에스기 쪽에 붙은 카이즈 성(海津城)의 성주대리 카스가 노부타츠(春日信達: 『코요군칸』의 원기주인 코사카 토라츠나의 아들)의 배신 공작의 진전에 기대한 것이다. 이 공작은 「ちいさ方々之者共(치이사가타 여러 세력)」에 의해 치러졌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越後古実聞書』), 마사유키도 관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노부타츠의 손에는 지행을 안도한다는 우지나오의 증문(証文)이 건내어졌다. 그러나 모반은 사전에 발각, 노부타츠는 처형당하고말았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마사유키가 우지나오 편에서 참전한 7월 13일의 일이었다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나다 씨를 포함한 치이사가타의 쿠니슈는 카스가 노부타츠의 배신을 선물로 호죠 씨에게 종속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료적 가치는 부족하지만, 『武徳編年集成(부토쿠헨넨슈세이)』는 카스가를 조략(調略)한 인물을 사나다 마사유키라 명기하고 있다. 다만 이쪽은, 노부타츠의 배신이 발각되어 책형에 처해진 날을 7월 25일이라 한다. 그렇게 되면, 호죠 우지나오는 28일에 출마하여 카와나카지마를 공격, 이에 맞선 우에스기세에 있어서 카스가 노부타츠가 배신... 이라는 계획이었다 한다.
어쨌든, 우지나오의 목적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것이다. 이 직후인 7월 27일, 마사유키의 친동생인 카즈노 마사하루(加津野昌春)가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배신하여 거성인 마키노시마 성(牧之島城: 나가노 시 신슈 신마치)에서 물러났다(『里見吉政戦功覚書』). 우지나오는 마사하루의 신병을 안전하게 인도받기 위해 군세를 전개했다. 호죠 씨의 아군이 된 시나노슈(信濃衆) 13두 중에서는, 마사유키가 선진을 명령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추측해 보면, 사나다 형제가 연계 플레이를 취해 과거의 동료 카스가 노부타츠를 배신케 하려 했지만, 실패했기 때문에 마사하루가 우에스기령을 탈출했다고 여겨졌던 듯 하다.
- 次元大介
- 2016/12/08 AM 12:06
그런 의미가 있을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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