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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222017.03.08 PM 07:35
제 2 장 쇼군(将軍)을 지탱한 병법자 -토쿠가와 삼대와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 겐나(元和)의 반역 사건과 무네노리(宗矩)
~ 오늘날「산인(山陰)의 작은 쿄토(小京都)」라 불리우는 츠와노(津和野: 시마네 현 츠와노 쵸)의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의 3만석을 영유한 한슈(藩主)인 사카자키 데와노카미 나오모리(坂崎出羽守直盛: 나리마사라고도 전한다)의 모반 사건은, 토쿠가와 쇼군(徳川将軍) 15대 중 손 꼽히는 반역 사건들 중에서도, 그 기교(奇矯)함에 있어서 특필해야 할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려 쇼군의 딸이 출가하기 위해 가마에 들어서기에 앞서, 그 가마를 탈취하려 한... 게다가 일개 다이묘(大名)가 계획했기 때문에, 심상치 않은 사건이다.
오오고쇼(大御所) 이에야스(家康)가 세상을 떠난지 겨우 3개월이 지난 겐나(元和) 2년(1616) 7월, 이에야스의 손녀... 즉, 쇼군 히데타다(秀忠)의 장녀인 센히메(千姫)와 혼다 타다토키(本多忠刻)의 혼의(婚儀)가 있어, 센히메는 에도(江戸)에 있던 혼다 저택으로 들어갔다.
센히메는 정략 때문에 어렸을 때에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와 결혼하였고,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에 토쿠가와 가문으로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재혼이었다. 그녀가 첫 결혼 상대였다고 하는 신랑 혼다 타다토키는,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는 증손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즉, 타다토키의 모친이자 이세(伊勢) 쿠와나 성(桑名城) 성주인 혼다 타다마사(本多忠政)의 아내는, 이에야스의 장남인 오카자키 노부야스(岡崎信康)의 둘째 딸이었다. 타다토키는 센히메보다 한 살 연상이었던 스물한살, 잘생긴 외모로 유명한 젊은이였다.
9월이 되어 센히메가 쿠와나로 내려가게 되었다. 사카자키 데와노카미는 그녀가 가는 도중에 길을 가로막아 그녀가 탄 가마를 탈취하고자 계획했으나, 이 계획은 실행되기 전에 간파당하고 말았다. 그는 야나기하라(柳原: 일설에는 유시마)의 에도 저택에 틀어박혀 어디까지나 바쿠후(幕府)이 대처에 대한 준비 태세를 보였다. 머리를 깎고, 일족낭당들도 머리를 깎게 하고는 화기를 포함한 무기를 준비했다. 죽음을 각오한 반역이었다.
소동에 대비해 여러 다이묘들이 병력을 모았다. 평의(評議)를 위해 막각(幕閣)이 소집되었다. 에도 시중의 공기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때 쇼군 히데타다는, 데와노카미를 회유하기 위한 사자를 보냈다고『徳川実紀(토쿠가와짓키)』의「台徳院殿御実紀(타이토쿠인덴고짓키)」에 기록되어 있다.
회유를 위한 사자로 파견 된 이는, 히데타다의 병법 사범인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였다. 당시 3000석의 하타모토(旗本) 지위에 지나지 않았던 무네노리가 그런 중임을 맡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일설에서 말하는, 평소에 데와노카미와 절친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데와노카미는 무네노리와 면담을 거절했다.
비만이었던 데다 덩치가 컸다고 전해지는 데와노카미는, 성미가 급한 반면에 집요한 구석이 있었던 듯 하다. 일찍이 자신의 가문의 죄인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인척인 토다 노부타카(富田信高: 이세 아노츠 성의 성주, 후에 이요 우와지마로 이봉된다)와 다퉈, 바쿠후에 고소를 했다가 결국에는 토다 가문을 개역(改易)당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그는 그 고소사건에서 승소할 때까지 꼬박 8년의 세월을 소비했다.
그런데, 사자인 무네노리가 거절당했기 때문에 도이 토시카츠(土井利勝) 등의 바쿠로(幕老)는 평의를 거친 결과, 이번에는 데와노카미의 중신들에게 연서(連署)를 봉서(奉書)하라 명령했다.
- 주군의 거동은 광기(狂気)로 인한 점이 있어 군신이 예를 잊은 듯 하니, 윗선의 뜻에 따라 주군께 아뢰어 자결케 한다면, 사카자키 가문이 다시 설 수 있게 조치를 바랍니다.
그러한 내용의 봉서였는데,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만은, 이에 서명하지 않았다. 불신(不臣: 신하로서 도리를 지키지 못 함)을 처벌하는 데, 그 가신에게 불신을 조장케 하는 것은 천하가 지시해서는 안 되니, 그저 하루속히 군세를 파견하여, 그 역신(逆臣)을 추토해야 한다... 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결국, 사카자키 가문 단절이라는 결과로 이 사건은 끝을 맺는다. 봉서의 내용은 지켜지지 않았고, 데와노카미의 죽음은 자결에 의한 게 아니었다는 뜻이 된다. 신하가 살해했다는 게 통설이다. 가신들의 이러한 행동은 즉, 봉서에 위배되는지라, 히데타다의「자신의 주군을 속여 목을 베어 바치다니, 이는 무도(無道)하다」라는 뜻에 따라, 사카자키 가문의 영지는 모조리 몰수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데와노카미는 그런 기묘한 짓을 계획한걸까?
데와노카미의 센히메 강탈 미수 사건의 이유에 대한 패사(稗史) 쪽 설은 다음과 같다.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에서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막 함락되려 했을 때, 이에야스는「성 안에 있는 센히메를 구출해 내는 이에게는 내 손녀를 아내로 주겠다」라며 여러 장수를 부추겼다. 그때, 불타고있던 성 안으로 용감하게 뛰어 들어 가 센히메를 구출해 낸 이가 다름 아닌 사카자키 데와노카미였다. 이에야스는 데와노카미에게「센히메를 구해주었구나. 약속대로, 그대에게 센히메를 주마」라 명언(明言)했다. 하지만, 센히메를 구출할 때에, 데와노카미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외모가 추해진 그를, 센히메는 뱀이라도 본 것 처럼 싫어해, 이런 사람에게 시집갈 수 없다며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후, 그녀는 미남인 혼다 타다토키에게 시집 가게 되었다. 일방적인 이 파혼담에 대해, 데와노카미는 분노하였고, 결국 센히메가 탄 가마를 빼앗아 그녀와 동반자살하기로 결의했다...
이상이 항간에 떠돌았던 설인데, 사건의 발단이라 여겨지는 데와노카미의 센히메 구출에 대해서는, 사실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오오사카 성 함락 직전, 성 안에 있던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는, 센히메가 성 밖으로 나가 히데요리의 구명을 이에야스에게 부탁한다는 계책을 센히메의 시녀에게 진언했다. 시녀는 센히메를 데리고 야구라(櫓)를 나섰다. 일행이 타카이시가키(高石垣) 아래까지 왔을 때, 이를 호리우치 몬도 우지히사(堀内主水氏久)라는 사무라이가 이를 수상히 여겼다. 스무명 뿐인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흰 바탕에 접시꽃 문양이 흐트러진 장옷 차림의 여성이 수상쩍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문하자,「칸토(関東)의 히메시오. 용무가 있어 성 밖으로 가야하니, 함께 가주시지요」라는 여성 중 한 명의 대답. 호리우치는 이에 따라 일행을 안내하며 성 밖으로 나갔더니, 사카자키 데와노카미를 만날 수 있었다. 데와노카미는 센히메를 모시고 히데타다를, 거기서 다시 챠우스야마(茶臼山)에 있던 이에야스의 진소(陣所)로 그녀를 배웅해주었다(이상『家忠日記』외 다른 서적에 의한다). 또 다른 설에는, 호리우치 몬도등 몇몇 사람들이 센히메를 경호하여 데와노카미의 진소로 찾아갔고, 그런 데와노카미가 그길로 챠우스야마로 갔다고 나와있다.
어찌됐든, 데와노카미는 센히메를 구출해 낸 게 아니고, 성 밖으로 탈출을 도와준 것도 아니라, 그저 수행하여 이에야스의 곁으로 히메를 안내해주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가령 이에야스가 앞에서 말한대로 서약을 했다고 해도, 후에 데와노카미가「파담(破談)」에 격분할 이유도 없다. 더불어, 센히메와 데와노카미는 연령적으로 맞지 않는다... 라는 것도 있다. 생년은 불분명하지만, 데와노카미는 마흔을 넘겼으리라 생각된다. 불혹을 넘긴 남자가 딸 같은 나이인 센히메와의 결혼에 집착했다... 라는 억측에 무리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데와노카미가 반역을 일으킨 이유를 추량(推量)해 볼 다른 설이 있다.
오오사카 성에서 탈출한 센히메와 대면한 히데타다는 화색을 띄운 게 아니라, 오히려「히데요리와 끝을 함께 했어야지...」라며, 딸을 질타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딸의 생환을 기뻐했음에 틀림 없다. 이렇게 돌아 보니, 자신의 사랑하는 딸은 아직 젊기에, 딸을 과부로 둘 수 없었던 히데타다였다.
하지만, 그녀는 토쿠가와와 적대한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정실이었기 때문에, 다이묘들도 선뜻 나서지 못 했다. 그러다 보니, 상대는 쿄(京)의 셋케(摂家)나 세이가케(清華家) 같은 쿠게(公家)에서 고르고자 생각하게 되었다. 그에 대한 주선자를 사카자키 데와노카미에게 맡겼다. 데와노카미는 본디 사촌형에 해당하는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의 부장이었다)를 모시고 있었을 당시, 쿄토를 자주 왕래했기 때문에, 쿠게들 사이에서도 지인들이 많다는 사실이 히데타다의 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데와노카미는 쿄로 올라가 분주하게 뛰어다닌 끝에, 합당한 상대와의 혼의를 결정하고는, 돌아와서 히데타다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히데타다는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센히메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그런 상대와 만나는 것 조차 내키지 않는데, 강제로 시집까지 가라 하시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겠사옵니다」라며 슬퍼했기 때문에(『藩翰譜』), 히데타다는 너무나 놀라서 데와노카미에게「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야겠소」라며, 약혼을 파기할 뜻을 전하게 했다.
데와노카미의 입장에서는, 이제와서 파혼 보고를 위한 사자로서 체면이 서지 않았다. 히메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하며, 그 자리를 물러났지만, 어느날 갑자기 센히메와 혼다 타다토키가 혼례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온 것이었다.
데와노카미는 격노했다. 자신의 체면은 어쩌란 말인가. 쿄에 있는 지인들과의 신의(信義)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히데타다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분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고, 결국에 그는 센히메의 가마를 탈취해 쿄로 데리고 갈 것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교한 반역 행위에 위의 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고있긴 해도, 원인은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 진상을 풀어줄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 하나가, 사건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야규 무네노리였을 것이다.
무네노리가 히데타다의 명령을 받아 데와노카미의 설득에 나섰다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는데,『玉栄拾遺(교쿠에이슈이)』에서는, 무네노리의 설득에 따라 데와노카미가 자결했다고 나와있다. 거기다 무네노리는 사카자키 가문 단절 이후의 츠와노의 성지(城地) 인도 때 파견된 사자 중 한 명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야규의「니카이가사(二階笠)」문양은, 사카자키 가문의 가문(家紋)이었던 것을, 이 사건을 해결한 공에 의해 히데타다가 무네노리에게 주었던 것이라 한다. 무네노리는 이것을 후쿠몬(副紋 = 替紋: 카에몬)으로서 배령했지만, 후년에 속세에 「야규가사(柳生笠)」라 불리웠을 정도로 아예 죠몬(定紋)처럼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야규 가문의 문장이라 인식되는 니카이가사몬]
이를 포함해, 사건 후의 무네노리의 행동에는 수수께끼 투성이인 점이 적지 않다.
데와노카미의 적자인 헤이시로(平四郎)를 데려와 양육했다는 것. 센히메 구출 때에 데와노카미가 사용한 「야만바(山姥)」라는 이름을 가진 창을 후에 이에미츠로부터 하사받았다는 것. 또, 야규 가문이 후세에 데와노카미를 극진히 공양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즉, 에도 야규의 7대 당주였던 토시미네(俊峯)가 사카자키 데와노카미의 에도 쪽 매장지인 카이젠지(海禅寺: 당시에는 아사쿠사로 이전되었다)에, 데와노카미의 묘의 존재 여부를 조회해 보게 했다는 것. 거기다, 무네노리와 인연이 깊은 타쿠안(沢庵)이 창건한 토카이지(東海寺)의 탓츄(塔頭)인 쇼린인(少林院)에서 데와노카미의 법사(法事)를 집행했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데와노카미에 대한 무네노리의 진혼(鎮魂)을 바라는 마음이 떠오르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건의 복잡한 배경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억측되기도 한다.
어찌됐든, 그것이 무네노리라는 막신(幕臣)의 존재감을 높힌 사건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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