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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162017.02.27 PM 06:34
제 1 장 인닌(隠忍)의 일족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와 센고쿠(戦国)
◎ 세키슈사이(石舟斎)의 만년(晩年)과 죽음
~ 생각해 보면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와 그 일족의 부침은, 센고쿠시대(戦国時代)의 약소 씨족 전부가 짊어진 숙명이었음에 틀림 없다. 병법(兵法)에 대한 순수한 구도심(求道心)을 일찍부터 품고 있었으면서도, 일가의 운명을 짊어지고 그때 그때의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면서 동분서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세키슈사이의 삶은, 현대의 조직에 속한 사람들 태반의 그것과 닮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세키슈사이도 겨우 만년(晩年)을 맞이하게 되었다.
야규 마을에「모미지바시(もみじ橋)」라는 다리가 있다. 키즈 강(木津川)에서 흘러내리는 이마 강(今川), 쿄토(京都)로 들어오면「웃타키 강(打滝川)」이라 불리우는 강에 놓인 다리로, 옛날에는 코카에데바시(古楓橋)라고도 불리웠는데, 세키슈사이의 거관(居館)은 이 다리 근처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순여섯살 때, 다섯째 아들 무네노리(宗矩)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고용된 뒤, 그는 그곳에서 살다가 케이쵸(慶長) 11년(1606) 4월 19일... 일흔여덟의 나이로 장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로부터 6년 뒤의 일이며, 토쿠가와가 안정되는 한, 그리고, 무네노리가 무탈하게 봉공에 힘쓰기만 한다면, 야규 가문의 미래를 걱정할 것도 없었다. 유유자적한 신세를 보내다 왕생(往生)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무네노리의 활약이 인정받기 이전, 세키슈사이는 여전히 불안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 무렵, 케이쵸 4년(1599)의 일인데, 아내인「노(のう)」 앞으로 보낸 문서가 있다. 이는 유언장이라 해석되는 내용의 문서로, 문면을 통해 일흔한살에도 여전히 고뇌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としより候まま、いづくにても行ころびはて、あとに御のこり候はば、我々が道具、家財ことごとく、それさまへ参らせ候べく候まま、それの御まま召され候べく候】
(스스로도 파도처럼 밀려드는 나이라는 것을 이기지 못하니, 어디서 어떤식으로 쓰러지게 될지 모르겠소. 그렇다면, 나중에 남게 될 당신에게, 집에 있는 도구나 가재 모든것을 남기게 될 것이니 그대로 받아주었으면 하오...)
이러한 내용의 문서로, 쓴 날짜는 7월 30일, 수취인은「御なふ様」라 되어있다. 이 아내는 야규 고(柳生郷) 동쪽에 인접해있는「오쿠하라무라(奥原邑)」의 오쿠하라 토토우미노카미 아무개(원문은 奥原遠江守某)의 딸이라 한다(『玉栄拾遺』). 즉, 장남인 요시카츠(厳勝) 이하 다섯째 아들인 무네노리까지 이르는 아들들과 여섯명의 딸... 열한명이나 되는 세키슈사이의 자식들을 낳은 여성이다.
마음 둘 곳 없는 나이 든 신세를 뼈져리게 느끼게끔 하는 글인데, 이하, 아내가 취한 재산 만큼 남는 게 있다면「마타에몬노죠(又右衛門尉)」... 즉, 무네노리에게 주었으면 한다고 써놓았으며, 거기다, 다기(茶器)는 무네노리와 셋째 아들이자 당시 승려였던 토쿠사이(徳斎) 등과 상담한 다음, 자신의 장례에 드는 비용을 충당해줬으면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와 마찬가지로, 세키슈사이도 다도(茶道)를 즐기고 있었기에 고가의 다기를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토록 애장하던 다기를 판 돈으로 자신의 장례비로 써줬으면 한다... 라는 유언을 통해서는, 노인의 안타까움이 은은하게 전해져 온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대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세키슈사이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음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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