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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182017.03.01 AM 09:50
제 2 장 쇼군(将軍)을 지탱한 병법자 -토쿠가와 삼대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 허황된 설이 분분한 소박한「검호(剣豪)」
~ 세키슈사이(石舟斎)의 다섯째 아들인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는, 거의 동시대를 살아간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와 비교대상이 되는 경우가 잦다. 대부분의 관심은, 검의 실력이 어느쪽이 위인가... 라는 점에 맞춰져 있는 듯 하다.
대체 누가 더 강했을까? 그것은 오늘날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 되곤 하나, 두 사람 모두 스스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어도, 이미 에도시대(江戸時代)에 여기에 대해 다룬 자료가 있다.
예를 들자면, 무네노리의 제자로서 면허(免許)도 받았다고 자칭하는 와타나베 코안(渡辺幸庵)이라는 센고쿠시대(戦国時代)를 살아남은 이 노인은,「바둑판에서의 승부를 예로 든다면, 무네노리가 9점 바둑을 두면 무사시와 호각」이라며, 그의 회고담인『幸庵対話(코안타이와)』에서 말하고 있다. 아무리 자신의 스승인 무네노리라 해도, 무사시의 검에는 맞설 수 없을 것이다... 고 말한 것이다.
터무니 없는 이야기도 있다. 에도시대 후기의『異説区々(이세츠마치마치)』라는 수필 기사다. 무사시의 생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열살 이상은 연상이었을 무네노리가, 그 수필집에서는 무사시의「제자」로 되어 있으며, 어느날 스승과 제자가 검을 겨루니, 무사시가 가볍게 무네노리를 이겨냈다 한다.
무네노리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2대 쇼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병법 사범을 맡았다는 오노 지로에몬 타다아키(小野次郎右衛門忠明)와의 실력 비교에서도 자주 거론된다.
개명하기 이전의 이름을 미코가미 텐젠(御子神典膳)이라 했던 지로에몬은, 잇토류(一刀流)를 익혀 히데타다의 사범이 되었는데, 그의 봉록은 600석이었는데, 나중에 1만 2500석의 다이묘(大名)로 입신 출세한 무네노리와 비교하면, 대우에 큰 차이가 있었다. 지로에몬을 개조(開祖)로 하는 후세의「오노파 잇토류(小野派一刀流)」검사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개조인 지로에몬과 대결한 무네노리가 비겁한 수를 썼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몇몇 잇토류 계열의 속서(俗書)에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一刀流口伝(잇토류쿠덴)』이라는 서적이 이러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 바쿠후(幕府)가 창설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에 에도로 온 지로에몬이, 야규 도장으로 들이닥쳐 무네노리에게 타류 시합(他流試合)을 신청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승부를 받아들인 무네노리는,「우리 도장에서는, 시합을 원하는 이를 대할 때에 진검을 사용하니, 행여 남길 말이 있다면 지금 말해주시오」라 말하며 재빨리 검을 뽑아 자세를 취했다.「알겠소」라며 응하는 지로에몬. 때마침 곁에 놓여있던 타다 남은 장작을 손에 들고서「자!」하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검이 내뿜는 기백에 어느새 꼼짝 못 하는 상태가 된 무네노리에게, 지로에몬은 스르르 미끄러지 듯 하며 그의 안면에, 또 옷에도 검댕이 자국을 남겼다.
오히려 개조인 지로에몬의 명예를 더럽히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지독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검의 실력은 엉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처세에 능했다는 이유만으로 출세한 이가 야규 무네노리라는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선전하는 의도가 느껴진다. 즉,「질투」에서 나온 치졸한 날조나 다름 없다.
허구(虚構)라는 세계에서 유명한 적자 쥬베에(十兵衛)와는 달리, 무네노리는「검호(剣豪)」로서는 소박한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센고쿠시대에서 에도시대 초기까지 살아간 이 남자가 가진 본래의 면목(面目)은, 어디까지나「검의 길」에 있었다. 검을 자신의 삶의 좌표축으로 삼아, 일본 검도사(剣道史)에 있어서 특이한 존재라 여겨지는 이 인물의 실상(実像)을 쫓아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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