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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022017.02.12 PM 07:50
序章 야규 일족(柳生一族)의 허(虚)와 실(実)
◎ 야규 일족(柳生一族)의 등장
~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한 첫번째 조선 출병... 이른바「분로쿠의 역(文禄の役: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분로쿠(文禄) 3년(1594) 봄 2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상경하여 그해 연말까지 쿄토(京都)나 히데요시의 은거처이자 때마침 축성 중인 후시미(伏見)에도 체류했다. 히데요시와 그의 양자인 칸파쿠(関白)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가 주최한 야마토(大和) 요시노(吉野)에서의 꽃구경 연회에 참석한 것은 상경했던 달의 일이었는데, 후시미에서는 다도회(茶会)에도 초대받았다.
초여름 5월, 이에야스의 모습을 라쿠호쿠(洛北)에 있는 다이토쿠지(大徳寺) 북쪽, 아타기 군(愛宕郡) 오오미야 고(大宮郷)의 시치쿠 무라(紫竹村: 쿄토 시 키타 구 시치쿠 구역)에서 볼 수 있었다. 이에야스의 재경 중일 때의 거처는, 라쿠츄(洛中)에 있던 사저 이외에 휴식을 위한 저택이 그런 외곽에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당년 쉰세살. 그무렵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노후를 생각해도 좋을 나이였는데, 호시탐탐 천하를 노리고 있던 그는, 오히려 난세의 무장으로서 최고로 물이 올라있음을 자각하고 있었음에 틀림 없다.
그런 이에야스의 곁으로, 신카게류(新陰流)라는 병법(兵法)을 수련한 부자가 불려온 것이다.
부친인 야규 신자에몬 무네요시(柳生新左衛門宗厳)는 이때 예순여섯살의 노령에 이르렀다. 전년(분로쿠 2년)에 탁발하여 세키슈사이 소곤(石舟斎宗厳)으로 호(号)를 고친 그를 따라, 이에야스로부터 알현을 허락받은 이는 그의 다섯째 아들이자 막내인 마타에몬 무네노리(又右衛門宗矩), 당년 스물네살의 패기만만한 젊은이였다.
그런데, 그 무렵「병법」이라 뭉뚱그려 칭해지고 있던 검술을 가예(家芸)로 삼았던 야규 부자에게, 어째서 이에야스는 관심을 보였던걸까?
토쿠가와 이에야스라 하면, 그 끝모를 심모원려(深謀遠慮)와 관련된 이야기가 선전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너구리 영감」라는 노회한 지혜자로서의 면면을 떠올리기 쉽상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만큼 철저하게 무력(武力)을 신봉한 무장도 당시로서는 드물었을 것이다.「힘의 신봉자」라는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 메이지시대의 저널리스트)의 평가도 수긍되는 부분이다(『徳川家康』 山路愛山著 岩波文庫).
이러한 무력지상주의자였던 이에야스는 또,「토카이 제일의 무사(東海一の弓取り)」라 칭해지고 있었고, 스스로도 무기를 쥐고 용약(勇躍)하여 전장을 질주한 골수 무인이었다.「그 자신도 손수 검을 쥐고 치고받는 일이 잦았다」라 전해지는 것도 과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이에야스였기 때문에, 무술 단련에도 여념이 없었다. 바쿠후(幕府)의 정사(正史)인『徳川実記(토쿠가와짓키)』(「東照宮御実記記附録巻二十三」)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에야스 공은) 무기(武技)를 매우 좋아해서, 검술이나 창술(槍術), 궁술(弓術), 마술(馬術)을 시작으로 해서, 텟포(鉄砲: 조총) 기술이나 수영 등의 무술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분야에서 진수(真髄)를 깨우쳤다. 젊은 시절부터 일흔살을 넘길 때까지 매일매일, 말을 타는 연습을 하였고, 거의 일과처럼 텟포는 세 발씩 시험삼하 쏴보았으며, 활은 표적 혹은 마키와라(巻藁)를 상대로 연습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그 정력의 비범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에야스가 열중했던 무술들 중 검술에 대해 말해보자면, 먼저, 초기에 수련한 유의(流儀)로는 오쿠야마류(奥山流)와 신토류(新当流)가 있다.
오쿠야마류는 오쿠야마 큐가사이 키미시게(奥山休賀斎公重)를 개조(開祖)로 하는 유파이다. 이 사람은 본디 오쿠다이라(奥平) 씨라 했다. 즉, 미카와노쿠니(三河国) 시타라 군(設楽郡) 츠쿠데(作手: 현재의 아이치 현 신시로 시 내에 해당한다)의 성주인 오쿠다이라 사다요시(奥平貞能)의 가신이자 같은 카바네(姓: 오쿠다이라)를 쓰는 오쿠다이라 사다히사(奥平貞久)의 일곱째 아들로, 야규 세키슈사이의 스승인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 히데츠나(上泉伊勢守秀綱: 훗날의 무사시노카미 노부츠나)에게 신카게류(新陰流)를 배웠다. 훗날, 미카와노쿠니 오쿠야마 고(奥山郷)라는 지역의 묘진(明神)에 머물렀을 때, 검리(剣理)를 크게 깨닫고서 일으킨 것이 신카게류(新陰流)의 이칭(異称)이기도 한 오쿠야마류이다.
오쿠야마 큐가사이는 이에야스가 스물아홉살(겐키 원년 = 1570) 때의 전투... 즉,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함께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와 오우미(近江)의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 연합군을 친「아네가와 전투(姉川の合戦)」에 종군했다. 그후에 이에야스에게 검술을 가르치게 되는데, 그 시기는 무려 7년에 달했다.
신토류는,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들로부터 한 세대 전의 히타치(常陸) 카시마(鹿島) 사람인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이 일으킨 유파로, 이에야스는 이 유파를 아리마 토키사다(有馬時貞)라는 인물에게서 배웠다고 전해진다.
오다 노부나가는 물론이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1대 1 전투에서의 검의 기법 등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라는 천하인은 스스로 이것을 냉난자지(冷暖自知: 참다운 깨달음은 체험에 의해 스스로 깨닫는다는 의미)한 부분이 있었다.
이에야스가 야규 부자를 쿄(京)로 초빙한 것은, 검술에 대한 남 못지 않은 관심에서 세키슈사이가 독자적으로 발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무도(無刀)」라는 검의 자세와 그 기법을 한번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리라.
이에야스와 야규 부자의 대면 장면을 엿보는 데에는, 『玉栄拾遺(교쿠에이슈이)』라는 자료를 의지해야한다. 동서는, 야규 가문 역대의 모쿠로쿠풍(目録風) 기록으로, 기사는 카미요(神代) 때부터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인 호레키(宝暦) 3년(1753)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무네노리를 초대로 하는 통칭「에도 야규(江戸柳生)」가문의 7대째인 토시미네(俊峯) 시대에 이르는 이 기록은, 산일(散逸)과 소실을 면한 사료를 이것저것 조사하여, 야규 한(柳生藩) 1만석을 받은 하기와라 노부유키(萩原信之)가 기록한 귀중한 자료이다.
거기에 따르면, 이때 신군(神君: 이에야스)은 세키슈사이와 무네노리에게「무도」의 비술을 연무(演武)케 한 뒤, 자신도 목검을 손에 들고서「내가 가진 검을 빼앗아보게」라며 세키슈사이에게 지시함과 동시에 치고 들어갔다 한다.「무도」 혹은 「무토도리(無刀取り: 맨손인 상태에서 상대의 검을 빼앗는 기술)」라고도 일컷는 비검(秘剣)의 술(術)과 리(理)에 대해서는 잠시 제쳐두겠는데, 요는 맨 몸(丸腰)으로 적을 멋지게 제압하는 것이다.
배명(拝命)한 세키슈사이는 이에야스의 검을 맨 손으로 빼앗아보였다. 그 기량(業前)에 버티지 못한 이에야스는 바로 쓰러져버렸을 정도였다. 그 자리에서 이에야스는「매우 훌륭하도다. 이후는 내 스승이 되어주게나」라고 말하며 카게츠나(景綱)라는 도공(刀工)이 만든 검을 하사했던 데다, 기청문(起請文)을 써주었다 한다. 즉, 특정 유파에 입문할 때에, 비전(秘伝)을 유출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맹세를 신에게 걸고 맹세한 것으로, 그 날짜는 5월 3일로 되어 있다.
야규 일족이 근세사에 등장하게 되는 단서가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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