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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242016.12.15 PM 06:18
4장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센고쿠 사상 최고의 전설이 된 「일본 제일의 츠와모노(兵)」~
◇ 실명(実名)과 생몰년
~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는 아명을 벤마루(弁丸), 겐푸쿠(元服)하여 겐지로 노부시게(源次郎信繁), 종 5위하 사에몬노스케(左衛門尉)로 임관하여, 쿠도야마(九度山)에서 입도(入道), 코하쿠(好白)를 칭했다.
실명(実名)은 노부시게가 정확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키무라(幸村)」는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창작이다. 죽기 직전까지 노부시게를 칭했으며, 유키무라라는 이름을 사용한 흔적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는다. 칸분(寛文) 12년(1672)에 성립된 군기물(軍記物) 『難波戦記(나니와센키)』가 현재 처음으로 유키무라라는 이름이 발견되는 출전이라 생각되고 있다. 노부시게가 죽고 약 반세기를 거친 뒤의 일이었다.
여기에 대한 오해는 대단히 커서, 근세 사나다 가문도 실명을 유키무라라 착각해버리고말아, 첫 이름을 노부시게, 후에 개명해서 유키무라라 했다고 계보류에 기록하고 있다. 또, 「信仍(노부요리)」 「信為(노부타메)」라 쓰여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노부시게(信繁)의 「繁」의 아래쪽이 카오(花押)와 겹쳐지고말아, 윗부분인 「敏」만을 잘못 읽은 것이다.
사나다 쪽의 군기물인 『真武内伝附録(신부나이덴후로쿠)』에, 45일 안에 오오사카(大坂)는 함락될거라 코야 산(高野山) 렌게죠인(蓮華定院)에 써서 보낸 「左衛門尉幸村(사에몬노죠 유키무라)」라는 서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카오의 형태는 노부시게가 겨울 전투 때부터 죽기 전날까지 쓰던 것과 다르다. 따라서, 위문서라 판정할 수 밖에 없다. 노부시게의 이름이 유키무라로 와전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위작일 것이다. 실제로, 전사하기 전날에도 「노부시게」라 서판(署判)하고 있다.
다음으로, 「겐지로」라는 케묘(仮名)도 화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형인 노부유키(信幸)는 「겐자부로(源三郎)」라, 형제가 반대로 되어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반대로 받아들여 설정으로 살린 이가 이케나미 쇼타로(池波正太郎)로, 소설 『真田太平記(사나다 타이헤이키)』에서의 노부시게는 사실 측실에게서 얻은 자식이며, 노부유키보다 연장자라 쓰고 있다.
노부유키가 「겐자부로」를 칭한 이유에 대해 『大鋒院殿御事蹟稿(다이호인덴고지세키코)』는 「겐타(源太)라는 케묘는 사나다 가문 안에서는 불길한 이름으로 삼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즉, 마사유키(昌幸)의 형인 겐타자에몬노죠 노부츠나(源太左衛門尉信綱)가 나가시노(長篠)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겐타로(源太郎)」라는 이름을 짓는걸 피했다 한다.
그렇다면 왜 노부유키를 「겐지로」로 하지 않았는가 하면, 이는 마사유키의 동생인 카즈노 마사하루(加津野昌春: 사나다 노부타다)의 케묘와 같다. 따라서, 적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기에, 이것이 차남인 노부시게에게 붙여진 것이다. 원래 마사유키의 형제가 장남인 겐타로 노부츠나(源太郎信綱), 셋째인 겐고로 마사유키(源五郎昌幸), 넷째인 겐지로 마사하루(源次郎昌春: 노부타카)라는 점에 주의하고 싶다. 센고쿠시대(戦国時代)에는 이미 나이순으로 타로, 지로는 관계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적자가 써야할 케묘라는 것은 가문마다 정해져 있다. 사나다 가문의 경우, 마사유키의 선대인 노부츠나가 「겐타로」를 칭했기 때문에, 노부유키가 그것을 답습할지가 문제가 되어, 불길하다 여겨져 피했다고 특기되어 있는 것이다.
노부시게의 경우는 생년도 문제가 된다. 사나다의 가신인 카와하라 츠나노리(河原綱徳)가 막말(幕末)에 편찬한 『真田家御事跡稿(사나다케고지세키코)』들 중에 『左衛門尉君伝記稿(사에몬노스케쿤덴키코)』에 따르면, 오오사카 전투(大坂の陣)에서 전사했을 때 마흔아홉살이었다고 한다. 역산해 보면, 에이로쿠(永禄) 10년(1567)생이 되며, 이것이 통설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서는, 사나다 가문의 보다이지(菩提寺)인 쵸코쿠지(長国寺)의 카코쵸(過去帳)에는 향년 마흔여섯이라 되어 있었던 것도 기록되어 있어, 여기에 따르면 겐키(元亀) 원년(1570)생이 된다.
어느쪽이 정확한지는 근거가 부족하다. 힌트는 겐푸쿠 연령으로, 텐쇼(天正) 13년(1585) 6월의 발급 문서의 서판은 아명인 「弁」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겐푸쿠는 텐쇼 13년 이후가 된다. 에이로쿠 10년생 설을 따르자면 이 때는 열아홉살. 아무리 그래도 너무나 늦다. 한편, 겐키 원년설을 따르면 열여섯살이 되며, 아슬아슬하게 허용범위에 들어갈 것이다. 또, 『長国寺過去帳(쵸코쿠지카코쵸)』 쪽이 당연하게도 『사에몬노스케쿤덴키코』보다도 성립 시기가 훨씬 빠르다(현물은 확인되고 있지 않는다).
이상을 통해, 본서에서는 겐키 원년에 태어났다는 설을 채용하고 싶다. 다만, 생년이 좀 더 빠를 가능성이 있다.
형인 노부유키의 회상에 따르면, 만사에 온화하고 난폭한 태도를 취하지 않아, 말이 없고 화를 내는 일이 적었다 한다. 출전이 『真武内伝追加(신부나이덴츠이카)』 『幸村君伝記(유키무라쿤덴키)』라는 사료적 가치가 낮은 것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확증은 없지만, 남겨진 서장을 통해 그 성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 오오사카 전투에서 노부시게를 실제로 본 나가사와 쿠로효에(長沢九郎兵衛)는, 「小兵なる人にて候(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長沢日記』), 키는 크지 않았던 듯 하다.
◇ 키소(木曽)에서의 인질 생활
~ 텐쇼(天正) 10년(1582) 6월의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마야바시(厩橋: 마에바시 시)에 재성하면서 「칸토고케이고(関東御警固)」 「칸토고토리츠기(関東御取次)」라는 임무를 맡았던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는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에게 패해, 본령인 이세(伊勢)로 패주했다. 그때, 사쿠(佐久)와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의 쿠니슈(国衆)로부터 인질을 징수했다. 하지만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키소 요시마사(木曽義昌)로부터 영지 통과 조건으로 인질 인도를 요구받아, 모아둔 인질은 키소에 억류되어버리고말았다.
종래에, 이때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가 내놓은 인질은 생모인 카와하라(河原) 씨였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벤마루(弁丸: 노부시게)도 인질로서 보내졌다.
『木曽考(키소코)』라고 하는... 키소 요시마사의 가신의 자손이 편찬한 사료에는 「信州上田城主真田安房守弁之助<後ニ左衛門と云>、木曽ニ質トシテアリ(신슈 우에다 성의 성주 사나다 아와노카미 벤노스케<후에 사에몬이라 한다>, 인질로서 키소에 있었다)」라 나와있다. 즉,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의 아들 중에서 「벤노스케」, 나중에 「사에몬」이 된 인물이 키소 요시마사가 있는 곳에 억류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명이 벤(弁), 칸도나(官途名)가 사에몬.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벤마루 / 사에몬노스케) 밖에 없다.
거기다 「弁」은, 키소에서 조모의 조카인 카와하라 츠나이에(河原綱家) 앞으로 케묘로 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었던 소식이었지만, 『키소코』의 기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내용은 별다른 게 없지만, 현대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편지 잘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기쁜 마음 뿐입니다. 그쪽 상황이 안정되었다고 하니 무엇보다 기쁜 마음이 듭니다. 저도 가까운 시일 내에 돌아가게 될터이니 안심하고 계세요.
추신. 편지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은 돌아간 뒤에(이야기를 나누도록하겠습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이 부분의 원문은 かしく로 아이들이 사용하는 말 : 역자주).
키소로부터. 사에몬노죠 벤】
원문은 거의 모든 문장이 히라가나(ひらがな)로 쓰여져 있다. 히라가나로 쓰는 편지는 발송 또는 수취인이 아이이거나 여성일 경우에 사용된다. 겐키 원년에 태어났다고 친다면, 노부시게는 이때 열세살. 세는 나이로 열세살이기 때문에, 만으로는 열하나, 혹은 두살이 된다. 서장의 내용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아직 천진난만한 아이가 열심히 쓴 서장처럼 비춰지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어쩌면, 노부시게의 생년은 겐지 원년보다 늦을지도 모르겠다.
노부시게가 인질신분에서 해방된 시기는 확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키소 요시마사에게 인질해방을 명령한 텐쇼 10년(1582) 9월 혹은, 조모인 카와하라 씨가 키소에서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가게 된 익 11년 2월 중 하나였으리라 생각된다. 후자라 친다면, 이에야스로부터 인질은 두 사람이나 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져 해방되었을 것이다.
◇ 에치고(越後)에서의 인질 생활
~ 텐쇼(天正) 13년(1585) 6월,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배신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에게 종속된다. 8월, 「御幼若之方」를 인질로 내주었는데, 이것이 노부시게(信繁)라 여겨지고 있다. 노부시게는 이미 열여섯살. 「幼若」라 하기엔 연령대가 높긴하지만, 아직 겐푸쿠(元服)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역시나, 노부시게의 나이는 좀 더 아래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노부시게는 나이가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에, 이 「御幼若之方」는 야자와 요리유키(矢沢頼幸)의 자식이라 보는 설도 있지만, 노부시게는 통설보다 젊었을 가능성이 있다. 덧붙여, 야자와 요리유키의 자식은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그가 죽은 뒤의 가독(家督)은 동생이 이어받고 있다.
정식 인질이기 때문에, 쿠보역(供奉役)으로서 야자와 요리유키가 따라왔다. 6월에 요리유키가 도신(同心)으로서 마사유키의 지키신(直臣)에 맡겨졌으며, 부대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은 이 때문이었으리라. 요리유키는 겐푸쿠 전인 노부시게를 대신해, 에치고(越後)에서의 우에스기 씨의 내란(「시바타 시게이게의 난」) 평전전에서 활약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노부시게에게 시나노(信濃) 하니시나 군(埴科郡)의 야시로(屋代) 가문의 옛 영지 3000관문 중 1000관문을 주었다 한다(『真武内伝』).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에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는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에서의 1관문은 3석에 상당한다고 환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르자면 3000석의 영주라는 뜻이 된다.
실제, 이 해 6월 28일에 「벤(弁)」이라는 인물이 야시로 가문의 옛 가신인 스와 쿠조(諏方久三)에게 지행지를 안도하고 있다. 따라서, 노부시게(벤마루)가 야시로 가문의 옛 영지로부터 1000관문을 받았다고 하는 『真武内伝(신부나이덴)』의 기술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덧붙여, 3000관문이라는 것은 쿠니슈(国衆)의 영지로는 적정한 양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야시로 가문의 옛 영지 전부라 봐도 좋을 것이다. 그 중 1/3이다.
노부시게는 평범한 인질이 아니었다. 1000관문의 영주로서 출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 문서가 노부시게가 아명인 「벤마루」로 발견되는 마지막 사료이기에, 얼마후 겐푸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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