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372017.03.31 PM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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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또 하나의 야규(柳生) 가문 -「오와리 야규(尾張柳生)」와 신카게류(新陰流)

 

 

◎ 오와리「오류기(御流儀)」의 개조(開祖)

~ 오와리(尾張) 나고야(名古屋)의 한조(藩祖)인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가 일어난 해(케이쵸 5년 = 1600)에 태어난 이에야스(家康)의 아홉째 아들로, 3대 쇼군(将軍)인 이에미츠(家光)에게는 숙부에 해당한다. 후에 키이(紀伊) 와카야마(和歌山), 히타치(常陸) 미토(水戸)의 토쿠가와 가문을 포함한 고산케(御三家)의「수장(長)」이 된 요시나오가 어렸을 적부터 무예(武芸)를 좋아한 것은, 천하의 주인을 판가름하는 전투가 일어난 해에 태어났다는 자부심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나기까지 16대를 이어온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의 한슈(藩主)들에게, 이런 요시나오의 호무 기풍(好武気風)은 거의 계승되었다고 해도 좋은데, 이 가문이 검술(剣術)의「오류기(御流儀)」라 여겨진 것이 바로 신카게류(新陰流)였다. 

 그런 오류기의 사범 가문의 선조를 야규 효고노스케 토시토시(柳生兵庫助利厳)라 한다. 세키슈사이(石舟斎)의 장남인 요시카츠(厳勝)의 차남으로, 요컨데「에도 야규(江戸柳生)」의 선조인 무네노리(宗矩)에게는 조카, 또, 쥬베에 미츠요시(十兵衛)에게는 사촌형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세키슈사이는, 전장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젊었을 적부터 불구의 몸이 된 요시카츠를 불쌍히 여긴 나머지, 적손(嫡孫)인 토시토시를 어엿한 병법자로 키우기 위해, 야규 고(柳生郷)에서 손수 그를 가르쳤다. 

 토시토시는『尾州諸家系図集(비슈쇼카케이즈슈)』(『名古屋市史』 소장)에 따르면, 젊었을 적에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를 모시며 1300석을 받았다 한다. 이는 키요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52만석이 주어지고 3년이 지난 케이쵸(慶長) 8년(1603)... 즉, 토시토시가 스물다섯살 때의 일이라고『名古屋市史(나고야시시)』가 소장한「利厳伝(토시토시덴)」(『士林泝洄』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는 기록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로쿠다카(禄高)가 500석이라 나와있다. 

 키요마사의 히고 입국 당초의 가신단은, 그의 출신지인 오와리 사람들이나, 삿사(佐々) 씨나 코니시(小西) 씨 등... 히고의 옛 영주들의 남겨진 가신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신참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미 분로쿠(文禄) 3년(1594) 이후,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인연을 맺은 세키슈사이는, 이에야스의 양녀를 계실(継室)로 맞이하여 토쿠가와와 친인척 관계에 있었던 키요마사에게 부탁받아 그 혼성 가신단에 사랑하는 손자를 들여보낸 듯 하다.「토시토시덴」에 따르면, 세키슈사이는 그때,「지기(知己)」인 키요마사에게 이렇게 잘라 말하고 있다.


「토시토시는 검을 잘 다루는 자로, 간성(干城: 국가를 수호하는 무사)의 자질을 가진 자이긴 하나, 편급(褊急: 도량이 좁고 성급한)한 성격이라 필시 타인에게 양보할 줄 모를 것이기에, 노부(老父: 요시카츠)는 항시 이를 걱정해 왔소이다. 지금까지 사관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소. 그대(키요마사)의 관홍(寛弘)한 마음은 이러한 광태(狂態)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라 생각하겠소. 바라옵건데, 이 봉록으로 야규의 이름이 큐슈(九州)에도 전해질 수 있다면, 그것을 은혜라 생각하겠소」


 세키슈사이로서는 겸양(謙譲)의 뜻을 담아 말했을테지만, 키요마사에게 출사한 뒤, 과연 토시토시는「동료와 다투다 결국 그 사람을 습격해 쫓아내버리고는 야규로 달아났다」며 동서는 기록하고 있다.『비슈쇼카케이즈슈』에는「부득이한 사정(よんどころない子細)」에 의해 히고를 떠나「로닌(浪人)」이 되었다고 나와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로부터 2천석에 고용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키요마사의 옛 은혜를 감안해 토시토시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도 한다(이쪽은「토시토시덴」의 기술). 

 그런 토시토시가 토쿠가와 요시나오에게 고용된 것은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阪夏の陣)가 있었던 겐나(元和) 원년(1615), 그가 서른일곱살 때다. 이 출사는 슨푸(駿府)에서 이뤄졌으며, 녹봉은 500석(『비슈쇼카케이즈슈』)이었다. 당시 열여섯살이었던 요시나오의 거듭된 요청에 응해 병법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가 가르치기로 한 병법이란 신토류(新当流)의 창술(槍術)과 아나자와류(穴沢流)의 나기나타술(長刀術)이었다. 이 사관은, 이에야스가 요시나오의 곁에 붙여 둔 츠케가로(付家老)인 나루세 하야토노쇼 마사나리(成瀬隼人正正成)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한다. 

 토시토시는 조부인 세키슈사이로부터『新陰流兵法目録事(신카게류헤이호모쿠로쿠노코토)』『新陰流截相口伝書事(신카게류키리아이쿠덴쇼노코토)』(이 두 전서는 케이쵸 8년, 세키슈사이가 일흔다섯살 때 저술한 것이다)『没茲味段口伝書事(모츠지미슈단쿠덴쇼노코토)』(케이쵸 10년 작), 또, 유조(流祖)인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上泉伊勢守)로부터 세키슈사이에게 전해진「잇코쿠이치닌(一国一人)」인가장(印可状)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을 요시나오에게 줌과 동시에, 주군을 신카게류 병법 도통(道統)의「4대」로 삼은 것은, 겐나 6년(1620)의 일이다. 이후,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의 오류기 신카게류는, 야규 가문의 역대 사범들과 오와리 한의 역대 한슈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전수되어 갔다. 

 오와리 야규 가문의 선조였으면서 남겨진 일화가 얼마 없는 토시토시는, 일흔살 때에 은거를 허락받아(은거령 300석) 죠운사이(如雲斎)를 호로 삼았다. 그리고, 쿄토(京都) 묘신지(妙心寺)의 탓츄(塔頭)인 린쇼인(麟勝院)에「류안(柳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레이호(霊峰)라는 선사(禅師)와 교류를 가졌다. 한슈인 요시나오가 죽은 해인 케이안(慶安) 3년(1650) 일흔두살 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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