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282016.12.19 PM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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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센고쿠 사상 최고의 전설이 된 「일본 제일의 츠와모노(兵)」~

 

◇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와 사나다마루(真田丸) 공방전

~ 케이쵸(慶長) 19년(1614) 11월 19일, 토쿠가와(徳川) 측인 하치스카 요시시게(蜂須賀至鎮),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는 오오사카(大坂) 측의 해상 교통 거점인 키즈가와(木津川) 입구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여기서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의 막이 올랐다. 같은 날, 토쿠가와 측인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는 시기노(鴫野: 오오사카 시 죠토 구), 이마후쿠(今福) 방면에서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 키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와 충돌하여 격전을 치렀다. 그후에도 각지에서 충돌이 펼쳐졌다.

 하지만, 키즈가와 입구를 제압당한 데미지는 컸으리라 생각된다. 11월 말일, 오오사카 측은 오오사카 성(大坂城) 소가마에(惣構え)로 철수하여 농성전에 들어갔다. 같은 날,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명령으로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가 오오즈츠(大筒)를 쏴서 오오사카 성 서남쪽의 야구라(櫓)를 공격했다. 익일에는 텐마 입구(天満口: 오오사카 시 키타 구)에서 텟포(鉄砲)전이 있었으며, 우에스기 가문의 가로(家老)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는 이른 시기에 「매일 성 안이 속수무책인 것 처럼 보입니다」라며 서장에 기록하고 있었다. 오오사카 성 소가마에는 완전히 포위당했으며, 이에야스의 공격 명령을 기다리기만 하는 상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토쿠가와 측의 오오사카 성 공격은 사나다마루(真田丸) 공방전으로 시작되었다. 오오사카 측은 사나다마루의 배후에 키타가와 지로효에(北川次郎兵衛), 야마가와 타테와키(山川帝刀)가 이끄는 일만여의 군세를 배치하고 있어, 방비는 더욱 더 강화되어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2월 1일, 사나다마루를 둘러본 쇼군(将軍) 히데타다(秀忠)는 섯불리 공격하지 말라고 마에다 토시츠네(前田利常)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나다마루로부터 이따금 성병들이 나와 텟포를 쏴서 가까이에 포진해 있던 카가(加賀)의 마에다 세력을 도발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마에다 토시츠네가 사나다 측인 시노야마(篠山: 비정지 미상. 혹은 오바세야마를 가르킨다고도 한다)를 공격하자, 모조리 철수하고난 뒤였다. 그것을 사나다군이 「새라도 잡으러 왔느냐」면서 비웃으며 더욱 더 도발했다(『真武内伝』). 익 2일, 이에야스로부터 함부로 공격을 금지한다는 명령이 재차 나왔지만, 토시츠네는 도발을 앞두고 자제심을 잃었던 듯 하다. 

 12월 4일 밤, 마에다 토시츠네군은 명령을 어기고 사나다마루 남쪽의 오바세야마(小橋山: 오오사카 시 텐노지 구)에 설치된 방책을 공격했지만, 여기에도 아무도 없었다(『大坂御陣覚書』). 이렇게까지 우롱당했다면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기세로 사나다마루를 공격했지만, 아직 미명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격측은 이를 기습할 호기라 받아들였던 듯 하다. 하지만,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는 토쿠가와 측의 움직임을 간파하여 활이나 텟포를 엄청나게 쏴댔다.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 이이 나오타카(井伊直孝)의 부대도 밀려들어와 사나다마루의 해자를 무너뜨리려했지만, 노부시게가 쳐놓았던 방책에 의해 움직임을 봉쇄당하고 말았다. 토쿠가와 측의 사상자는 늘어갈 뿐이었다. 다만, 이이군의 선봉인 키마타 모리야스(木俣守安)는 소가마에를 공격하다 부상을 입었다고 하타모토(旗本)인 쿠사카베 이에츠구(日下部家次)의 서장에 나와있기 때문에(「大坂城天守閣所蔵文書」), 이이 나오타카는 사나다마루 서쪽에 위치한 소가마에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자, 오오사카 측인 이시카와 야스카츠(石川康勝: 카즈마사의 아들)의 야구라에서 불화살이 쏟아졌다. 토쿠가와 측은 이를 내통하고 있던 난죠 모토타다(南条元忠)에 의한 신호라 생각했다. 그런데 난죠는 이미 처형당해있었던지라, 그저 단순한 사고였다고 한다. 그것을 알리 없는 토쿠가와 측의 마츠다이라 타다나오, 토도 타카토라군은, 단번에 공격하려 했지만, 돌발적인 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텟포를 막을 방패, 대나무다발 준비도 없이... 또 준비했다 하더라도 엄청난 총격에 의해 앞으로 진군하지도 못해 사상자는 더욱 더 늘어가고 있었다.

 토쿠가와 측의 혼란을 본 노부시게는, 적자인 다이스케(大助)와 원군으로 와있던 이키 시치로에몬(伊木七郎右衛門)에게 500의 군세를 이끌게 해, 사나다마루 동쪽의 키도(木戸)에서 출진하여 함성소리를 지르게 했다. 다이스케군이 토쿠가와 측에게 일격을 가한 뒤, 노부시게는 즉시 호라가이(法螺貝)를 불게 해 군세를 철수시켰다 한다.

 전투의 양상을 지켜본 이에야스는 격노하여 철수를 명령했지만, 명령은 쉬이 전달되지 않아 철수 명령은 세번에 걸쳐 내려졌다. 이 전투는, 이에야스가 명령한 게 아니라 마에다 토시츠네가 유인당한 것에 의해, 여러 군이 공명을 떨치려 선봉 다툼을 하다 일어난 참사였다. 즉, 시노야마와 오바세야마의 병력 없는 진영이야말로 노부시게가 쳐놓은 함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덧붙여, 사나다마루에는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의 부대도 들어와 있었는데, 노부시게의 용명 앞에 그 존재감이 잊혀져 버렸다고 한다(『長沢聞書』). 야마구치 큐안(山口休庵)은 사나다 부자의 군세 6천이 농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저한으로 그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데마루(出丸)였다는 뜻이 된다. 사방 다섯간 정도의 것이 아니었음이 확인 가능하다.

 토도 타카토라는 세이로(井楼)를 쌓아 공격을 했다(『高松公実録』). 공격처는 쵸소카베 모리치카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였다 한다. 모리치카도 사나다마루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역시나 토도 타카토라도 사나다마루를 공격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성 안에서는 키무라 시게나리의 가신인 타카마츠 타쿠미(高松内匠)가 노부시게 곁에서 물러나는 도중이었다. 언뜻 보고 모리치카의 수비를 우려한 타카마츠는 시게나리에게 원군 파견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야마구치 큐안은 사나다마루의 공방전에서 키무라 시게나리의 활약을 회상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타카마츠 타쿠미의 건의가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오오사카 겨울 전투는 사실상 셋츠(摂津), 카와치(河内), 이즈미(和泉)의 다이묘(大名)로 전락해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전국의 군세를 이끌고있던 토쿠가와 측이 공격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토쿠가와 측이 압도적 우세를 자랑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상이다. 하지만,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요소가 존재한다. 그것은 「병력의 질(質)」이다. 오오사카 측의 주력은 급하게 모아놓은 로닌슈(牢人衆)였다. 따라서 「급조」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역전의 용사」이기도 했다. 

 반대로 토쿠가와 측은 어땠을까? 마지막으로 경험한 전쟁은 15년 전인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였다. 15~20년을 거치다 보면 세대교체가 일어난다. 이 때문에, 토쿠가와 측의 주력에는 전쟁 미경험자가 적지 않았던 듯 하다. 이 결과, 어이 없게도 급조된 토요토미군 쪽이 정예병이 많다는 사태가 되어 있었다. 노부시게의 도발에 토쿠가와 쪽의 여러 다이묘들이 어이 없이 걸려들었던 것은 경험부족이라는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다. 노부시게는 그것을 교묘하게 찔렀다. 여러 장수들의 변명이 「젊은 녀석들의 선진 다툼 때문에 끌려들어가고 말았다」라는 것은,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 

 『孝亮宿禰日次記(타카스케스쿠네히나미키)』에 따르면, 12월 4일의 공방전에서, 마츠다이라 타다나오군은 480기, 마에다 토시츠네군은 300기의 전사자를 냈다고 한다. 거기다 이 이외에 잡병 전사자는 셀 수 없을 정도라는 소문을 써내려 가고 있기 때문에, 실제 손해는 상당했을 것이다. 또, 이이 나오타카군에는 마츠다이라 타다나오에게 뒤쳐진다는 초조함이 있었던 듯 하다. 이 4일의 전투에서는, 기마 무사 27명, 아시가루(足軽) 6명이 전사, 총 91명이 손상을 입었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이군의 공격처는 소가마에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들을 끌어들인 것은 사나다마루 공방전이었다.

 예수회 선교사가 본국으로 보낸 연보에도, 12월 4일의 전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따르면, 토쿠가와 측은 내통자(난죠 모토타다를 가르킨다)의 내응을 기대하고 공격해 들어갔지만, 이미 배신자가 드러나 처형당해버렸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런 반격도 받지 않고 성벽을 넘었다고 믿어버려 무모하게도 해자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자신들이 총격을 받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오오사카 측은 적이 완전히 해자 속에 빠지는 타이밍을 계산해 머스킷 총이나 화승총을 폭풍처럼 쏘아대었으며, 거기다 대포까지 쏘았다고 한다. 예수회 선교사는 이 모습을 「대학살」이라 칭해 「마치 납으로 된 눈물을 보는 것 같을만큼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기록한다. 총붕괴된 토쿠가와군에게 오오사카 측은 창이나 나기나타(薙刀)를 던지며 공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전사자는 3만에 달한다고 보고 하고 있다. 이 기술은 지나치게 과장되긴 했지만, 대강은 국내 사료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사나다마루 공방전과 일치한다. 사나다마루 공방전에 대해서는 그 대부분을 전공 각서나 군기물에 의지할 수 밖에 없지만, 해외 사료와 기술이 일치한다는 것은 국내 사료가 일정 정도의 사실을 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노부시게(信繁)에게 가했던 배신 공작

~ 사나다마루(真田丸)에 있어서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의 활약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놀라게 했던 듯 하다. 분전의 결과, 이 데마루(出丸)도 어느샌가 「사나다마루(真田丸)」라 불리우게 되었던 듯 하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노부시게가 배신하도록 공작을 펼쳤다. 책임자가 된 이는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 마사노부의 아들)였다.

 마사즈미가 눈을 돌린 것은 노부시게의 숙부인 사나다 노부타다(真田信尹: 카즈노 마사하루)였다. 노부타다는 「텐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 도중에 사나다 가문을 떠나 이에야스를 모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후, 이에야스와 불화를 일으켰는지 텐쇼 19년(1591) 무렵에 아이즈(会津)의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를 모셨다. 그때, 카즈노(加津野)에서 사나다로 복성(復姓)하여 이름도 노부타다로 개명했던 듯 하다. 케이쵸(慶長) 7년(1602)에 이에야스에게로 귀참(帰参)하여 카이(甲斐)에서 하타모토(旗本)가 되어 있었다. 오오사카 전투(大坂の陣)에서는 다른 타케다(武田)의 옛 가신들과 함께 츠카이반(使番)을 맡아, 여러 장수들에게 이에야스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노부시게를 설득하는 데에는 안성맞춤인 인물이었다.

 『慶長見聞書(케이쵸켄키키가키)』에 따르면, 교섭은 케이쵸 19년(1614) 12월 11일에 시작되었다 한다. 하지만 실제로 혼다 마사즈미가 교섭을 지시하여 노부시게의 신상 보증을 약속한 문서는 14일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동서의 일자에는 착오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사즈미는 카가 한(加賀藩) 마에다(前田) 가문의 가로(家老)가 되어 있던 친동생 혼다 마사시게(本多政重)에게 사나다 노부타다와 꼼꼼하게 협의를 하라 지시를 내렸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마에다 가문은 사나다마루를 공격하다 대패를 맛봤던 다이묘였기에, 사나다마루의 지근거리에 포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배신 공작을 시작한 이상, 마에다군이 사나다마루를 공격하게 되면 상황이 불리해진다. 그래서 교섭에 참가시켰던 것이라 사료된다. 

 마사즈미가 제시한 조건은 10만석(혹은 1만석)의 다이묘 대우라는 것이었다 한다. 일찍이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는 1만석으로 가문 재흥을 달성했기 때문에, 파격적인 조건이다. 

 여기에 비해, 노부시게는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로부터 받은 은고(恩顧)를 말하며, 화친 후에 고용해 주신다면 1천석이면 봉공하겠다고 답을 보냈다 한다(『慶長見聞書』). 즉, 겨울 전투 도중에 배신하는 행위를 거절한 것이다. 동시에, 이는 토요토미 존속을 요구에 포함시킨 회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비현실적인 수치를 보여줬기에 오히려 신용할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가령 10만석을 준다고 해도, 즉시 트집을 잡아 개역(改易) 처분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애당초 다마시우치(騙し討ち: 속여서 불시에 침)를 당할 우려가 있다. 하지만, 1천석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얌전하게 살기만 한다면 눈에 띌 일도 없다.

 노부타다가 이 답을 가지고 돌아오자 혼다 마사즈미는, 그렇다면 시나노(信濃) 일국은 어떠냐며 조건을 올려주었다고 여겨진다. 마사즈미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걸까? 또 그가 노부시게에 요구한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중의 배신이었다. 화친을 하고나서 사관해봤자 의미가 없다. 마사즈미의 판단은 이러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런데, 이 답장이 노부시게의 화를 샀다. 노부시게가 토쿠가와 가문에 사관해도 상관 없다고 회답한 것은, 마사즈미의 요망과는 반대로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가문에 충절을 다한 다음의 일이었다. 노부시게가 어디까지 히데요리에게 충성심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투 중의 「배신」은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시나노 일국이라는 것은, 한층 더 비현실적인 조건이었다. 시나노의 여러 다이묘를 전봉(転封)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한 대규모 전봉지를 만드는 데에는, 다른 다이묘를 개역시키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전국의 여러 다이묘가 토쿠가와 편으로서 참진해 있는 이상, 상을 줄 필요는 있었지만 개역시킬 수는 없었다(오오사카 측과 내통한 혐의에 의한 개역은 있었지만). 결국, 노부시게에게 시나노 일국을 주기 위한 카에치(替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화친이 성립한다면 1천석이라도 상관없다는 노부시게의 답을 유린하는 행위였다. 격노한 노부시게는 노부타다를 쫓아내버렸다 한다. 배신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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