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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172016.12.08 PM 06:30
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우에다 성(上田城) 축성
~ 텐쇼(天正) 11년 정월(미시마고요미에 의한다. 쿄고요미로는 윤 정월), 치이사가타 군(小県郡) 카난(河南)의 타케시 오오이(武石大井) 씨, 마루코 요다(丸子依田) 씨들이 反사나다(真田)라는 기치를 내걸고 병사를 일으켰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결국 혼자힘으로 마루코(丸子)로 진군, 과반의 제압에 성공한다. 이 일로 인해, 사나다 씨의 치이사가타 군 평정은 단번에 진전을 보였다. 3월에는 타케시(武石) 중 10관문이 이세 진구우(伊勢神宮) 온시(御師)인 히로타(広田) 씨에게 지급되었기 때문에, 이 이전에 타케시 오오이 쇼토(武石大井正棟)를 멸망시키고 카난을 제압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해 정월에 마사유키의 생모인 카와라(河原) 씨가 토쿠가와 씨에게 인질로서 보내지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카와라 씨는 아직 키소 요시마사(木曾義昌)에게 억류되어 있었던 듯 했으며, 거기다 건강도 악화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요시마사와의 조정이 필요해져, 토쿠가와 영지로 떠난 것은 2월까지 연기된다. 이 일로 인해, 마사유키의 토쿠가와 씨 종속은 확실한 것이 된 것 처럼 보였다.
마사유키에 의한 카난 제압 이후에도, 이에야스는 사쿠(佐久), 치이사가타에서의 잔당 토벌을 들어 출마할 의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2월에, 전년의 화친 이후에도 코모로 성(小諸城) 주둔을 계속하고 있던 호죠(北条)세가 칸토(関東)로 물러나자마자 이 성을 네즈 마사츠나(禰津昌綱), 모치즈키 노부마사(望月信雅)가 점거, 우에스기(上杉) 씨에게 종속하고 싶다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3월 15일, 마사유키의 동생인 카즈노 마사하루(加津野昌春)는 「이에야스의 출마는 틀림 없이 있을터이지만, 우에스기령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다」라며, 우에스기 가문의 나가누마 성(長沼城: 나가노 시)의 성주대리인 시마즈 타다나오(島津忠直)에게 전해, 이해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이 약속을 무시, 3월 21일까지 우에스기 측인 코쿠조산 성(虚空蔵山城: 치이사가타 군과 하니시나 군 경계에 위치)을 공격해 승리했다. 이는 사나다 씨가 치이사가타 군 중에 치쿠마 강(千曲川) 이북을 제압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사유키의 행동은 명백한 배신 행위였기에, 우에스기 측에게 큰 불안을 안겨주게 되었다.
4월, 사나다 씨에 대한 원군으로서 치이사가타 군에 들어간 토쿠가와세는 「아마가후치(海士淵)」라는 장소에서 축성을 개시한다. 이 성곽이 바로, 나중에 사나다 씨의 본거지가 되는 우에다 성(上田城)이다(당초에는 이세자키 성이라 불리웠지만, 우에다 성으로 통일한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와 싸우기 위한 최전선에 성곽을 쌓기로 결정했지만, 마사유키는 코후(甲府)로 들어간 이에야스에게 출사하여 인사를 올렸다(『当代記』).
다만, 착각하기 쉬운 것이 우에다 성은 어디까지나 토쿠가와 씨 직속 성곽으로 만들어졌다. 사나다 씨 같은 쿠니슈(国衆)는, 적국의 위협에 휩싸인 경우에, 영지 안에 종속처의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의 군세 주둔을 받아들이고 보호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우에스기 가문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사나다 영지 안에 토쿠가와 쪽의 성곽을 쌓도록 해준 것이었다.
3월에 마사유키에게 배신당한 형태가 된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불신감이 강해져, 코쿠조산 성에 군세를 모아 우에다 성 축성을 방해하라 명령했다. 하지만, 토쿠가와 편인 오가사와라 사다요시(小笠原貞慶)가 오미 성(麻績城: 나가노 현 오미무라)을 공격해 왔기 때무에, 군세를 그쪽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우에스기세는 대승을 거두지만, 에치고(越後)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던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重家)가 공세에 나섰기 때문에, 우에다 성 축성 방해는 중지된다. 우에스기 씨에게 종속을 부탁했던 네즈, 모치즈키 씨도, 최종적으로는 이에야스를 따랐다. 이에야스도 출마를 관둬, 치이사가타는 한동안 안정을 보여준다.
6월에는 이에야스의 딸 토쿠히메(督姫)가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에게 시집을 가는 게 결정(8월로 미뤄진다), 두 다이묘의 관계는 보통의 화친에서 군사 동맹으로 성격을 바꿨다. 그때, 호죠 우지나오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요청하여 누마타(沼田), 이와비츠 성(岩櫃城)이 호죠 씨에게 인도되게 되었던 듯 하다. 호죠 씨는 누마타 성 청취를 위해, 군세를 코즈케(上野)로 파견했다. 하지만 익 7월, 누마타 성을 찾아온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의 사자를, 누마타 성의 성주대리인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 카네코 미노노카미(金子美濃守)가 베어버려, 그 뜻을 우에스기 씨에게 보고했다. 즉, 마사유키는 재빠르게 토쿠가와 씨를 포기, 우에스기 씨에 대한 접근을 도모했다. 다만, 종신하고 한달도 지나지 않았던 중에 이반, 몇개월 전에는 자신들을 속여서 친 적이 있었던 마사유키로부터의 접촉이다. 성급히 믿기는 어려웠다. 7월 15일, 카게카츠는 야자와 요리츠나에게 「마사유키의 생각은 의심스럽지만, 모리 호죠 호린(毛利北条芳林)의 사자로부터 상황을 들어본바, 확실하다는 것을 알겠다」라고 전하고 있다. 마사유키의 행동이 책략이 아닌지 의심했던 듯 하다. 카게카츠를 납득시킨 것은 「마사유키가 호죠 씨와 단교하고 있다」라는 점으로, 켄신(謙信) 이래의 호죠 씨와의 적대관계가 크게 마음을 좌우한 듯 하다.
무엇보다 이 시점에서, 마사유키는 아직 토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명확하게 이반한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우에스기 카게카츠도 마사유키를 적대세력이라 인식했던 듯 하다.
그런데다, 사나다 영지를 둘러싼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9월에는 호죠 우지나오 자신이 코즈케로 출진, 모리 호죠 호린을 항복시켰다. 이 일로 인해, 코즈케에서의 反호죠세력은 사실상 사나다 씨만 남게 되었다.
텐쇼 12년(1584) 3월,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하네오 겐로쿠로(羽尾源六郎)의 코즈케 아가츠마 군(吾妻郡) 마루이와 성(丸岩城: 나가노하라 쵸) 공략을 지원했다. 겐로쿠로는 일찍이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에게 멸망당한 시게노(滋野) 일족인 하네오(羽尾) 씨의 생존자였다. 그 과정에서, 우에스기 쪽의 꼬임으로 하네오 성의 성장(城将)인 유모토 사부로에몬노죠(湯本三郎右衛門尉)가 모반을 일으켰다. 이것이 성공의 열쇠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겐로쿠로는 마루이와 성 뿐만 아니라 미하라(三原: 군마 현 츠마고이무라) 공략까지 성공했는데, 이와비츠와 본거지인 사나다를 잇는 라인에 위치하는 요충지의 실함(失陥)은 경시할 수 없는 손해였을 것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탈환하게 되리라 생각했겠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어쨌든 마사유키는 코즈케에서 우에스기, 호죠 사이에 끼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텐쇼 12년 3월, 오다(織田) 가문의 가독(家督)을 계승한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가로(家老)를 살해, 히데요시 토벌을 위한 병사를 일으켰다. 이는 반대로,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오다 정권」은 명실공히 붕괴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호죠 씨와의 동맹을 다진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카츠 지원을 결정,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가 시작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하시바 히데요시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시나노를 남진하여 토쿠가와령을 압박하도록 요구했다. 반대로 이에야스는 사나다 마사유키를 시작으로 하는 시나노 쿠니슈에게 카게카츠를 막아달라고 바라는 형태가 되었다. 이 때문에, 호죠 씨에게 약속한 「누마타령」 할양에 대해, 이에야스는 상당히 강경한 태도로 마사유키에게 임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리라 여겨진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는, 서전(緒戦)에서는 오다 노부카츠, 이에야스 연합군이 승리하긴 했지만, 그후, 교착 상태에 몰려, 11월의 화친 성립까지 대진이 이어지게 된다. 덧붙여, 이 화친은 오다 노부카츠가 단독으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모기장 밖에 내버려진 형태가 되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대립은 계속된다. 또, 화친 자체가 대등한 게 아니라, 이후에 오다 노부카츠는 히데요시 휘하의 일개 다이묘로서 대우받게 된다.
여기서 히데요시는 오다 정권을 대신해 천하인의 지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을 제압
~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가 진전을 보이지 않던 중,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에서의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텐쇼(天正) 12년 7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같은 치이사가타 군의 쿠니슈(国衆)인 무로가 마사타케(室賀正武)를 이용해 마사유키 암살을 시도했다고 한다(『加沢記』). 하지만, 마사유키는 이를 반격해 버렸다. 이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는 판연(判然)할 수 없지만, 누마타(沼田)령 인도가 관계있을 가능성은 높다. 이 이후, 무로가 가문의 가독(家督)은 친동생인 미츠토시(満俊)가 잇게 되지만, 미츠토시는 이 때, 형과는 다른 행동을 취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에게 종속해 있었다. 하지만, 이해 4월 1일, 또 한명의 형인 야시로 히데마사(屋代秀正)를 따라 카이즈 성(海津城)을 탈출. 우에스기 쪽에서 토쿠가와 쪽으로 입장을 바꿔 야시로 씨의 본거지인 아라토 성(荒砥城), 이어서 코쿠조잔 성(虚空蔵山城)에서 농성을 계속한다는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이 결과, 무로가령은 사실상 당주 부재라는 상황이 되어 있었기에, 정확한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마사유키에 의해 병합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또 하나, 치이사가타의 쿠니슈령으로는 같은 시게노(滋野) 일족인 네즈(禰津) 씨령이 존재한다. 네즈 씨는 죠안(常安)의 적자인 츠키나오(月直)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조카인 마사츠나(昌綱)가 가독을 상속해 있었다. 타케다(武田) 가문이 멸망했을 때, 죠안은 시나노(信濃) 북부의 이이야마 성(飯山城: 이이야마 시)에 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텐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에서는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따랐다. 또, 마사츠나는 본령인 네즈에 있으면서 당초에는 사나다 씨와 마찬가지로,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를 따랐으며, 그후,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돌아섰으리라 본다. 하지만, 텐쇼 13년(1585), 마사유키가 우에스기 씨에게 종속했을 때, 「네즈」의 신병 보호를 명령받고 있다. 따라서, 네즈령도 이미 사나다 씨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으며, 마사츠나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보호 아래에 들어갔던 듯 하다. 마사츠나의 적자인 노부히데(信秀)에게는, 마사유키의 데릴사위인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重誠)의 딸이 출가했다(사나다 씨 소장 『御家中系図』). 한편, 죠안은 텐쇼 11년 9월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아래로 들어가 이에야스의 칸토(関東) 전봉(転封) 이후에 코즈케 토요오카(豊岡) 1만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텐쇼 12년에 마사유키는 치이사가타 군 통일을 달성했으리라 사료된다.
3개 군(치이사가타, 아가츠마, 토네)을 소유하고 있는 쿠니슈 -칸토, 중부지방에서 이만한 세력을 가진 쿠니슈는 없었다. 사나다령을 해체시킬 것인가? 아군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우에스기, 호죠, 토쿠가와라는 주변의 세 다이묘는 그런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누마타령 인도를 거절한 이상, 사나다 씨가 이대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종속하기가 어려워진다. 거기다 텐쇼 13년에 들어서자, 이에야스로부터 누마타 인도에 대한 명령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마사유키는 「누마타는 이에야스로부터 받은 땅이 아니다. 스스로의 실력으로 획득한 것이다. 그런데다, 이번 충절에 대한 상을 주기로 약속했던 바, 그것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스러운 생각조차 든다. 그럼에도 누마타를 넘겨주라 말씀하시다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다」라며 거절, 「(더 이상) 주군으로 모실 마음이 없다」며 딱잘라 말했다고 한다(『三河物語』).
텐쇼 13년 6월경, 마사유키는 다시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종속하기로 결정한다. 종래에 종속은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기청문(起請文)이 나온 7월 15일이라 여겨져 왔지만, 6월에는 에치고(越後)에 인질로 보내진 사나다 벤마루(真田弁丸: 노부시게)의 쿠부슈(供奉衆)인 야자와 요리유키(矢沢頼幸: 요리츠나의 적자)에게, 도신(同心)으로서 마사유키 지키신(直臣)을 맡게해 일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기에, 종속 결정이 이 이전이었음은 확실하다. 덧붙여, 이 요리유키의 부대는, 아직 젊은 노부시게(信繁)의 대리로서 에치고의 내란(「시바타 시게이에의 난」) 토벌에서 활약해, 크게 칭찬받게 된다.
실은 이 직전인 5월 초순경,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시나노의 쿠니슈 스다 노부마사(須田信正)를 마사유키와 내통한 혐의로 처형시키고 있어(『北越軍記』 외), 관계는 험악했다. 하지만, 에치고 일국조차 장악할 수 없었던 카게카츠에게 있어서, 3개 군을 영유한 사나다 씨를 품은 의미는 컸을 것이다. 한번 종속을 인정하게 되면, 카게카츠는 관대한 대우를 했다는 뜻이 된다. 먼저, 치이사가타(우에다), 아가츠마(吾妻: 이와비츠), 토네(利根: 누마타) 3개 군의 영유를 인정했으며, 하니시나 군(埴科郡) 사카키(坂城: 나가노 현 사카키 쵸)에서의 영지도 안도받았다. 일찍이 이에야스가 꺼낸 종속 조건 중에 나가노(長野) 씨의 옛 영지 부분도 약속받았으며, 카이(甲斐)에서의 한개 군 및 사쿠 군 영지도 상으로서 보여주었다. 전년 4월에 우에스기 씨의 곁을 떠나있던 야시로 히데마사(사라시나, 하니시나 군의 쿠니슈)의 옛 영지도 안도받고 있다. 이는 우에스기 영내기 때문에, 즉시 지배를 행할 수 있었다. 하니시나 군에서의 일정한 권익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또, 네즈 마사츠나의 처우를 마사유키에게 맡길 것, 우에스기 씨의 본거지 에치고에서의 지행을 줄 것도 약속받았다. 이때의 안도지로 하니시나 군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하고 싶다. 하니시나 군의 이데우라 마사스케(出浦昌相: 군기물류는 실명을 모리키요라 하고 있으나 이는 와전된 것이다)가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복속한 것은 텐쇼 11년이라 여겨지고 있어, 딱 그것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안도받은 하니시나 군 안에는 이데우라 씨의 본령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도 틀림 없다. 덧붙여, 이데우라 성(出浦城)은 야시로 가문의 옛 영지 바로 남쪽에 위치한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때와 달랐던 점은, 이에야스가 제시한 조건보다도 실효성이 높은 부분이 많았다는 점이다. 야시로 가문의 옛 영지는 우에스기 가문의 실효 지배지였기에, 아가츠마 군 지배의 승인은, 우에스기 가문이 지배한 하네오 겐로쿠로(羽尾源六郎) 봉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었다. 여기서 사나다 가문의 영지는, 사라시나(更科), 하니시나 군에서 벗어난 형태로, 최대 규모에 달하고 있었다. 이들 중, 야시로 가문의 옛 영지 일부에 대해서는, 인질이 된 노부시게에게 주어지게 된다.
거기다 토쿠가와 씨가 축성한 우에다 성(上田城)은, 어느샌가 마사유키의 것이 되어 있었다. 이 경위는 판연되지 않지만, 누마타 성 인도 조건의 일환이라 생각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 즉, 우에다 성을 줄 것이니, 누마타를 인도하라는 이에야스의 회유책이다. 마사유키는 여기에 넘어가는 척 했다는 뜻이 된다. 어쩌면, 인질이 되어 있던 생모 카와라(河原) 씨도 일련의 교섭 중에 귀국시키는 데에 성공했던 게 아니었을까?
결과로서 치이사가타로부터 토쿠가와세는 철수한다. 마사유키가 혼자힘으로 우에스기 씨와 대치하겠다고 주장했다 한다면, 토쿠가와세가 주둔할 이유가 없다. 이에야스로서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주력하기 위해, 치이사가타 방면 방위는 마사유키에게 맡기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 여겼으리라 사료된다. 다만, 이에야스는 마사유키를 신용한 것은 아니며, 타케다의 옛 가신을 사쿠 군 카츠마 성(勝間城: 사쿠 시)에 마사유키에 대한 방비로서 배치하고 있었음이 지적되고 있다.
우에다 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다음에, 마사유키는 이에야스를 이반하여 우에스기 씨에게 종속했다. 그리고, 다음에 이야기할 제 1차 우에다 전투(第一次上田合戦)에서 토쿠가와군을 격퇴한 뒤인 9월, 이번에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요청하여 対토쿠가와 씨 방위 거점으로서 우에다 성의 개축 보수를 해달라 부탁하고 있다.
이러는 동안, 마사유키는 당연히 인부를 차출했을터인데, 그것은 본래 축성, 보수에 필요한 양의 극히 일부였다. 마사유키는, 감쪽같이 우에다 성을 토쿠가와, 우에스기 씨에게 축성하게 해, 그 성주 자리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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